제10화. 반품된 시나리오, 고장 난 프롬프트

by 배윤성

8K 화질 속에서 조각 같은 남녀가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김 작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야, 잠깐 멈춰봐." "왜요?"
김 작가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저 눈빛 봐봐. 울고 있는데 눈만 울어. 입가 근육이 굳어 있잖아. 전형적인 AI 오류야. 슬픔이라는 감정 데이터를 입력하니까 눈물은 짜내는데, 근육은 못 따라가는 거지."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한 비주얼에 압도당했던 눈이 점차 적응되자, 구멍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토리는 기승전결도 없이 자극적인 장면의 나열이었고, 캐릭터들은 일관성 없이 그때그때 유행하는 밈(Meme) 대사를 뱉어대고 있었다.
"이런 건... 영화가 아냐."
내가 중얼거렸다.
"어때? 마음이 움직여? 이건 그냥 1시간 반짜리 'CF, 예고편'이야."
대충 스킵해서 한 시간의 시사가 끝난 후. 우리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절망감일까? 아니었다. 그것은 묘한 안도감, 아니 확신이었다.
"야..."
남 대표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빈 깡통인데?"
"그치?"
나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술은 끝내주게 발전했는데, 정작 알맹이가 없어. 때깔 좋은 8K 영상 화보집이지,"
나는 방금 본 영상들을 머릿속에서 되감기 하며 분석했다.
"딱 두 가지가 없어. 첫째, 진짜 이야기. 그냥 도파민 터지는 장면만 나열하니까 감정이 쌓이질 않아. 3초에 한 번씩 터지는데 30분 지나니까 지루해서 미치겠더라."
"맞아. MSG도 육수를 끓이고 넣어야 맛이지, 맹물에 가루만 타면 혀만 아리지."
김 작가가 혀를 차며 거들었다.
"그리고 둘째... 이게 제일 중요해. 눈(Eye)."
내가 손가락으로 눈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아까 그 멜로 영화 봤어요? 남자가 우는데 입꼬리 미세 근육은 웃고 있어. '슬픔'이라는 데이터값만 넣으니까 눈물은 짜내는데, 진짜 사람이 억장이 무너질 때 나오는 그 일그러짐... 그게 안 되는거야."
"어! 나도 그거 느꼈어!"
남 대표가 무릎을 탁 쳤다.
"근데 아까 그 좀비 영화 있잖아. 거기서 끝까지 도망가다 죽던 놈 기억나? 걔가 주인공보다 연기 훨씬 잘하더라. 죽을 때 그 처절한 표정, 걔는 진짜 같던데?"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 아니에요? 왜 단역으로 단골 출연하던... 혹시나 했는데... 실제 배우 연기를 합성한 거예요."
내가 팩트를 짚어줬다.
"크레딧 찾아보니까 그 배우가 직접 연기했더라고요.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죽여주게 잘 생기고 예쁜 AI 생성 주연보다, 싼 출연료 주고 계약한 무명 배우가 훨씬 인상이 남잖아요"
순간, 창고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동시에 같은 곳을 바라봤다. 답은 정해졌다.
"결국... 사람이네."
김 작가가 안경을 고쳐 쓰며 펜을 들었다. 방금 전까지 주눅 들어 있던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0과 1은 인간의 미세한 떨림을 흉내 못 내. 우리가 파고들 빈틈이 바로 저기야. 화려한 CG가 아니라, 진짜 배우의 땀구멍, 핏줄, 흔들리는 동공."
"그래! 바로 그거야!"
남 대표가 벌떡 일어났다.
"우리가 가진 게 뭐냐? 돈? 기술? 다 없지. 근데 우리 셋 짬밥 합치면 70년이야. 그 70년 동안 우리가 술 사 먹이고, 달래고, 키워낸 배우들이 몇 트럭이냐고."
그가 주머니에서 낡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액정은 깨져 있었지만, 그 안에 저장된 전화번호부는 보물지도나 다름없었다.
