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정식 대표의 이야기
성북구 하월곡동. 가파른 언덕배기에 위태롭게 서 있는, 지은 지 30년 된 복도식 아파트. 페인트칠은 벗겨져 시멘트 살결이 드러났고, 지하 주차장은 물이 새서 곰팡내 진동하는 곳. 재건축 이슈만 믿고 영혼까지 끌어모아 샀지만, 불경기 탓에 재건축은커녕 안전 진단 통과 소식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내 인생의 성적표 같은 집.
나는 쏘렌토 조수석에 놓인 신문지 뭉치를 집어 들었다. 안개꽃이 섞인 장미 꽃다발이었다. 태훈 형이 밥 사 먹으라고 준 돈을 탈탈 털어 샀다. 오늘이 우리 부부의 결혼 20주년이기 때문이다.
"후우..." 엘리베이터 거울 속, 낡은 양복을 입고 꽃다발을 든 중년 사내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래도 이건 잊지 않았다는 것. 비록 샤넬백은 못 사줘도, 남편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와 사랑은 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여보 나 왔어."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서자, 집 안은 절간처럼 고요했다. 수명이 다 된 현관 센서등은 깜빡거리다 불이 나갔다. 거실 식탁 위, 스탠드 불빛 아래 아내 혜경이 종이에다 뭔가를 계속 적고 있었다.
"왔어?"
아내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는 낭만적인 저녁 식사 대신, 전자계산기와 고지서 뭉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여보. 오늘 나가서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자"
나는 등 뒤에 숨겼던 꽃다발을 쑥 내밀었다.
"짜잔~ 결혼 20주년 축하해~“
꽃다발이 식탁 위에 놓였다. 계산기와 고지서 사이에서 붉은 장미꽃은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혜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밑이 퀭했다.
"꽃...?"
고민에 가득 찬 그녀의 시선이 꽃다발에 잠시 머물렀다.
"뭐 하러 이런 걸 사와"
"어? 아니 뭐... 오다가 싸게 샀어. 20주년인데 기분은 내야지."
"20년? 후... 용케도 잘 살았네."
혜경이 볼펜을 식탁에 탁 내려놓았다.
"이번 달 대출 원리금 180만 원. 관리비 35만 원. 그리고..."
그녀가 한숨을 쉬며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당신 부모님 용돈. 어머님 무릎 수술하신 거 약값이랑 이번 달 생활비 50만 원. 이거 안 보내면 당장 전화 와서 난리 날 텐데, 마이너스 통장도 이제 간당간당해."
"......"
"거기다 내 보험 영업? 이번 달도 빵원이야. AI 설계사로 계약 건이 다 넘어갔어. 수수료 0원으로 치고 들어오는데, 내가 무슨 수로 이겨? 나 이제 지점에서도 눈치 보여서 출근도 못 해."
아내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30년 된 아파트의 낡은 새시 틈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꽃다발의 포장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20주년 기념일의 밤은 너무나 춥고 시렸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고2 아들 우진이가 나왔다.
"아빠... 오셨어요. “
”어~ 우리 아들! 같은 집에 사는 데 얼굴 보기가 영 힘드네~ 공부는 안 힘들어? “
우진이는 식탁 위의 살벌한 분위기와 뜬금없는 꽃다발을 번갈아 보더니 눈치를 살폈다.
"아빠, 저... 이번 주 학원비 마감인데."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올 것이 왔다.
"아... 그랬지. 수학 심화반... 80만 원이었나?"
"네. 근데 아빠."
우진이가 머뭇거렸다.
"저 그냥 학원 그만둘까 봐요. 친구 민수는 AI 튜터 앱으로 공부한대요. 그거 월 5만 원이면 전 과목 다 봐준다고..."
"야, 남우진."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AI? 그런 거 관심 끄고, 공부나 열심히 해! 아빠가 너 학원 하나 못 보내겠냐? 너 인서울 하려면 관리해야 돼."
"그래도... 엄마 아빠 힘드신데..."
"누가 힘들대? 아빠가 내일 바로 입금할 거야. 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옷이나 갈아입고 나와. 삼겹살 먹으러 가게."
우진이는 풀이 죽어 방으로 들어갔다. 닫힌 방문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보."
아내가 식탁을 짚고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우리... 이 아파트 팔자."
"뭐?"
"재건축이고 나발이고, 더는 못 버텨. 대출금 갚고, 시부모님 챙겨 드리고, 우진이 학원이라도 제대로 보내려면... 이거 팔고 의정부나 외곽으로 전세 구하자. 거기도 살기 괜찮대"
"뭔 소리야! 절대 안 돼!"
물을 마시던 컵을 엎을 뻔 했다.
"이 집이 어떤 집인데! 내가 10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겨우 마련한 내 집이야! 여기서 밀려나면 우리 다시는 서울 못 들어와! 우진이도 친구들 다 여기 있는데 전학을 어떻게 가!"
"그럼 어떡하라고!"
아내가 악을 썼다.
"당신 갖다 주는 돈 받아도 매달 100만원은 빵꾸가 나. 나도 이제 한계야. 20주년? 꽃다발? 이딴 게 무슨 소용이야! 당장 나가 앉을 판인데!"
아내가 얼굴을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나 무서워... 여보. 우리 이렇게 버티다가, 나중에 늙어서 폐지 줍고 다닐까봐. 우진이한테 이 지긋지긋한 가난 물려줄까 봐... 그게 너무 무섭다고."
아내의 통곡이 30년 묵은 아파트 벽에 스며들었다. 바닥에 뒹구는 붉은 장미꽃이 마치 내 찢어진 심장 같았다. 나는 베란다로 나갔다. 녹슨 난간 너머로 화려한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저 멀리 청량리 재개발로 올린 주상복합 빌딩들은 별처럼 빛나는데, 내 집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가장이라는 이름의 무게. 20년 전 결혼식장에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겠다"고 맹세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집을 판다...?' 그건 내 인생의 완전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밀려나면, 진짜 끝이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이제 이건 낭만적인 영화 제작기가 아니다. 우리 가족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생존기다. 납치? 사기? 그게 대수냐. 가난이 가장 큰 죄악인 세상인데. 우리 가족을 지킬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악당이 되겠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루루- 뚜루루-
"어, 박 감독. 나야."
잠긴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왔다. 내 시선은 바닥에 떨어진 꽃다발에 고정되어 있었다.
"준비해라. 내일, 사람 하나 업어오자.“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