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사무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철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모두가 잠 못 자고 물에 빠지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쉴 틈은 없었다. 허인아와의 약속까지 남은 시간은 단 15시간. 이 안에 <별을 쏘다>의 시놉시스를 구체적인 씬(Scene) 구성안인 트리트먼트 단계까지 완성해야 했다.
"자, 시작합시다. 김 작가님, 형은 감정 씬 맡아요. 보영이 심리랑 대사 위주로. 전 전체 사건 타임라인이랑 액션 동선 짤게요. 남 대표님은?"
"나? 난 뭐 해?"
"라면 끓여요. 그리고 타이핑 알바."
우리는 X 맞은 것처럼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양파 창고는 순식간에 '전시 상황실'로 변했다. 화이트보드 대신 굴러다니는 애호박 박스 뒷면에 매직으로 타임라인을 그렸고, 포스트잇 대신 달력 뒷면을 찢어 아이디어를 적어 벽에 덕지덕지 붙였다.
[새벽 6시]
"야, 박 감독. 선호가 보영이 정체 알게 되는 장면 말이야. 여기서 바로 따지면 안 돼. 선호는 바보잖아.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지. 그게 사랑이지." "형, 그러면 답답해서 고구마 먹는다고요. 요즘 관객들은 사이다 원해요. 바로 질러야지!"
"이게 낭만이야! 낭만 몰라? 뜸 들이는 맛이 있어야 슬픔이 배가 되는 거라고!"
[오전 9시]
"야, 남정식! 너 오타 좀 그만 내! '사랑해'를 '사망해'로 치면 어떡하냐!" "아니, 손가락이 굵어서 그런 걸 어쩌라고!."
[오후 2시]
"이 대사 어때? '내 로켓엔... 네가 탈 자리는 없어. 하지만 내 심장엔 네가 박혀서 빠지질 않아.'"
"이 형 어떡하냐, 손발 오그라든다 진짜!"
"뭐 어때! 80년대잖아! 시대 감성에 딱 맞는구만!"
우리는 싸우고, 소리 지르고, 낄낄거렸다. 마치 20년 전, 충무로 뒷골목 여관방에서 담배 연기 자욱한 채 데뷔작을 쓰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몸은 썩은 양파 냄새 진동하는 창고에 있었지만, 우리의 영혼은 1982년 명동 거리를, 안기부 지하 취조실을, 그리고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느새 해는 저물었고, 오후 8시. 끼이익- 육중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사무실 내부는 이미 라면 국물 냄새와 소주 냄새로 칵테일이 되어 있었다. 그 지독한 공기를 가르며 누군가 서 있었다. 하얀색 울 코트를 입은 허인아였다.
그녀는 어제 내가 걱정되어 퇴근하자마자 달려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무실 불을 켰더니 그녀의 눈에 비친 광경은 그야말로 재난 현장이었다.
바닥에는 '진라면 매운맛' 봉지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소주병 몇 개가 볼링핀처럼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신문지와 박스를 덮고 널브러져 있는 세 구의 시체... 아니, 코 골며 뻗어 있는 중년 남성들.
"!!!"
인아가 코를 막으며 들어왔다. 내가 부스스 일어나며 눈을 비볐다. 눈곱이 꼈고, 머리는 까치집을 제대로 지었다.
"어... 인아 왔어?"
"감독님. 도대체 여기서 뭘 하신 거예요?"
"아. 머리 아퍼..."
나는 비틀거리며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밤새 출력해 놓은 따끈따끈한 A4 용지 뭉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약속... 지켰다."
인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25매짜리 원고를 받아 들었다. <별을 쏘다 트리트먼트>
그녀가 첫 장을 넘겼다. 창고 안에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김 작가와 남 대표도 어느새 일어나 숨을 죽이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저 여자분이 허인아 씨?”
“쉿!”
한 장, 두 장. 인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가, 다시 펴졌다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심각해졌다. 20분쯤 지났을까. 그녀가 마지막 장을 덮었다.
"......"
"어때요? 별론가...?"
김 작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아가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 그녀의 눈가가 아주 살짝 붉어져 있었다.
"촌스럽네요. 요즘에 이런 얘기가 맞나 싶기도 하고."
"아... 역시 그런가."
우리는 동시에 탄식을 내뱉었다.
"근데..."
인아가 원고를 가슴에 품으며 말했다.
"재미는 있네요."
"진짜?"
"이 '고스트'라는 아빠. 악역인데 왜 이렇게 짠해요? 마지막에 자폭 버튼 누르면서 딸 이름 부르는 거... 이거 완전 반칙이잖아요."
"그쵸? 내가 그거 쓰면서 가슴속 마른 눈물까지 다 끌어왔잖아!"
김 작가가 쾌재를 불렀다.
"좋아요. 이 정도 텍스트면 AI 돌려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조도 탄탄하고, 감정선도 명확해서 프롬프트 뽑기 좋겠네요."
인아가 맥북을 켜며 말했다. 우리는 환호했다. 1차 관문 통과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인아가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근데 감독님."
"어?"
"이 배우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창고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특히 아버지 “고스트”역할. AI 캐릭터로만 만들기엔 감정이 너무 복잡해요. 눈빛은 살기등등한데, 입가는 떨려야 하고... 디지털 배우 기술이 발전되었다고 해도, 이런 미세한 감정선을 뽑아내기가 진짜 쉽진 않을 거예요."
"뭐 요새 디지털 초상권으로 배우들 얼굴, 표정 다 쓸 수 있다며?"
"디지털 초상권으로 딥페이크를 한다고 해도, 어차피 AI가 학습된 연기를 생성하는 건데, 감독님이 원하는 그 '진짜 감정'을 뽑긴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래? 아... 인아 실력 정도면 충분히 뽑아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요즘은 '하이브리드'라고, 실제 무명 배우들 써서 만드는 작업이 늘고 있어요. 연기는 사람이 하고, 그 외 앵글, 카메라 무브먼트, 라이팅, 배경은 싹 다 AI가 만들어 합성하는 방식이죠."
남 대표의 눈이 반짝였다.
"그... 그게 가능하다는 거지? 그럼 연기 잘하는 배우만 데리고 오면 되는 거네?"
"누구, 생각해 둔 배우 있어요? 어차피 A급 배우는 꿈도 못 꿀 테고. 연기력은 신들렸는데, 몸값은 싼 사람."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연기 잘하면 비싸고, 싸면 연기가 어설픈 게 이 바닥 생리인데. 남 대표가 머리를 긁적였다.
"야야! 걱정하지 마."
"형, 부탁할 만한 배우 있어?"
"야, 보검이, 정석이, 지은이 현장 매니저 했던 친구들 다 내가 술 사 먹이고 용돈 줘가면서 키운 애들이야. 걔네 지금 전부 다 기획사 대표 됐어. 내가 찾아가서 읍소 좀 하면, 한두 명 정도는 안 걸리겠냐?"
남 대표가 호기롭게 가슴을 쳤다.
"걱정 하덜 마. 내일부터 내가 기획사들 싹~ 돌면서 무릎을 꿇어서라도 괜찮은 배우 잡아 올 테니까. 너네는 인아 씨랑 그림이나 뽑고 있어.“
그래, 우리가 쌓아온 충무로 인맥을 활용할 때다. 이날 이때를 위해서 그렇게 우리는 몸부림치며 업계에 버티며 살아왔나 보다. 인아가 합류하자, 우리 아재들의 칙칙한 창고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분위기는 어느새 꽃길로 바뀐 것만 같았다.
그건 그렇고. 쟤 웃는 모습은... 왜 이렇게 예쁘냐.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