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똥손도 금손이 될 수 있나요

by 배윤성

김 작가가 떠난 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물리적으로 빈자리가 큰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의 구멍이 컸다.

"야... 진짜 삐져서 간 거냐?"

"전화도 안 받네."

남 대표가 한숨을 푹 쉬며 믹스커피를 들이켰다. 화면 속 '눈알 우체부'는 여전히 기괴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주받은 토템 같았다.

"저거 좀 꺼라. 재수 없다."

내가 웹 브라우저의 창을 내리자 창고 안에 적막이 찾아왔다. 시나리오 작가는 가출했고, 150만 원짜리 컴퓨터는 똥만 싸는 기계로 전락했다. 100억은 고사하고, 당장 진행비 걱정부터 해야 할 판이었다.

"박 감독. 너 솔직히 말해봐."

"뭘?"

"우리... 이거 할 수 있는 거냐?"

남 대표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항상 "가즈아!"를 외치던 그였지만, 이번엔 벽이 너무 높아 보였을 것이다.

"잠깐 아까 눈여겨본 게 있는데..."

"뭐?"

"이거 봐봐.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특강들이 열리나 봐"

나는 무료형 동영상 AI 툴에 떠 있는 수많은 팝업 광고창 중에 하나를 가리켰다.


[스크리너스 아카데미 오픈 세미나] - 주제: <프롬프트의 마법: 똥손도 금손 되는 법> - 강사: 허인아 (수석 크리에이터) - 일시: 0월 0일 오후 7시 / 장소: 스크리너스 별관 콘퍼런스홀


"날짜가 오늘이네? 잠깐. 허인아...?"

남 대표가 돋보기안경을 끼더니 모니터를 향해 머리를 쑥 들이밀었다.

"야, 박 감독. 이 강사 낯이 익은데... 혹시 이 여자... 걔 아니냐?"

"누구?"

"2018년도였나? 네 영화 <마지막 수색자>때 스크립터. 맨날 너한테 혼나서 질질 짜던 친구."

나도 다시 팝업창 속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세련된 프로필 사진. 지적인 안경. 하지만 눈매는 분명 그녀였다. 내 현장에서 연결 장면 체크 못했다고 연신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던 스크립터 허인아. 스물몇 살 때였던가?

"와... 걔가 이렇게 컸어? 수석 크리에이터?"

"가자. 삐진 김 작가는 나중에 달래고, 일단 손발부터 구해야지."

"아이 쪽팔려서 거길 어떻게 가? 연출 부였던 애한테 아쉬운 소리 하러."

"야, 박찬혁! 쪽팔림은 한순간이지만, 우리 이 기술 필요하잖아. 안 그래? 빨리 옷 입어!"

우리는 양파 냄새를 지우려 서로에게 페브리즈를 난사했다. 칙칙한 아저씨 둘이서 맹수 조련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오후 7시. 강남역 거리는 화려한 네온사인, 전광판이 대낮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거리는 퇴근하는 직장인들, 술 약속을 잡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마치 거대한 신세계의 물결에 고립된 루저처럼 느껴졌다. 역삼역으로 꺾어지는 사거리에 초고층 ‘스크리너스’ 사옥이 대형 몬스터처럼 웅장한 위용을 드러냈다. 사옥 별관 지하에 위치한 콘퍼런스홀. 거기로 향하는 길에 도착한 1층 로비는 스크리너스 오리지널 작품의 영상들과 캐릭터들이 홀로그램으로 화려하게 구현되고 있었다. 낯설고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홀 안은 젊은 대학생들과 IT 업계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다들 얇은 맥북이나 태블릿을 들고 있는데, 우리 둘만 허름한 점퍼 차림에 빈손이었다.

"야, 여기 애들 물 좋다. 다들 똘똘해 보이네."

"형, 제발 조용히 좀 해. 쪽팔려."

우리는 맨 뒷좌석 구석에 쥐 죽은 듯 앉았다. 잠시 후, 조명이 꺼지고 새로운 그래픽카드를 발표하는 젠슨황처럼, 핀조명을 받으며 단상 위로 한 여자가 걸어 올라왔다. 세련된 버건디 블라우스에 보디라인이 드러나는 검은색 펜슬스커트 아래 매끈한 다리. 그 모습이 마치 여신 같았다.

"여러분, 이제 AI는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편리한 도구일 뿐입니다. 누구나 멋진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죠. 옛날 작가들이 원고지로만 글을 쓰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글을 수정을 하려고 하면, 찢어진 원고지에 담긴 원문의 문맥을 기억할 수 있어야 했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글을 쓸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워드 프로그램이 개발된 후, 그건 능력도 아니게 된 거죠. 버전별로 저장할 수 있었으니까요. 시대는 이렇게 기술에 따라 창작을 쉽게 만드는 쪽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가진 상상력이죠. 자, 이 화면을 볼까요?"

그녀가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자, 화면에는 우리가 3시간 동안 끙끙대도 못 만들었던 할리우드급 영상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우리는 입을 떡 벌리고 쳐다봤다. 저 카리스마 넘치는 여신. 아니 전문가가, 내 옆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서 페이퍼에 코를 박고 기록만 하던 그 아이라니. 세월 참 무섭다.

