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악! 또 이 지랄이네!"
남 대표가 마우스를 집어던지려는 시늉을 했다.
<창고 스튜디오>.
허인아가 떠난 지 채 하루도 안 되었지만, 우리는 '맨땅에 헤딩'을 시도하고 있었다. 인아가 없어도 우리가 해보겠다며, 유튜브에서 'AI 영상 제작 독학' 영상을 틀어놓고 ‘당근 1호' PC와 씨름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찍어 놓은 실사 연기 영상과 AI 생성 배경과는 완벽하게 따로 놀았고, 프롬프트 공유 사이트에서 복붙해 온 포멀한 프롬프트는 이질적인 느낌만 잔뜩 올려놓았다.
도지웅의 절절한 눈물 연기도, 고동찬 대표님의 손때 묻은 소품들도, 태훈이 형의 완벽한 조명도... 이 멍청한 기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픽셀 덩어리로 깨져버렸다. 거대한 벽이었다. 열정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자본과 기술'이라는 차가운 벽.
"형, 그만해. 컴퓨터 터지겠다."
내가 짐을 챙겨 일어났다.
"어디 가? 인아 씨 만나러 가냐?"
"어. 해결사는 못 데려와도, 밥은 먹여야지. 우리 때문에 곤란해졌는데."
나는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실었다.
퇴근 시간의 지옥철. 땀 냄새, 향수 냄새,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뒤섞인 공간. 덜컹거리는 전동차 차창에는 늙고 절어있는 한 마리 외로운 짐승의 모습이 비쳤다.
강남역.
스크리너스 본사가 있는 그곳은 욕망의 용광로였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마천루들,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엘리트들.
거대한 스크리너스 사옥 앞에 서니, 내가 걸치고 있는 낡은 자켓이 유난히 초라하게 느껴졌다.
오후 7시.
인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회사 근처야. 잠깐 얼굴 좀 보자.]
한참 뒤에야 답장이 왔다.
[죄송해요 감독님. 저 지금... 누구 만날 기분이 아니에요.]
[밥만 먹자. 너 입장 곤란하게 안 할게. 역삼동 뒷골목 '두꺼비 식당'으로 와.]
나는 화려한 대로변을 피해, 빌딩 숲 뒤편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넥타이 부대들이 회식하러 몰려다니는 고깃집들 사이, 구석진 백반집.
잠시 후, 인아가 나타났다.
세련된 오피스 룩이었지만,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화장은 다 번져 있었다. 며칠 전 강단 위에서 "AI는 혁명입니다"라고 외치던 당당한 커리어우먼은 온데간데없었다.
"감독님..."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저 진짜 비겁하죠? 감독님 팀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고."
나는 대답 대신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일단 먹어. 제육볶음 시켰다. 여기 잘해."
인아는 밥을 한 술 뜨다 말고 울컥했는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무서웠어요. 강 본부장이... 저 업계에서 매장시킨다고 했을 때. 제가 10년 동안 어떻게 쌓아온 커리어인데. 안 자고, 안 먹고, 친구도 안 만나고 컴퓨터랑만 씨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게 한순간에 날아간다고 생각하니까...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테이블을 적셨다.
"저 쓰레기죠. 감독님 꿈을 제 밥그릇이랑 바꿨어요."
나는 물컵에 물을 따르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높은 연봉, 화려한 명함, 성공한 삶.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갉아먹고 있었다. 마치 링 라이트 앞에서 불안에 떨던 이하나처럼.
"인아야."
"......"
"영화 찍을 때 말이야.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알아?"
"......레디, 액션?"
"아니. '컷(Cut)'이야."
나는 냅킨을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배우가 대사를 씹거나, 조명이 나가거나, 마이크가 붐대에 걸리면 감독은 가차 없이 '컷'을 외쳐. 그럼 그 테이크는 망한 거야. 쓰레기통으로 가는 거지."
인아가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근데 말이야. 어떤 감독도 '컷' 났다고 배우한테 '넌 끝났어, 짐 싸서 집에 가'라고 안 해. 다시 가자고 하지. '다시 갑시다. 테이크 투.'"
나는 그녀의 떨리는 손등 위에 내 투박한 손을 얹었다.
"너 지금 인생에서 큰 실수 한 것 같지? 배신자 같고, 실패한 것 같지? 아니야. 그냥 NG 한 번 난 거야. 테이크 하나가 망가졌을 뿐이라고. 영화는 말이야, NG 난 필름들을 다 버리고 남은 OK 컷들만 이어 붙여서 만드는 거야. 관객들은 네가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몰라. 마지막에 보여줄 완성본만 기억하지."
"감독님..."
"그러니까 쫄지 마. 뭐 본부장? 그 새끼가 네 인생 편집권 있어? 네 인생 편집권은 네가 쥐고 있는 거야. 지금 이 장면이 마음에 안 들면, '컷' 하고 다시 찍으면 돼. 우리 아직 크랭크업(촬영 종료) 안 했잖아."
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데이터와 효율,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인 세계에서만 살던 그녀에게, '실패도 과정'이라는 내 투박한 위로가 낯설게 다가온 듯했다.
예술가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수를 통해 더 좋은 장면을 건져내니까.
"......이 프로젝트 진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저, 회사 자원은 이제 못 써요."
"누가 훔쳐다 쓰래? 정공법으로 가면 되지."
"어떻게요?"
"네가 가르쳐 줘. 낚시하는 법."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나 기계치 맞아. 근데 나 박찬혁이야. 네가 기술만 좀 알려주면,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그 기계 놈이랑 맞짱 떠볼게. 너는 뒤에서 코치만 해. 위험하게 전면에 나서지 말고."
"......감독님."
인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 젖은 얼굴에 핀 웃음꽃이, 강남의 어떤 네온사인보다 예뻐 보였다.
"감독님 진짜... 대책 없이 낭만적이시네요."
"낭만 없으면 시체지, 예술하는 놈들이."
인아가 눈물을 쓱 닦더니,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좋아요. 다시 가요, 테이크 투."
그녀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불안함은 사라지고, 무언가 결심한 단단한 눈빛.
"대신 조건 있어요."
"뭔데?"
"제가 과외비는 안 받을게요. 대신... 장비는 제가 세팅하게 해 주세요. 감독님 그 똥컴으로는 절대 마감 기한 못 맞춰요."
"야, 괜찮아. 어떻게... "
" 저 꽤 벌어요. 근데 저 잘리면 감독님이 평생 짜장면 사주신다면서요?"
"......평생은 좀 그렇고, 10년은 사줄게."
"콜."
우리는 제육볶음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웃었다.
빌딩 숲 사이, 좁은 골목길의 허름한 식당.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세트장이었다.
컷. 오케이.
자, 다음 장면 찍으러 가자.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