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감정이라는 이름의 버그.

by 배윤성

서울 강남역, 스크리너스 본사 35층.
이곳은 농산물 시장의 허름한 창고와는 완벽하게 다른 차원의 세상이었다. 먼지 한 톨 없는 대리석 바닥, 벽면을 가득 채운 홀로그램 스크린,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완벽한 항온항습 시스템. 공기조차 데이터로 통제되는 곳.

임원실.
거대한 통유리 너머로 서울 강남의 마천루가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허인아는 죄인처럼 서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최신형 스마트 글라스를 끼고, 허공에 뜬 데이터를 손가락으로 넘기고 있는 남자.
강형석.
스크리너스의 미래전략 본부장이자, AI 기술 개발을 총괄하는 실세. 업계에서는 '디지털 도살자'라고 불리는 냉혈한이었다.
"허인아 수석."
강 본부장이 글라스를 벗어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차가운 금속성 목소리였다.
"연봉 3억. 스톡옵션 별도. 업계 최고 대우. 회사가 자네한테 이런 대우를 해주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최고의 콘텐츠를 픽업하고, 스크리너스의 기술을 개발하라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잘 아는군. 그런데 자네는 그 기술을 어디다 썼지?"
그가 손짓하자, 벽면 스크린에 허인아의 접속 로그가 떴다. 그리고 <별을 쏘다>의 테스트 영상 일부가 재생되었다. 낡은 소파에 앉아 울고 있는 도지웅과 이하나의 모습. 고화질 AI 배경과는 이질적인, 거칠고 투박한 영상이었다.
"이딴... 쓰레기를 만드는 데 우리 회사의 슈퍼컴퓨팅 파워를 썼나?"
강 본부장이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퇴물 감독에 나락 간 배우? 하... 허 수석, 취향이 아주 독특했군. 이런 '빈티지' 놀이에 심취해 있을 줄은."
"본부장님, 이건 단순한 놀이가 아닙니다. AI 기술과 인간의 감성을 결합하는 새로운 실험이고..."
"감성?"
강 본부장이 말을 끊었다. 그의 눈빛에 경멸이 서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뭔지 아나? '감성', '진심', '영혼'. 그런 건 말이야, 데이터로 환산되지 않는 불순물이야. 시스템을 느리게 만드는 버그(Bug)라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아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완벽한 세상을 만드는 기업이야. 예측 가능하고, 오차 없고, 효율적인 세상. 그런데 자네는 지금 그 시궁창 냄새나는 과거의 유물들을 다시 끌어올리려 하고 있어. 그것도 우리 기술을 훔쳐서."
"훔친 건 아닙니다! 저는 제 개인 계정의 할당량을..."
"회사의 자원은 회사의 비전에 부합할 때만 쓸 수 있는 거야. 똥을 만드는 데 쓰라고 준 게 아니란 거지. 게다가 내부 공모전을 직원이 도왔다? 그 사실이 유출되면 회사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라고"
강 본부장이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던졌다.
'징계 위원회 회부 및 직무 정지 명령서'
"선택해. 지금 당장 그 프로젝트에서 손 떼고,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삭제해. 그리고 시말서 쓰고 조용히 본업으로 복귀해. 그럼 이번 일은 단순 해프닝으로 덮어주지."
"......"
"만약 거절하면? 자네는 해고야. 그리고 회사 기밀 유출, 회사 자산 개인적으로 유용. 손해배상 청구서 날아갈 거고. 업계에서 영구 퇴출당하게 만들어주지. 내가 그 정도 힘은 있는 거 알지?"
인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창고 스튜디오에서 땀 흘리며 웃던 박 감독, 남 대표, 김 작가, 그리고 간절한 눈빛의 배우들. 그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여기서 거절하면, 자신의 인생이 끝장난다.
"시간은 오늘까지야. 나가 봐."
강 본부장은 다시 스마트 글라스를 꼈다. 인아는 투명 인간 취급을 받으며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에 서자 다리가 풀렸다. 그녀는 벽을 짚고 간신히 버텼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 감독이었다.
"여보세요? 인아 씨, 별일 없지? 언제 와? 우리 지금 족발 시켜놨는데..."
해맑은 박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감독님... 저..."
"어? 왜 그래? 목소리가 왜..."
"저... 못 가요. 이제... 못 도와드려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인아는 전화를 끊고 전원을 꺼버렸다. 차가운 스크리너스의 복도에 그녀의 흐느낌 소리만이 작게 울렸다.
기술이라는 날개를 잃어버린 <별을 쏘다> 팀. 그들에게 진짜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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