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정식 대표의 이야기
오전 10시. <현대 유통> 사무실. 양파 썩는 냄새와 담배 냄새가 찌든 소파.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눈치를 보는 중이다.
"야, 남정식. 참 가지가지 한다. 창고도 꽁짜로 쓰게 해줘, 이젠 차까지 내놓으라고?"
태훈 형이 장부 정리를 하다 말고 혀를 찼다. 이 형은 전직 조명감독이자 현 <현대 유통>의 대표, 우리 사무실의 건물주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농산물 시장 아재지만, 속정은 깊어서 우리 같은 망한 영화쟁이들을 내치지 못하고 거둬준 은인이다.
"아이, 형님. 제가 놀러 갑니까? 비즈니스! 비즈니스 하러 간다니까요. 제가 1톤 트럭 끌고 강남 갈 수는 없잖아요. 가오가 있지."
"지럴. 가오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태훈 형이 투덜대면서도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차 키 하나를 툭 던졌다. 10년 된 검은색 쏘렌토 키였다.
"긁으면 죽는다. 보험도 가족만 되는 거야."
"크으! 역시 우리 형님 최고! 제가 성공하면 새 차로 뽑아 드릴게요!"
"지랄 말고 기름이나 채워와. 그리고 너..."
태훈 형이 지갑을 열더니, 꼬깃꼬깃한 5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내 셔츠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옷 꼬라지가 그게 뭐냐. 드라이 좀 맡겨라. 퀴퀴한 아재 냄새 풍기면서 일이 되겠냐... 가서 밥살 일 있으면 네가 내. 궁상떨지 말고."
"......"
코끝이 찡했지만, 나는 애써 호탕하게 웃었다.
"역시 우리 태훈이 형! 사나이지. 암."
나는 가슴 뿌듯하게 사무실을 나왔다. 그래, 보여주자. 남정식이 아직 안 죽었다는 걸. 이런 고마운 형한테 신세 갚으려면, 무조건 성공해야 돼.
오후 1시. 강남 언주로.
나는 쏘렌토를 건물 뒤편 공영주차장에 대놓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레이 정장. 15년 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갈 때 샀던 놈이다. 지금은 배가 껴서 단추가 터질 것 같지만, 뭐 어떠랴. 기분이가 좋은데.
눈앞에 우뚝 솟은 <자이언트 액터스> 사옥이 보였다. 건물이 깔쌈하다. 옛날엔 실장 시절에 그렇게 자기네 신인 배우 써달라고 3일 밤낮을 쫓아다녔던 박준영이가 세운 회사다. 그 시절에 열심히 살긴 했지, 이 친구가. 지금은 대기업에서 2천억 투자받은 기획사의 대표님이 되셨단다. 나는 당당하게 회전문을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들어서자마자, 나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에 부딪혔다.
"안녕하세요? 방문 예약 코드를 스캔해 주십시오"
안내 데스크의 AI 로봇이 푸른 레이저 눈으로 나를 스캔했다. 사람도 아니고 기계 따위가 나를 막아선다.
"예약은 무슨. 나 여기 박준영 대표랑 호형호제하는 사이야. 남정식이라고 전해 봐. ‘아이고 형님 어쩐 일로!’ 하면서 뛰어나올 거다."
[예약되지 않은 방문객은 출입이 제한됩니다. 신규 스케줄 예약은 6개월 뒤까지 마감되었습니다.]
"이 깡통이 진짜... 야! 비서실 연결해! 나 남 대표라고!"
로봇과 실랑이를 벌이는데, 로비에 있던 보안요원들이 다가왔다. 키 185는 되어 보이는 젊은 친구들. 그들의 눈빛은 나를 '업계 선배'가 아니라 '진상 잡상인'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선생님, 업무 방해됩니다. 나가주시죠." "아니, 내가 잡상인이야? 나 무비박스 대표라고!"
결국 나는 로비 소파 구석으로 밀려났다. 쪽팔림이 발가락 끝부터 올라왔다. 지나가는 직원들이 힐끔거리며 수군댔다. 저 아저씨 뭐냐고. 그때였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말끔한 수트를 입은 중년 남자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걸어 나왔다. 박준영이었다.
"준영아! 야, 박대표!"
내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박준영이 멈칫하며 나를 돌아봤다. 명품 뿔테 안경 너머의 눈이 잠시 찌푸려지더니, 이내 '영업용 미소'가 입에 걸렸다.
"어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남 대표님 아니세요?"
그가 다가왔다. 나는 보안요원들을 보란 듯이 어깨를 폈다.
"야~ 우리 진짜 오랫만이지? 박 대표 보러 왔는데 로봇이 막고 난리도 아니야."
"아하하... 회사 시스템이 좀 그렇습니다. 근데 여긴 웬일이세요? 연락도 없이."
"아, 별거 아니고. 내가 이번에 죽여주는 영화 하나 들어가거든. 우리 김태수 작가 알지? 김 작가랑 박찬혁 감독이랑 뭉쳤잖아."
어제 급하게 판 '무비박스 대표이사' 즉석 명함을 내밀었다.
