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영화는 빛(light)의 예술이다.

by 배윤성

감독은 공간을 지배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지배해야 할 공간은, 곰팡내가 진동하는 30평짜리 조립식 건물의 창고다.
"야, 박 감독! 여기 칠하면 돼? 꼼꼼하게?"
남 대표가 롤러를 들고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며 옷은 온통 초록색 페인트 범벅이었다. 슈렉이 따로 없었다.
"형, 얼룩지면 안 돼. 크로마키(Chroma key)는 균일한 톤이 생명이야. 덧칠해."
AI가 만든 배경과 실제 배우를 합성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우리는 동대문 시장에서 떼어 온 싸구려 초록색 천으로 벽을 도배하고, 바닥에는 페인트를 발랐다. 이른바 <현대 유통 제1 스튜디오>. 말이 좋아 스튜디오지, 그냥 초록색 감옥 같았다. 하지만 이게 우리의 유일한 무대였다. 여기서 1982년의 명동도 만들고, 안기부 취조실도 만들어야 했다.
"자, 세팅 끝. 테스트 갑니다."
인아가 '당근 1호' PC 앞에 앉았다. 도지웅이 얼굴에 모션 캡처용 점을 찍고, 초록색 벽 앞에 섰다.
"선배님, 정면 보시고. 표정 한 번 지어주세요."
모니터 화면에 도지웅의 모습이 떴다. 동시에 인아가 AI 페이스 캡처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위이잉- 쿨러가 비명을 질렀다. 화면 속 도지웅의 찌든 40대 얼굴 위로, 풋풋한 20대 청년 '선호'의 얼굴이 덧입혀졌다. 그런데...
"......"
다들 말이 없었다.
"이게 뭐야...?"
김 작가가 안경을 고쳐 쓰며 중얼거렸다.
기괴했다. 얼굴은 뽀얀 20대인데, 목 아래는 칙칙한 아저씨였다. 무엇보다 얼굴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배경과 인물이 섞이지 못하고 기름과 물처럼 따로 놀았다. 소위 말하는 '누끼 딴 티'가 너무 났다. 감독의 눈으로 보면 이유는 명확했다. '뎁스(Depth, 깊이감)가 없다.'
"아무래도 조명이 문제인 것 같은데요."
인아가 내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을 가리켰다.
"형광등 빛은 너무 평면적이에요. 그림자가 없으니까 AI가 얼굴 윤곽을 제대로 인식을 못 해요. 입체감이 없으니까 합성을 해도 잡지에서 사람 얼굴 오려내서 붙인 것처럼 보이는 거죠."
"그럼 어떡해? 그건 AI가 보정을 못 해줘?"
"원본 소스 자체가 어느 정도는 받쳐줘야 할 것 같은데. 영화용 라이트만 몇 개 있었어도..."
남 대표와 나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영화용 조명. 텅스텐, HMI, LED... 렌탈비만 하루에 수십이다. 우리 예산은 이미 바닥이었다.
"후레쉬라도 비춰볼까?"
남 대표가 핸드폰을 꺼내는 궁상맞은 모습을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시나리오도 있고, 배우도 있는데... 빛이 없어서 영화를 못 찍다니. 감독으로서 이보다 비참할 수 있을까.
드르륵- 쾅! 그때,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야, 이 화상들아! 니들 안에서 본드 부냐? 페인트 냄새가 사무실까지 넘어오잖아!"
작업복 차림의 김태훈 형님이었다. 우리 창고의 건물주. 그가 코를 막고 들어오다 멈칫했다. 초록색으로 떡칠된 창고, 점찍고 서 있는 도지웅, 그리고 모니터 속의 기괴한 합성 화면.
"......니들 여기서 뭔 난리를 피고 있냐?"
"아, 형님. 그게 아니라... 테스트 중인데..."
"이게 뭐야. 사람 대가리가 왜 붕 떠 있어? 달걀귀신이야?"
태훈 형이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돋보기안경을 꺼내 쓰더니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매의 눈이었다.
"이 조명 꼬라지 봐라."
그가 혀를 찼다.
"형광등 색온도가 6500K인데, 니들이 원하는 80년대 텅스텐 느낌(3200K)이 나오겠냐? 거기다 엠비언트(환경광)만 있고 키 라이트(주광)가 없으니까 콘트라스트가 다 죽었잖아. 이러니 얼굴이 떡판이 되지."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순간 잊고 있었다. 이 농산물 유통하는 아저씨가, 20년 전 충무로 현장을 호령하던 전설의 조명 감독 '빛태훈'이었다는 사실을. 내 데뷔작 때, 그 까다롭기로 소문난 여배우의 주름살을 빛으로 지워버렸던 마술사.
"비켜봐."
태훈 형이 인아를 밀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야, 정식아. 저기 구석에 쌓인 박스들 좀 치워봐."
"저거요? 형님이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신..."
"시끄럽고 까 봐!"
