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정식 대표의 이야기
다음 날 오전 10시. 나는 밤새 한숨도 못 잔 푸석한 얼굴로 양파 창고 문을 열었다. 밤샘 작업에 지쳐 쪽잠을 자던 박 감독과 김 작가가 부스스 일어났다. 인아 씨는 오늘 회사 오전 회의가 있어 출근하고 없었다.
"형, 얼굴이 왜 그래?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박 감독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내 안색을 살폈다. 퀭한 눈, 거칠어진 피부. 영락없이 벼랑 끝에 몰린 중년의 얼굴이었다. 나는 정수기 물을 한 잔 들이켜고,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 도지웅이 알지?"
"도지웅? 그 미친 개?"
"어. 걔... 우리 영화에 출연 시키는 거 어떨 거 같냐? '고스트' 역으로,"
순간, 창고 안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김 작가가 쓰던 안경을 벗어 던지며 펄쩍 뛰었다.
"야! 남정식! 너 돌았냐? 그 인간 쓰레기를 쓰자고? 감독 패고 업계 매장 당한 놈을?”
“형, 그건 아니다. 지금 사기꾼 다 됐다며. 우리 영화 나락 보내려고 작정했어?!"
박 감독도 거들었다.
"관객들이 걔 얼굴 보자마자 욕부터 박을걸? 몰입이 되겠어?"
예상했던 반응이다. 하지만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아니. 통한다. 내가 장담해."
"뭘 믿고?"
"너네, 황제우 기억하지? 15년 전, 음주운전에 폭행 시비 걸려서 매장당했던 놈. 다들 끝났다고 했을 때, 내가 걔 손잡고 방송국 국장, 투자사 본부장들한테 무릎 꿇고 다니면서 출연 성사 시켰어. 결국 그 친구 연기 하나로 논란 다 덮였잖아."
"그건 황 배우가 반성을 했으니까 그런 거고! 도지웅은 지금도 사기 치고 다닌다며!"
"아니야. 내가 어제 그놈을 진짜 만나봤잖아. 그 녀석 눈을 봤어."
나는 어제 투자 설명회장 뒷골목에서 본 도지웅의 눈빛을 이야기했다.
"그 눈빛이 제발 자길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더라. 껍데기는 사기꾼인데, 알맹이는 연기 못 해서 미쳐버린 광대야. 그 독기, 그 분노... 그거 연기로 터뜨리면 우리 영화 무조건 된다. 관객들은 배우의 진심을 읽으면 용서하게 돼 있어. 우리가 지레 겁먹는 거야."
내 확신에 찬 목소리에 박 감독과 김 작가가 서로를 쳐다봤다. 똥고집쟁이 남정식이 저렇게까지 말할 땐, 뭔가 있다는 걸 그들도 안다.
"하아... 그래. 형 촉은 인정한다 치자."
박 감독이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무슨 수로 데려와?
”그 녀석이 빚이 20억인데, 조폭한테 물려 있나봐.“
”아휴... 그럼 말 다했네. 아서라. 그냥 포기해“
"정공법으로 간다."
나는 옷걸이에 걸린 내 낡은 양복 재킷을 털어 입었다.
"가서 쇼부(협상) 보려고. 도지웅이 나한테 3개월만 임대해 달라고. 내가 얘 1000만 배우 만들어서 20억 갚게 해 준다고. 조폭 놈들도 결국 돈 벌려고 얘 데리고 있는 거 아냐? 미래 가치를 파는 거지."
"형, 미쳤어? 걔네가 '아이고 예 알겠습니다' 하겠냐? 칼 맞어! 조폭 아무나 상대하냐"
”내가 ‘서울의 밤’ 제작할 때, 나이트클럽 통째로 부수고 난리쳤던 장면 기억하냐? 그 때, 청주 전국구 오야붕 직접 찾아가서 무뤂 꿇었잖아. 양주만 6병 마시고 기절했다고. 서로 형님 아우 맺으면서...“
”야. 그 때는 주먹들도 낭만이 있었지. 요새는 죄다 스캠이니 보이스피싱이니 그런데로 다 빠져서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는데“
김 작가가 내 팔을 잡았다.
"가지 마. 이건 아니야.“
"놔라. 나한텐... 이 방법밖에 없어."
나는 김 작가의 손을 뿌리쳤다. 어제 아내의 훌쩍이던 속울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고를 나갔다. 등 뒤에서 "야! 남정식!"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트럭 시동을 걸었다. 백미러로 보니, 박 감독과 김 작가가 황망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게 보였다. '짜식들... 의리는 있어가지고.' 하지만 이번엔 나 혼자 해결해야 한다. 가장의 무게는 나누는 게 아니니까.
오후 2시. 강남 삼성동 <미래 블록체인> 사무실. 위장을 하고 있어서 생각보다 찾기가 쉽지가 않았다. 입구를 지키는 덩치들에게 "도지웅 배우 캐스팅 건으로 대표님 뵙기로 했다"고 뻥을 치고 들어갔다. 안내받은 대표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마동식 대표'라 불리는 사내가 소파에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도지웅이 주눅 든 채 앉아 있었다.
”누구신지...?“
"저 영화사 무비박스 남정식 대표라고 합니다."
나는 명함과 함께 정관장 홍삼 진액 한 박스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대표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지웅 배우, 저한테 3개월만 빌려주십쇼."
"뭐?"
마 대표가 헛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이 양반이 낮술 했나. 빌려달라니? 얘가 무슨 렌터카야?"
"이대로 둬봤자 코인 팔이 앵벌이밖에 더 됩니까? 제가 얘 데려다가 영화 찍어서 대박 터뜨리겠습니다. 그럼 20억? 껌값이죠. 저, 배우 황제우도 키워낸 사람입니다. 제 안목 믿고 투자 한 번 해 보십시오."