"이제 그 인맥, 제대로 써먹을 때가 왔어. 컴퓨터가 못 만드는 진짜 '괴물' 하나 데려오자."
"누구? 생각나는 사람 있어? “
"찾아야지. 연기는 기가 막힌데, 뜨지 못해서 백날 유망주였던 친구들 있잖아. 각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 하나 둘쯤은 있을 걸?"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먼지 구덩이 양파 창고. 가진 거라곤 게임용 PC 하나와 그거 사고 남은 돈 300만 원. 하지만 우리에겐 저 AI 기술자들이 가지지 못한 '사람 냄새나는 장부'가 있었다.
"자, 내가 알고 지내던 기획사 대표들 싹 한 번 뒤져서 배우 데리고 올게."
남 대표의 호기로운 외침에 심장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나는 곧 냉정을 되찾고 찬물을 끼얹었다.
"형. 배우는 형이 데려온다 쳐. 근데..."
"근데 뭐?"
"그 배우 데려다가 무슨 이야기를 찍을 건데?"
"......어?"
남 대표가 멈칫했다. 그렇다. 명배우 송강호를 데려와도 대본이 없으면 그냥 아저씨다.
"총은 샀는데 총알이 없잖아. 일단 죽여주는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구.”
남 대표의 표정이, 겨우 그거 걱정했냐?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김 작가, '보물 창고' 좀 열어봐. 그동안 쓴 것 중에 아까워서 안 판 거 있을 거 아냐."
남 대표 말에 김 작가가 쭈뼛거렸다. 그는 가방에서 낡은 가죽 케이스에 담긴 외장하드를 하나 꺼냈다. 마치 독립운동가가 비밀문서를 꺼내듯 조심스러웠다.
"있긴 한데... 요즘 트렌드랑 맞을지 모르겠다."
"에이, 김 작가님 글빨 살아있잖아요. 일단 한 번 보따리나 풀어봐요."
김 작가가 외장하드를 연결하고 작업 파일에 꽁꽁 숨겨놨던 기획서 파일을 하나씩 꺼냈다.

<제목: 마지막 편지>
- 로그라인: 시한부 선고를 받은 섬마을의 유일한 우체부가, 자신이 배달하지 못한 편지들의 주인을 찾아다니며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휴먼 드라마.
"어때? 벌써 짠한 느낌이 들지 않아?"
김 작가가 기대에 찬 눈으로 우리를 봤다. 하지만 창고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음..."
남 대표가 입을 쩝 다시며 말했다.
"김 작가. 솔직히 말해서... 너무 올드한 감성 아니냐? 방송국 단막극도 아니고. 요즘 애들이 편지를 알까? 다 카톡 하고 디엠하지."
"그게 아날로그의 맛이지! 손글씨에 담긴 진심!"
"진심 좋지, 근데 지금 2030년이야. 그리고 이거 100억짜리 공모전이라구. 새끈하고 날고 기는 기획들 넘쳐날텐데. '힙'하고 자극적인 거 없어?"
김 작가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는 두 번째 파일을 열었다.
<제목: 99년의 약속>
- 로그라인: 밀레니엄 버그로 세상이 멸망할 줄 알았던 1999년. 헤어진 연인이 남산 타워에서 재회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달리는 이야기.
"이건 좀 낫네. 레트로 느낌도 있고."
내가 거들자, 남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야, 무슨 <응답하라> 시리즈냐? 레트로 한물간 지가 언젠데."
"뻔해?"
김 작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야, 원래 클래식은 영원한 거야. 너네가 말하는 그 '힙'한 게 뭔데? 틱톡 챌린지처럼 춤이나 추면 그게 영화냐?"
"김 작가, 냉정해야 돼. 우리가 예술하려고 모인 건 아니잖아. 내 말은 지금 시대에 먹히겠냐는 거지."
