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9시. 창고 스튜디오.
고동찬 대표님에게 받아온 소품들로 세팅된 현장은 어제와는 공기가 달랐다. 텅 비어있던 초록색 크로마키 앞에는 낡은 벨벳 소파와 자개 테이블, 다이얼 전화기가 놓였다. 태훈이 형의 조명까지 더해지니, 이곳은 완벽한 1982년의 응접실이었다.
"......왔어요."
창고 문이 열리고, 이하나가 들어왔다.
약속대로 민낯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주근깨가 살짝 보였고, 머리는 질끈 묶었다. 명품 로고가 박힌 티셔츠 대신 헐렁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화려한 '인플루언서 이하나'는 없고, 7년 동안 연습실에서 썩었다던 '배우 지망생 이하나'만이 서 있었다.
"오... 느낌 있는데?"
도지웅이 믹스커피를 마시다 말고 감탄했다.
"쌤, 조용히 해요. 저 지금 기분 엄청 다운이니까."
이하나는 긴장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소품으로 깔린 낡은 소파를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길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파주에서 공수해 온 낡은 벨벳 소파. 먼지가 풀풀 날리는 그 소파에 이하나와 마주 앉았다. 나는 믹스커피를 종이컵에 타서 그녀에게 건넸다.
"아메리카노는 아니지만, 당 떨어질 땐 이게 최고야."
"......감사합니다."
이하나는 아직도 이 상황이 낯선지, 소파의 거친 질감을 손끝으로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고정 간첩'이라는 배역의 무게감이 20대 인플루언서에게는 너무 버거운 옷처럼 느껴질 것이다.
"대본 다시 보니 어때? 감이 좀 와?"
내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간첩이라니... 저한텐 너무 판타지 같아요. 임무랑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는데, 제가 살면서 총을 잡아본 것도 아니고. 도저히 상상이 안 가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너, 영화 <색, 계> 본 적 있어? 탕웨이 주연한 거."
"아... 유튜브 요약본으로 본 적은 있는데... 그거 그냥 야한 영화 아니에요?"
그녀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대중의 시선은 늘 자극적인 것에 머무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야한 영화가 아니야. 탕웨이는 스파이로 침투해서 거짓으로 친일파 장교를 유혹해야 했고, 그를 죽여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아. 그런데 그 영화의 진짜 포인트는 베드신이 아니야. 그 행위가 끝난 직후, 탕웨이의 눈빛이지."
"눈빛이요?"
"공포, 수치심, 그리고 사랑. 그 혼돈 그 자체. 살기 위해 옷을 벗는데, 정작 벗겨진 건 그녀의 생존 본능이었으니까."
이하나는 멍한 표정이었다. 아직 피부로 와닿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의자를 끌어당겨 그녀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이론으로는 안 된다. 그녀의 '기억'을 꺼내야 했다.
"자. 눈을 감아 봐."
"네?"
"시키는 대로 해. 상상해 보자고. 네 인생에서 가장 가슴 졸였던 순간.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 있어?"
이하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있었어요."
"언제?"
"연습생 시절이요. 회사에서는 연애하면 즉시 퇴출이라고, 계약서에 빨간 줄로 써놨었거든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 오빠는... 회사가 사활을 걸고 키우던 '에이스' 연습생이었어요. 곧 데뷔조 확정이었고, 저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 대타였고요."
"계속해 봐. 어디서 만났어?"
"CCTV가 없는 곳이요. 비상계단, 옥상... 매니저 실장님 눈 피해서 밤마다 몰래 만났어요. 손잡고 있다가도 발소리만 들리면 화들짝 놀라서 남인 척 떨어지고."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때의 불안감이 다시 떠오른 듯했다.
"한 번은... 월말 평가 끝나고 비상구에서 그 오빠가 절 안아주는데, 문 너머로 실장님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숨소리도 못 내고 그 오빠 품에 안겨 있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요. 들키면 둘 다 끝장인데... 근데 그 품이 너무 따뜻해서... 떨어지기가 싫었어요."