우리가 끙끙대며 먼지 쌓인 나무 상자들을 열었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상자 안에는 낡았지만 여전히 기름칠이 잘 된 '아리(ARRI)' 텅스텐 조명기들, C-스탠드, 반사판, 그리고 색색의 조명 필터(젤라틴)들이 가지런히 잠들어 있었다. 마치 봉인된 보물 상자를 연 기분이었다.
"버리려고 했는데... 고물상 놈들이 고철값도 안 쳐준대서 처박아 둔 거야."
태훈 형은 툴툴대면서도, 조명기를 만지는 손길은 아이를 다루듯 섬세했다.
"전기 끌어와. 멀티탭 말고, 배전반에서 직통으로 따!"
태훈 형의 지시가 떨어지자 현장이 바빠졌다. 전원이 연결되고, 그가 스위치를 올렸다. 치지직- 필라멘트가 달궈지는 소리와 함께, 따뜻하고 묵직한 호박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차가운 형광등 빛과는 차원이 다른, '온도'가 있는 빛이었다.
"박 감독, 너 '선호'가 어떤 놈이라고?"
"어? 아... 천재 공대생인데, 로켓 설계자를 꿈꾸는... 순진하고 몽상가적인 느낌이요."
"그럼 백라이트(역광) 쳐서 머리카락 윤곽 살려주고, 키 라이트는 디퓨저 대서 부드럽게 감아."
태훈 형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조명 각도를 틀었다.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지만, 그의 눈은 20년 전 현장으로 돌아가 있었다. "야, 김 작가! 너도 반사판 들어!"
김 작가도 얼떨결에 반사판을 들었다.
"거기 말고! 턱 밑으로! 캐치 아이(눈동자에 맺히는 빛) 살려야지! 그렇지!"
탁! 세팅이 끝났다. 도지웅이 빛 속에 섰다. 그 순간, 마법이 일어났다. 낡은 창고의 공기 중에 떠다니던 먼지들이 빛을 받아 금가루처럼 반짝거렸다. 도지웅의 얼굴에 깊이 있는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찌든 주름살 대신 고뇌하는 남자의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인아야! 합성해 봐!"
내가 소리쳤다. 인아가 엔터를 쳤다. [AI 합성률: 98% - 최적화 완료] 모니터 속, 아까 둥둥 떠다니던 가짜 얼굴이 사라졌다. 대신 빛과 그림자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80년대 영화 속 주인공 '선호'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
도지웅과 인아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배경이랑 완전 잘 붙었는데요?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이게 빛이다, 인마."
태훈 형이 사다리에서 내려와 땀을 닦으며 씩 웃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원판에 그림자가 없으면 가짜야. 그림자가 있어야 빛도 진짜처럼 보이는 법이거든."
나는 그 말에 닭살이 돋았다. 그래, 우리 영화가 하려는 게 바로 이거다. AI라는 화려한 빛 뒤에, 우리 같은 아날로그 예술가들의 그림자가 받쳐줘야 비로소 '진짜'가 되는 것.
"형님... 존경합니다."
내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남 대표는 이미 감격해서 태훈 형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형! 아니 형님! 저희 좀 도와주십쇼! 조명 감독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미친놈, 나 양파 팔아야 돼."
"아이~ 형. 밤에만! 밤에만 해주시면 되잖아요! 네? 개런티 확실하게 보장!"
“개런티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돈도 없는 것들이”
태훈 형이 못 이기는 척 담배를 꺼내 물었다.
"뭐... 기계 돌아가는 꼴 보니까 답답해서 내가 손 좀 봐야겠더라. 대신 야식은 족발이다."
"콜! 특대 사이즈로 모십니다!"
조명은 해결됐다. 무대는 완벽하다. 이제 이 무대를 채울 '마지막 퍼즐'이 남았다.
"근데 박 감독."
김 작가가 물었다.
"남주는 진짜 배우가 하는데... '보영'이는 그냥 AI로 만들 거야? 멜로 감정이 잡히겠어?"
아차. 도지웅의 얼굴을 바꿔줄 AI 소스는 있는데, 상대역 '보영'의 연기 톤을 잡아줄 배우가 없다. 도지웅 혼자 허공에 대고 사랑 고백을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때, 도지웅이 조명 빛을 받으며 폼 잡다 말고 입을 열었다.
"한 명 생각나는 친구가 있긴 한데요."
"누구?"
"제 제자."
"니가 제자도 있어?"
"옛날에... 연기학원 알바 할 때 가르쳤던 애 하나 있어요. 연기되고, 마스크 좋고, 느낌도 딱 '보영'인데..."
"오! 그럼 걔 연락해봐! 당장!"
"근데..."
도지웅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걔가 지금은 인스타에서 옷 팔아요."
"뭐?"
"50만 팔로워 인플루언서라나 뭐라나. 저번에 다른 일로 연락해 봤는데, '쌤, 저 연기 힘들어서 관두려구요. 돈이나 벌래요' 하고 끊던데요."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스승은 코인 앵벌이, 제자는 팔이피플. 이보다 더 완벽하게 망가진 사제지간이 있을까. 하지만 이상하게 촉이 왔다. 돈 때문에 연기를 버린 그 아이. 그 아이야말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결핍'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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