"니네 회사에 좋은 배우들 많잖아. 주연급 하나만 좀 부탁하자. 우리 예전에 그거 생각나냐..."
박준영이 내 명함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명함이 아니라, 내 낡은 구두와 소매 끝이 해진 셔츠, 그리고 은은하게 풍기는 양파 냄새를 훑고 있었다. 그 0.5초의 시선. 경멸과 동정. 나는 그 눈빛을 읽어버렸다.
"형님." 박준영이 낮고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투배(투자 배급)는 어디서 해요?
”지금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야. NJ 투자팀에서 난리 났어. 시나리오 좋다고“
”NJ가 요즘 영화한대요? 영화 사업 접는다던데. 저희 당분간은 ‘스크리너스’하고만 해요. 그리고 저희 스케줄 관리, AI가 데이터 돌려서 잡아요. 수익률 안 나오는 프로젝트는 제가 컨펌하고 싶어도 주주들이 가만 안 있어요."
"야, 뭐? AI 데이터? 너 형 알잖아. 흥행 냄새 기가 막히게 맡는 거.“
"형."
그가 웃음기를 싹 거뒀다.
"그게 언제 적 얘깁니까. 지금 2030년이에요. 옛날얘기 하시려면 다방에 가셔야죠."
"......!"
"형, 죄송한데 다음 약속이 있어서. 그리고... 앞으론 비서실 통해주세요. 불쑥 찾아오지 마시고."
그는 내 손에 쥐여져 있던 '비타500' 박스는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섰다. 수행원들이 나를 밀치고 지나갔다. 명함은 로비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자동문이 닫히고, 나는 삐까번쩍한 사옥 로비에 덩그러니 버려졌다.
오후 2시. 탑골공원 뒤편 순대국밥집.
나는 태훈 형이 준 돈으로 8천 원짜리 국밥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놓고 앉았다. 오늘만 다섯 군데를 돌았다. 결과는 전멸. "남 대표님, 아직도 영화 하세요?"라는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지잉-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마누라'였다. 나는 황급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최대한 밝게, 최대한 바쁜 척.
"어, 여보! 나 지금 미팅 중이야. 왜?"
여보, 이번 달 생활비 언제 넣을 거야? 학원비 밀렸다고 문자 왔어.
"아... 그게, 지금 투자사하고 얘기 잘 되고 있거든? 이번 주 내로 해결될 거야. 조금만 기다려."
”잠깐... 당신 혹시... 또 영화한다고 그러고 다니고 있는 거 아냐? 태훈이 형네 양파 유통하는 거 도와주고 있다며?“
"아니야! 이번에 죽이는 거 시작해! 100억짜리 프로젝트야! 이거만 터지면 당신 샤넬백 사줄게. 우리 아들 캐나다 유학도 보내자!"
”휴... 저녁에 일찍 들어오기나 해.“
뚝. 전화가 끊겼다. 나는 꺼진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샤넬백은 커녕, 당장 국밥 값 낼 돈도 아까울 지경이다. 내 지갑엔 찢어진 자존심과 거짓말만 가득했다.
"씨발... 진짜. 남정식이 가오 존나 빠지네."
소주를 입에 털어 넣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창고에서 밤새고 있을 박 감독, 김 작가, 그리고 인아 씨. 그들에게 "내가 다 해결할게!"라고 큰소리치고 나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쪽팔려서 어떻게 가나.
나는 국밥집 벽에 걸린 TV를 멍하니 쳐다봤다. 연예가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스크리너스 글로벌 4주 연속 1위가 한국 드라마라는 둥, AI 배우들의 완벽한 미소. 저들 틈에 우리 자리는 없다. '고스트'를 연기해 줄 미친놈은 어디에도 없다.
그때였다. MC가 다음 화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촬영장 감독 폭행 논란' 배우 도지웅, 3년 만에 근황 포착... 코인 사기 연루 의혹?
"......도지웅?"
술이 확 깼다. 도지웅. 5년 전, 영화계가 가장 사랑했던 괴물. 연기 하나는 신이 내렸는데, 성질머리는 악마가 내렸다는 그놈. 감독 멱살 잡고, 제작사 대표한테 재떨이 던져서 업계에서 영구 퇴출당한 미친개.
도촬한 듯한 코인 투자 설명회 사진 속 도지웅의 모습. 매끈한 양복차림에 금융맨같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터프가이 도지웅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처절한 메쏘드 연기의 달인이 코인 사기에나 연루되어 뉴스에 등장하는 신세라니...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박준영이 데리고 있는 매끈한 스타들은 흉내도 못 낼 진짜배기. 우리에겐 A급 스타가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처럼 바닥을 기어다니는, 잃을 게 없어서 더 무서운 '진짜 괴물'이 필요한 거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줌마! 여기 계산이요!"
나는 남은 소주를 들이키고 식당을 뛰쳐나왔다. 강남의 빌딩 숲이 더 이상 부럽지 않았다. 이제 내가 가야 할 곳은 화려한 기획사가 아니라, 지하경제의 숨은 뒷골목이다.
기다려라, 박 감독. 김 작가. 남정식이 진짜배기 '핵폭탄' 하나 업고 간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