"바로 그거야."
내가 탁자를 탁 쳤다. 이하나가 놀라서 눈을 떴다.
"네가 느꼈던 그 감정. 그게 바로 스파이야."
"......네?"
"매니저 실장은 너를 감시하는 공작원이고, 데뷔라는 목표는 조국의 임무야. 그리고 그 에이스 오빠는 네가 죽여야 할 타깃이고."
이하나의 동공이 커졌다.
"너는 총을 든 게 아니야. '들키면 끝장'이라는 공포를 들고 사랑을 한 거라고. 비상계단에서 숨죽이던 그 숨소리,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 남인 척 연기하던 그 순간. 그게 바로 '보영'이가 선호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야."
나는 그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쐐기를 박았다.
"너, 그때 그 오빠랑 어떻게 됐어?"
"......헤어졌어요. 그 오빠 데뷔 확정되던 날,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미안하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나 꿈을 망칠 순 없잖아.'"
"그때 넌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냥... 알겠다고. 오빠라도 성공하라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게 보영이야. 자기는 버려져도 좋으니, 사랑하는 사람은 살리려는 마음. 탕웨이가 꼈던 반지의 무게가, 네가 포기했던 그 사랑의 무게랑 다르지 않아."
이하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7년 전, 연습실 비상계단에서 울고 있던 어린 소녀의 감정이, 1982년 명동의 낡은 다방에 앉아 있는 간첩 '보영'의 감정과 접속하는 순간이었다.
"감독님..."
그녀가 젖은 눈으로 나를 봤다. 아까의 공허한 인플루언서의 눈빛은 사라져 있었다.
"저... 알 것 같아요. 그 마음."
"그래. 이제 그 눈빛 그대로 카메라 앞에 서면 돼. 탕웨이 흉내 낼 필요 없어. 그냥 7년 전의 너, 그 비상계단 속의 이하나를 데려와."
나는 빈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자, 가보자. 네 첫사랑, 다시 한번 죽이러."
어수선했던 사무실은 다시 초집중 상태의 촬영장이 되었고, 모두가 하나의 감정에 집중을 시작했다.
"자, 감정 테스트 한 번 갑시다. 인아야, 카메라 세팅 됐어?"
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허인아?"
'당근 1호' PC 앞에 앉아있던 허인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모니터가 아니라, 자신의 스마트 워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워치에서 빨간색 경고등이 계속해서 깜빡이고 있었다.
"잠깐만요. 전화 좀..."
그녀가 창고 구석으로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평소의 침착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촬영을 잠시 멈추고 그녀 쪽을 주시했다.
창고의 소음 때문에 정확히 들리진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그냥 개인적으로..."
"...네? 감사팀이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인아가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박 감독님... 저, 회사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이야? 감사팀이라니?"
남 대표가 놀라서 물었다.
"제가... 회사 서버를 좀 썼거든요. 우리 영화 렌더링 걸 때, 여기 PC로는 감당이 안 돼서 제 아이디로 회사 클라우드 GPU를 몰래 연결해서 썼는데..."
"그게 걸린 거야?"
"네. 트래픽이 비정상적으로 튀었다고... 보안팀에서 호출이 왔어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스크리너스는 보안에 목숨을 거는 IT 기업이다. 내부 자원을 사적으로, 그것도 자사 공모전 특정 작품에 유용했다는 건 이해충돌 위반. 명백한 해고 사유, 심하면 소송감이었다.
"죄송해요. 금방 해결하고 올게요. 별일 아닐 거예요."
인아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짐을 챙겨 급하게 창고를 나갔다.
남겨진 우리는 멍하니 서로를 쳐다봤다.
"야... 이거 우리 좆된 거 아니냐? 인아 씨 없으면 우리 팀 전멸인데."
김 작가가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일단 우리 폰으로 찍자. 인아 올 때까지 연기 호흡이라도 맞춰놔야지."
내가 짐짓 태연하게 말했지만,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