"맞아요, 작가님. 솔직히... 저도 좀... 요즘 애들은 3분도 길어서 못 참는데, 우체부가 편지 돌리기도 전에 채널이 먼저 돌아가요."
나까지 거들자, 김 작가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는 외장 하드를 거칠게 뽑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래. 나 낡았다. 고리짝 작가다. 너네 눈엔 내가 감 떨어진 퇴물로 보이겠지."
"아니, 누가 퇴물이래?"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내가!"
김 작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이 짓거리 하느라 내 인생 다 말아먹었어. 각본상 탄 작가 타이틀? 그놈의 알량한 이름값 하나 지키려다가 마누라 임종도 제대로 못 지켰고, 딸내미랑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어. 근데 이제 와서 너네까지 내 글이 쉰내 난다고 하면... 난 대체 뭐 하고 산 거니 여태?"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남 대표가 헛기침을 하며 수습하려 했다.
"아니... 김 작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우리가 언제 김작 무시했어? 그냥 AI 영화니까 좀 새로운 걸 해보자는 거지."
"새로운 거? 그래. 그럼 그 잘난 기계한테 한번 물어보자."
김 작가가 씩씩거리며 PC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
"내 감성이 낡았는지, 먹히는지. 이 최첨단 기계 놈한테 그려보라고 해. 네가 말한 '비주얼'로 뽑으면 다를 거 아냐."
"어... 그래. 그래. 이걸로 한번 돌려보자. 박 감독, 네가 프롬프트 좀 쳐봐."
나는 분위기를 수습하려 황급히 자리에 앉았다. 김 작가의 <마지막 편지>를 시각화해 보기로 했다. 시놉시스를 제미나이에다 업로드하고,
"자, 입력합니다. [Prompt: 시한부 우체부, 슬픔, 눈 내리는 거리, 낡은 편지, 감동적인]"
엔터. 위이잉- 쿨러가 굉음을 냈다. 김 작가는 팔짱을 끼고 모니터를 노려봤다.
띠링! [생성 완료]
"나왔다!" 하지만 화면에 뜬 것은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가 아니었다.
"......"
"......야."
김 작가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면 속에는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웬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눈송이가 아닌 사람 눈알(Eye)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입에 편지봉투를 물고 네 발로 기어가고 있었다.
"......이게 내 시나리오냐?"
"아니, AI가 '눈(Snow)'이랑 '눈(Eye)'을 헷갈렸나 봐요. 다, 다시 해볼게요!"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입력했다. 이번엔 <99년의 약속>.
[Prompt: 1999년, 남산 타워, 연인, 세기말 분위기]
띠링!
이번엔 남산 타워에 매달린 남녀 주인공의 얼굴이 기괴한 몬스터처럼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흡사 공포 영화 <더 씽>의 한 장면 같았다.
"으악! 뭐야 저거!"
"아오, 진짜! 내 아름다운 멜로를 괴물로 만들어놨어!"
김 작가가 폭발했다.
"안 해! 이게 되겠냐?! 내 글이 낡은 게 아니라, 너네랑 이 기계 새끼가 멍청한 거야!"
그는 가방을 챙겨 들고 씩씩대며 창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쾅-!
육중한 철문 닫히는 소리가 양파 창고를 울렸다. 나와 남 대표는 덩그러니 남겨졌다.
"......"
"......야. 박 감독."
남 대표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김작... 진짜 간 거냐?"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럼 우린 어떡해? 대본은 누가 쓰고?"
"......"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바라봤다. 65인치 노래방 TV 화면 속에는, 여전히 '눈알이 내리는 거리에서 네 발로 기어가는 우체부'가 5초마다 반복되면서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기괴한 눈동자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쩔래? 너네 망했어.'
"하아... 미치겠네."
남 대표가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150만 원짜리 PC는 굉음을 내며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우리의 속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시나리오 없는 영화사. 기술 없는 IT회사. 이보다 더 완벽한 디스토피아는 없었다.

(다음 화에 계속)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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