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소품의 전설

by 배윤성

“형, 고 선생님 잘 계시겠지?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 좀 걱정되던데.”
“소식 들은 지도 몇 년인지 기억도 안 난다. 건강하셔야 할텐데. 그런데 찬혁아. 궁금한 게 있는데 소품들 그거 다 AI로 만들 수 있는 거 아니야?”
“배우가 직접 만지는 소품들은 다 진짜로 하고 싶어. 초록색으로 떡칠한 막대기 들고 하는 연기에서 진심이 나올 수 있을까?”
“하긴 너하고 나하고 이런 건 참 잘 통해. 아날로그 감성.”

경기도 파주, 자유로를 한참 달려 도착한 외딴곳.
'영화사랑 소품창고'라는 간판은 이미 반쪽이 떨어져 나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마당에는 거대한 집게차(고철 수거용 트럭)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서 있었고, 인부들이 창고 안에서 물건들을 짐짝처럼 던져 넣고 있었다.
"아 이놈들아! 살살 다루라니까! 그게 어떤 칼인 줄 알아? <장군의 아들> 때 하야시가 찼던 칼이야!"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고동찬 대표.
70년대 거장 임권택 감독님의 소품 조수부터 시작해, 충무로 시대극의 9할을 책임졌던 살아있는 전설. 한때 충무로에는 "고동찬 창고에 없는 물건은 조선 500년 역사에도 없던 물건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왕국은 무너지고 있었다.
"어르신, 이거 다 폐기물이라니까요. 고물상에서도 안 받아주는 거 우리가 기름값만 받고 치워드리는 거라니까!"
고철 업자가 짜증을 내며 낡은 자개장을 트럭 위로 던졌다. 우지끈! 자개장이 박살 나며 나무 파편이 튀었다.
"악! 저 무식한 놈들이!"
고 대표님이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우리는 황급히 차에서 내려 뛰어갔다.
"대표님! 고 대표님!"
남 대표가 그를 부축했다. 노인의 눈은 퀭했고, 몸은 앙상하게 마르고 병들어 있었다.
"누구요...? 어? 자네... 남 피디 아닌가?"
"네, 접니다. 정식이요! 아이고,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고 대표가 떨리는 손으로 박살 난 자개장 파편을 집어 들었다.
"다 끝났어... 월세가 1년이나 밀렸어. 주인놈이 창고 당장 안 비우면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린대. 자식놈들은... 요양병원이나 가라고 하고..."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평생을 모은 내 새끼들인데... 이제 다 쓰레기랴. 시대극? 사극? 요새 누가 돈 들여서 찍나. 다 컴퓨터로 그려버린다매? 나도... 이제 폐기처분될 시간인가 봐."
가슴이 먹먹했다. 이 창고는 한국 영화의 보물창고였다. 하지만 효율과 자본의 논리 앞에선 그저 불쏘시개일 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희가... 마지막으로 좀 쓰면 안 되겠습니까?"
"......뭐?"
"쓰레기 아닙니다. 저희가 찍을 영화에... 대표님 새끼들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100억짜리 공모전, AI에 맞서는 아날로그 영화.
고 대표는 멍하니 우리를 쳐다보더니,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따라와 봐."
창고 안은 수거 작업으로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그 어수선함 속에서도 빛나는 물건들이 보였다. 남 대표가 구석에서 녹슨 사냥용 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 박 감독, 이거 기억나냐?"
"뭔데?"
"우리 입봉작 <새벽의 추격자> 때, 연쇄살인마의 시그니처 살인 도구. 우리가 디자인 뽑아서 주문 제작했잖아. 와... 이 녀석이 이 창고에서 살고 있었네"
남 대표가 사냥용 칼을 셔츠에 문질러 닦았다. 20년 전, 그 치열했던 현장의 땀 냄새가 훅 끼쳐오는 듯했다.
김 작가는 한쪽 구석에서 타자기를 발견하고 감회에 젖었다.
"이거... 내가 <경성 스캔들> 쓸 때 소품으로 들어갔던 건데. 배우가 키보드 치는 척만 해서 내가 직접 자판 쳐줬잖아."
우리는 마치 보물 찾기를 하는 아이들처럼 창고를 누볐다.
"야, 이거 <올드보이> 장도리 아냐?"
"저 TV! <살인의 추억> 때 송강호가 수사반장 보던 씬에서 나왔던 거네!"
그 물건들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었다. 우리 청춘의 파편이었고, 한국 영화의 역사였다. 고물상 트럭에 실려 가기엔 너무나 뜨거운 기억들이었다.
고 대표가 우리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고 놈들 데리고 한 세월 잘 가지고 놀았지. 이제 지긋지긋하다... 버리려고 내놓으니까, 임자를 만나네."
그가 주머니에서 낡은 열쇠 꾸러미를 꺼내 남 대표 손에 쥐여주었다.
"가져가. 다 가져가."
"대표님... 돈은 저희가 나중에..."
"돈은 무슨. 고물상 놈들이 가져가면 쇳덩이고, 자네들이 가져가면 작품이 되잖아. 내 새끼들... 마지막으로 카메라 밥 좀 먹여줘. 그게 내 소원이야."
그는 뒤돌아서서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그 <별을 쏘다>인지 뭔지. 그 영화, 꼭 개봉시켜. 나 죽기 전에 극장에서 내 물건들 다시 한번 보게."
우리는 고개를 숙였다. 이건 단순한 협찬이 아니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장인의 유산을 물려받는 의식이었다.
"자! 싣자!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실어!"
우리는 <현대 유통> 트럭에 소품을 꽉꽉 채웠다. 80년대 전축, 낡은 소파, 다이얼 전화기, 빛바랜 포스터...
트럭이 멀어질 때까지, 고동찬 대표는 창고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석양에 비친 그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쓸쓸하고도 장엄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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