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가오도 리콜이 되나요? (2)

by 배윤성

- 남정식 대표의 이야기

다음 날, 오후 4시. 강남 삼성동 뒷골목의 송강 빌딩 2층의 <에메랄드홀>. 한때 예식장으로 많이들 이용하던 곳인데, 이젠 유행에 뒤 쳐진 퇴물이 되었고, 토지 투자 설명회나 다단계 업체 교육장으로 쓰인다고 한다. 엠뉴스 연예부 최기자한테 얻은 정보로는 이 건물이 맞다.
내가 상상하던 금융 상품 설명회의 느낌은 분명 아니었다. 그보다 더 음습하고, 비릿한 욕망이 들끓는 곳. 입구에는 <미래 블록체인 투자 설명회>라는 조잡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나는 쏘렌토를 지하 주차장에 박아두고,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채 설명회장 안으로 잠입했다. 아직 대낮인데도 창을 가려 컴컴한 조명, 백 개가 넘는 좌석에는 등산복 차림의 노인들, 화려한 무늬의 블라우스에 명품 핸드백을 들고 있는 사모님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단상 위.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마이크를 잡은 남자가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 저 아시죠? 배우 도지웅입니다!"
도지웅이었다. 말끔한 양복을 입었지만, 어딘가 싸구려 티가 나는 옷. 그는 특유의 살인미소... 아니,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노인들을 홀리고 있었다.
"여러분 연예인 하면 돈 많이 벌 것 같죠? 감독 비위 맞춰야지, 매니저들 출연료 떼줘야지. 품위 유지비 써야지. 세금으로 다 뜯기지, 개같이 고생하면서 번 돈 위약금 물어주면서 다 날아갔습니다. 연예인? 그거 허울만 좋은 거죠. 좌절하고 비관만 하던 그때, 저에게 한 줄기 빛이 비쳤어요. 바로 이 '엔박스 코인'을 만난 거예요! 내가 여태 뭐 하러 배우하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세계가 열린 거죠!”
좌중들은 박수와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저 공중파 드라마 주연했던 놈입니다. 제 얼굴이 보증수표 아닙니까?"
그는 능숙하게 거짓말을 뱉어냈다. "원금 보장", "300% 수익", "저만 믿으세요". 그의 발성은 완벽했고, 눈빛 연기는 진실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마이크를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미친놈... 재능을 저딴 데 쓰고 있어?'
그때, 무대 뒤편 어둠 속에 서 있는 깍두기들이 보였다. 팔뚝에 문신이 가득한 놈들이 팔짱을 낀 채, 도지웅을 감시하고 있었다.
오후 5시. 건물 뒷골목. 설명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나는 쓰레기 분리수거장 뒤에 숨어 뒷문을 주시했다. 잠시 후, 덩치 두 명이 도지웅을 데리고 나왔다.
"야, 도지웅. 요새 실적이 왜 이래? 10억 구좌도 못 모았어."
"아니... 할매들이 돈이 없대잖아요. 나보고 어쩌라고."
덩치 하나가 도지웅의 뺨을 툭툭 치더니, 배에 한 방을 먹였다. 도지웅이 억 소리를 내며 쓰레기봉투 위로 쓰러졌다.
"이 새끼가 존나 빠져가지고. 야, 니가 깔고 있는 빚만 20억이야, 20억. 네 장기 다 꺼내 팔아도 못 갚아. 얼굴 반반할 때 밥값이라도 하라고."
덩치들은 침을 퉤 뱉고는, 담배를 피우러 저만치 떨어졌다. 도지웅은 배를 움켜쥔 채 끙끙거리다,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손이 덜덜 떨려서 라이터 불을 못 붙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지포 라이터를 켜서 그의 담배 끝에 대주었다.
"누구...?"
도지웅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표정은 절어 있었고, 눈은 죽어 있었다.
"나 기억 못 해요? 무비박스 남정식 대표. <서울의 밤> 같이 했잖아."
도지웅이 피식 웃었다. 연기에서 묻어나는 가짜 웃음이 아니라, 진짜 조소였다.
"아~ 남 대표님. 볼 일 없으면 그냥 지나가세요. 지금 기분 좆같으니까"
"일 하나 같이 하자."
나는 명함을 내밀었다.
"영화 하자고. 너 이런 시궁창에서 썩을 놈 아니잖아."
도지웅이 내 명함을 빤히 보더니 손끝으로 튕겼고, 명함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영화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저씨. 저 안 보여요? 나 지금 연기 중이잖아. '성공한 투자자' 연기. 관객들은 저 할망구들이고, 출연료는 내 빚 탕감이고."
"그게 연기냐? 사기치는 거지! 너 쪽팔리지도 않아?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야지, 왜 죄 없는 노인네들 등쳐먹는 데 이용당하고 있냐고!"
내 고함에 도지웅의 눈빛이 변했다. 탁했던 눈동자에 순식간에 살기가 돌았다. 그가 내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쳤다.
"이용당해? 누가? 내가?"
그가 으르렁거렸다.
"난 내가 선택한 거야. 영화판? 거기가 더 시궁창이야. 감독 새끼들은 예술이랍시고 갑질하고, 제작자 놈들은 그저 돈독이 올랐지. 차라리 여기가 나아. 여긴 적어도 돈 가지고 구라는 안 치거든!"
거짓말이다. 내가 사기치는 놈들 눈은 볼 줄 안다. 그의 눈은 처절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어이! 거기 뭐냐!"
저만치 있던 덩치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뭔데, 이 아저씨는? 너 아는 사람이야?"
"쪽을 내놓고 다니니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좀 많아야죠. 옛날 일로 조롱이나 하려고 들고"
도지웅이 내 멱살을 탁 놓으며 덩치들을 막아섰다.
"삼촌들, 신경 쓰지 마요. 내일 사무실에서 봅시다"
"확실해? 아저씨. 그냥 가던 길 가쇼."
덩치 하나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여기서 싸우면 뼈도 못 추린다. 객기 부릴 때가 아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예전부터 지웅씨 팬이라. 죄송합니다!"
나는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고 쏘렌토 쪽으로 뛰었다. 차 문을 닫고 시동을 거는데, 백미러로 도지웅의 모습이 보였다. 덩치들에게 타박을 당하면서도, 그는 멍하니 내 차가 사라지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장 난 것은 고치면 됩니다.] 어제 시나리오 회의 때 박 감독이 썼던 대사가 떠올랐다.
저놈은 고장 났다. 아주 처참하게 부서져서, 조폭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눈빛은... 살기가 도네."
사기판 한복판에서도 죽지 않은 그 독기.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그 생명력. 우리가 찾던 '진짜 배우'가 바로 저기 있었다.

도지웅을 보고 돌아오는 길. 핸들을 잡은 손이 떨렸다. 도박장 뒷골목의 그 비릿한 공기가 내 옷에 밴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양파 창고가 아니었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야 했다. ‘결혼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동네 식당에서 외식이라도 해야겠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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