나는 최대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말했다. 하지만 마 대표의 표정은 싸늘했다.
"투자? 얼마짜리 영환데? 개런티는?"
"지금은 없습니다만..."
"없으면 꺼져. 어디서 거지 같은 게 와서 약을 팔아?"
마 대표가 눈짓을 보내자 똘마니들이 들어왔다. 강제로 끌어낼 태세였다.
"대표님, 영화쟁이들 저렇게 무모한 놈들 많아요. 그냥 보내요."
도지웅이 끼어들며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내 집도, 내 가족도 끝이다.
"저기요! 대표님! 제 얘기 좀 들어보시라니까요! 도지웅이 여기서 썩기엔 아깝지 않습니까!"
내가 똘마니들을 뿌리치며 마 대표 앞으로 다가갔다.
"아깝긴 개뿔. 야, 끄집어 내."
마 대표의 손짓 한 번에 덩치 둘이 나를 덮쳤다. 나도 소싯적에 유도를 배웠던 터라 덩치들을 잡아 끌며 오기로 버텼다.
“대표님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퍼억-!’
"으억!"
배를 걷어차이고 바닥에 뒹굴었다. 구둣발이 내 등을 짓밟았다.
"영화? 예술? 어디서 보증금도 없이 내 물건을 빌려간다 어쩐다 지랄이야!"
퍽! 퍽!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도지웅이 보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비굴하게 "살려주세요"라고 비는 순간, 나는 그저 그런 사기꾼 꼰대가 되는 거다.
"남대표님... 왜 그래요 진짜! 그냥 가라니까! 나 출연할 생각 없어요."
도지웅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나는 밟히면서도 도지웅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피 섞인 침이 바닥에 떨어졌다.
"야... 도지웅!!"
“......"
"나... 너 데려가려고 나이 오십에 이렇게 쳐맞는다. 쪽팔려서라도 너 꼭 성공시켜야겠다."
"......!"
"네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바닥인 건 매한가지야. 근데 넌 억울하지도 않냐? 나는 억울해서 미치겠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 가서... 세상한테 한 방 먹여주자고."
도지웅의 동공이 흔들렸다. 자신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는 놈들 틈에서, 자기를 위해 피를 흘리며 손을 내미는 늙은 제작자.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찰나였다.
‘우당탕탕’ 사무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시끄럽게!"
그 때 문이 활짝 열리며, 파란색 경찰청 플라스틱 박스를 들고 있는 몇 사람과 검은 정장차림의 남자 수사관 한 명이 등장했다.
"국수본 첨단범죄수사부입니다. 미래블록체인 마동식 대표 되시죠?"
경찰은 압수수색 영장을 내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귀사 앞으로 불법 다단계 및 유사수신 행위 제보가 접수되어 압수수색 영장 집행 하겠습니다."
"뭐... 뭐요? 첨단범죄?"
"지금 팩스로 영장 사본 보냈으니 확인하세요. 증거 인멸 시 구속 수사 원칙입니다."
때마침 팩스기에서 [압수수색 영장]이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찍힌 종이가 툭 떨어졌다. 마 대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야! 뭐야 이거! 경찰 떴대! 장부 치워! 서버 내려!"
사무실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덩치들이 나를 밟다 말고 허둥지둥 뛰어다녔다.
쾅-! 그 혼란의 틈에서 박 감독과, 바바리코트 깃을 세운 김 작가가 들어왔다.
"남 대표! 튀어!"
박 감독이 소리쳤다. 그들은 내 뒤를 밟고 있었던 것이다.
"이... 미친 인간들아..."
눈물이 핑 돌았다. 박 감독이 달려와 나를 일으켰다. 김 작가는 짐짓 형사 흉내를 내며
"거기 동작 그만!" 하고 소리를 질러 덩치들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빨리 가자! 놈들 정신 차리기 전에!"
"잠깐."
나는 비틀거리며 도지웅에게 손을 뻗었다.
"야, 도지웅."
"......"
"기회는 지금뿐이야. 여기서 평생 앵벌이 할래, 아니면 나랑 가서 영화 찍을래?"
도지웅이 마 대표와 나를 번갈아 봤다. 도망치는 조폭들, 그리고 피투성이가 돼서 웃고 있는 나. 그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내 피 묻은 손을 낚아챘다.
"후불입니다."
"뭐?"
"이거 안 되면 남대표님이나 나나 인천 바다에 드럼통 띄우는 거에요!"
"오케이! 계약 성립!"
나는 그를 잡아당겼다.
"뛰어!!" 우리는 넷이 되어 달렸다. 비상계단을 구르듯 내려와 뒷문으로 향했다. 철문을 박차고 나가자, 시동 걸린 1톤 양파 트럭이 덜덜거리고 있었다. "타! 짐칸에 타!" 나와 도지웅, 김 작가가 짐칸에 몸을 던졌다. 박 감독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꽉 잡아요! 달린다!"
부아앙-! 트럭이 굉음을 내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강남대로를 달리는 트럭 짐칸, 널브러진 우리 넷 위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근데 김작가. 저 사람들 진짜 경찰이야?“
”이겠어? 보조출연 ‘풍경’ 알지? 거기 팀장들이야. 박 감독이 긴급하게 섭외했지. 남 대표좀 도와달라고. 남 대표 보기보다 보출 업체한테 딴 점수가 있던데?“
눈물이 핑 돌았다. 10년 전, 제주도에서 한 달을 동고동락한 보조출연 업체 ‘풍경’ 최 대표가 이렇게 의리를 지켜주네. 술 한잔 찐하게 사야겠다.
드디어, 미친개 한 마리를 우리 편으로 만들었다. 이제 진짜 전쟁 시작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