1시간의 강의가 끝났다.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강단에는 짐을 챙기는 인아만 남았다.

"그냥 가자, 형 나 도저히."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와서! 빨리 앞장서. 박 감독,"

남 대표가 내 등을 떠밀었다. 우리는 쭈뼛거리며 단상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 인아 씨?"

내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하던 눈이 우리를 보고 동그랗게 커졌다.

"어?.....감독님?"

스크리너스 사옥에 위치한 직원 전용 카페. 인아는 우리 둘의 꾀죄죄한 행색을 훑어보더니,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 앞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내 앞에는 샷 추가한 따뜻한 라떼가 놓였다.

"아직도 한 여름에 ‘아아’ 안 드세요?"

"어? 어... 기억하네."

얼굴이 화끈거렸다. 성공한 제자 앞에서 쫄딱 망한 스승의 꼴이라니. 남 대표가 옆에서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짓했다. '야, 분위기 좋다. 빨리 말해.'

"조감독 오빠한테 감독님 소식 가끔 들었어요. 영화 접으시고 뭐 다른 일 하신다고."

"뭐, 요즘 업계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너는... 진짜 성공했더라. 강의 멋있던데."

"살려면 배워야죠. 도태되기 싫으니까."

그녀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뼈가 있었다. 치열하게 적응해 온 자의 자부심. 그 앞에서 우리는 더 초라해졌다.

"근데 여긴 웬일이세요? 감독님 AI 싫어하시잖아요. 'AI는 지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복잡한 감성체계를 절대 이해 못한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으면서."

정곡을 찔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인아 야. 아니, 허 강사님."

"그냥 인아라고 하세요. 그러시면 제가 불편해요."

"그래... 인아 야. 나... 영화 다시 해보려고. 스크리너스 공모전에 낼 거야."

남 대표가 불쑥 끼어들었다.

"인아 씨! 오랜만이야. 나 알지? 남 피디. 우리가 기획은 기가 막힌 게 있는데, AI를 다뤄본 적이 없어서. 자기가 좀 도와줄 수 있지. 응?"

인아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저 몸값 비싸요. 시간당 페이가 50만 원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냉정했다. 역시 프로다.

“어... 아이 뭐. 잠깐 자문 정도라도...”

“그래.. 인아야. 오늘 강의 잘 들었고, 다음에 기회되면 연락할게”

내가 황급히 남 대표 팔을 붙잡아 끌고 자리를 일어났다.

"감독님, 잠깐만요."

인아의 목소리가 우리를 잡았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12년 전, 밤샘 촬영 때 모니터를 함께 보던 그 눈빛과 닮아 있었다.

"감독님. 기획서는요? 뭘 만들겠다는 건지는 들어봐야 견적을 내죠."

나는 사실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아이디어 파편들 뿐.

"아직 미정이야. 근데 내용은,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야. AI가 판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방법으로 저항하는."

"구체적으로요?"

"우린 가짜 안 써. 진짜 배우 쓸 거야. 그것도 바닥까지 떨어져 본 놈들로. 배경은 네가 AI로 깔아주면, 그 위에서 진짜 땀 흘리고 피 흘리는 배우들이 뛰어놀게 할 거야. 0과 1 사이에는 없는 '온도'를 담을 거야."

인아는 메모를 한참 들여다봤다. 카페의 소음 속에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그녀가 메모지를 내려놓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촌스러워요."

"아... 역시 그런가?"

"근데... 감독님다워요. 멍청할 정도로 우직하고, 답답할 정도로 뜨겁고."

그녀가 피식 웃었다.

"요즘 AI 영화들, 다 매끈하고 차갑죠. 근데 이건... 알고리즘으론 계산이 안 되는 온도네요."

그녀가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목요일 시간이 잠깐 비니까 오후에 갈게요. 사무실 주소 찍어주세요."

"어? 진짜? 진짜 도와주는 거야?"

남 대표가 만세를 부르려 하자, 인아가 손을 들었다.

"대신 조건 있어요. 기술적인 건 전적으로 제 지시 따르셔야 해요. '우리가 영화할 때는 말야' 금지. 아시겠어요?"

"오케이! 입 닥치고 있을게!"

"그리고..."

인아가 나를 보며 덧붙였다.

"감독님, 커피 좀 줄이세요. 위장 다 버려요. 여전히 안색 안 좋으시네."

그녀가 쿨하게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우리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우리의 칙칙한 아재 군단에, 드디어 '구세주'가 손길을 뻗어 주었다.

"야, 박 감독. 봤냐? 쟤 눈빛."

"형, 또 또. 쓸데없는 소리 하려고 그러지."

"아니야, 분명히 있어. 너 걱정하는 거 봐라. 야, 쟤가 뭐가 아쉬워서 노땅들 영화하는 거 도와준다고 나서겠냐. 뭐 있어...“

남 대표는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 앞섰다.

"형. 근데..."

"왜?"

"사무실이 썩은 배추 냄새 진동하는 창고라는 건 말 안 했는데."

"......어? 아, 맞다."

내일 인아가 오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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