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인플루언서 그녀

by 배윤성

감독이란 족속은 태생이 관음증 환자다. 세상 모든 것을 프레임(Frame) 단위로 쪼개고, 그 이면을 들추어 보려 하니까.

성수동 공유 오피스. 이하나의 개인 스튜디오는 눈이 시릴 정도로 밝았다. 사방에 배치된 전신 거울, 수십 개의 링 라이트(Ring Light)가 뿜어내는 인공적인 광원. 그림자 한 점 허용하지 않는, 완벽하게 세팅된 '가짜 세상'. 나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숨이 턱 막혔다.
"어머, 쌤! 진짜 오랜만이다."
이하나는 도지웅을 반갑게 맞이했지만, 나와 남 대표를 보는 눈빛은 건조했다. 잘못 배달 온 퀵서비스 기사를 보는 눈빛, 딱 그거였다.

"그래서... 영화 출연이요?"
그녀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빨대를 질겅 씹으며 기획서를 대충 넘겼다. 종이를 넘기는 손톱의 화려한 큐빅이 번쩍였다.
"쌤, 미안한데 저 안 해요."
"하나야,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읽어봐. 이거 진짜 괜찮은..."
"쌤. 저 바빠요. 다음 주에 화장품 공구 라방도 잡혀 있고, 릴스 챌린지 광고도 찍어야 돼요. 그리고 요즘 누가 독립 영화 본다구..."
그녀는 단칼에 잘랐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그리고 이 캐릭터... '보영'? 완전 촌스러워. 대체 누가 사랑 때문에 죽어요? 그리고 이야기가 요즘 감성하고 너무 안 맞아요."
빠직. 내 머릿속의 퓨즈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완전 촌스러워? 이 영화는 내가 10년을 가슴에 품었던 이야기다. '보영'은 내 머릿속에서 수천 번을 울고 웃었던,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강인한 뮤즈다. 그런 내 자식을, 고작 휴대폰 화면 속에서 가짜 웃음이나 파는 애송이가 감히 모욕해?
"형, 가자."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야, 박 감독. 이야기좀 더 나눠보고..."
"필요 없어. 가자고."
나는 기획서를 거칠게 낚아챘다. 그리고 이하나를 노려봤다. 내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빨대를 물고 있던 그녀의 입이 멈췄다.
"저기요, 아가씨."
"......네?"
"배우 안 하길 잘했어. 아니, 넌 못 해. 자격 미달이야."
"참...나 뭐라고요?"
이하나의 눈썹이 꿈틀했다.
"너 같은 애가 보영이를 연기해?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보영이는 사랑하는 사람 살리려고 자기 목숨도 던지는 여자야. 헌신이고, 순수 그 자체라고."
나는 스튜디오의 화려한 조명들을 경멸 섞인 눈으로 훑었다.
"근데 넌 뭐야? 하루 종일 휴대폰 붙잡고 좋아요 구걸이나 하고, 엉덩이 흔들어서 조회수 빨아먹고. 네 눈동자에 영혼이 있긴 하냐? 링 라이트 불빛 반사되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잖아."
"야! 박찬혁!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남 대표가 기겁하며 말렸지만, 브레이크가 파열된 내 입은 멈추지 않았다. 이건 독설도 아니었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요즘 세상을 향한 한 영화감독의 절규 같은 거였다.
"솔직히 말해봐. 너도 알잖아. 그 나이면 이 바닥 끝물인 거."
"......!"
"이미지만 팔아먹는 거, 한 철이야. 너보다 더 예쁘고, 더 어리고, 엉덩이 더 잘 흔드는 애들 매일 쏟아져 나와. 너 지금 불안하지? 언제 잊힐까 봐. 그래서 그 가짜 미소 지으면서 아등바등하는 거잖아. 안쓰럽다, 진짜."
이하나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냥 평생 필터 낀 화면 속에서 살아. 우린 갈 테니까. 차라리 순수한 AI 배우를 쓰고 말지, 너처럼 알고리즘에 영혼 팔아먹은 꼭두각시는 사양이다."
나는 멍해 있는 도지웅의 팔을 잡았다.
"나와. 이딴 애한테 연기 가르친 너도 반성좀 해"
우리가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멈춰요."
등 뒤에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이하나가 주먹을 꽉 쥐고 서 있었다. 화려한 네일아트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날 것 같았다.
"아저씨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지껄여요?"
그녀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모를 감정이 일렁였다.
"나도... 나도 처음엔 진짜였어."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하 연습실에서 7년 동안 썩었어. 데뷔하겠다고 컵라면 먹으면서 하루 10시간씩 춤추고 연기 연습했어. 근데... 회사에서 뭐라는 줄 알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갈라졌다.
"'넌 매력이 없어. 연기는 그럭저럭인데 상품성이 없어.' 그러면서 방출하더라. 내 20대가... 통째로 부정당했어."
도지웅이 눈썹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제자의 아픔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으려고... 그래서 시작했어. 인스타든 뭐든 해서 유명해지면, 다시 연기 시켜줄까 봐. 엉덩이 흔들고, 멍청한 척 웃고, 시키는 대로 다 했어.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자격 미달?"
그녀가 나를 노려봤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보정 없는 진짜 눈물이었다.
"그 순수함, 나도 있었다고. 세상이 짓밟아버린 거지, 내가 버린 거 아니라고!"
정적이 흘렀다. 스튜디오 안엔 링 라이트의 팬 돌아가는 소리만 웅웅거렸다. 나는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텅 비어 보이던 그 동공 속에, 깊고 어두운 우물이 보였다. 7년의 좌절, 그리고 여전히 버리지 못한 연기에 대한 징글징글한 갈망. 그제야 나는 알았다. 내 독설이 그녀의 가장 아픈 '트리거'를 당겼음을. 그리고 그 상처야말로, 비극적인 여인 '보영'이 가져야 할 눈빛임을.
"증명해 봐."
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네 20대가 헛되지 않았다는 거. 네가 가짜가 아니라는 거. 그 잘난 50만 팔로워들 말고, 내 카메라 앞에서 증명해 보라고."
"......"
"돈은 못 줘. 대신, 네가 잃어버린 그 '진짜 얼굴' 다시 찾게 해 줄게. 할 거야, 말 거야?"
이하나가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화장이 번져 마스카라가 검게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괴했지만, 처음으로 그녀가 '인플루언서 이하나'가 아닌, '배우 이하나'로 보였다.
"대본... 줘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했는데 별로면, 아저씨 내 라방 나와서 무릎 꿇고 사과해요. 전 국민 앞에서."
"오케이. 대신 연기 안 되면 바로 계약 종료."
나는 씩 웃으며 남 대표에게 눈짓했다. 남 대표가 얼른 챙겨둔 시나리오를 건넸다. 이하나가 대본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9시. 양파 창고로 와."
나는 덧붙였다.
"화장 떡칠하지 말고, 민낯으로 와라. 네 가면은 거기서 안 통하니까."

우리는 쿨하게 돌아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길. 도지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아까 말 너무 심했던 거 아니에요? 애 울고 난리 났는데."
"야, 누가 그러더라. 배우는 상처를 먹고 크는 거라고."
나는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사실 나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확신했다. 방금 본 그녀의 그 독기 어린 눈물. 그것이 우리 영화의 마지막 퍼즐, '보영'의 영혼이 될 것이다.
자, 이제 이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이제 진짜 판을 벌일 시간이다.

(다음 화에 계속)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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