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9년 차, 퇴사를 결심하다.

마지막 몸 담았던 회사에 관하여

by 모처럼

약 8년을 한 회사만 다니다 보니 많은 것들이 곪아 있었다. 더 이상 새로 배울 것이 없다는 느낌에서 오는 지루함과 갈증, 윗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참고 있던 억눌린 감정들까지. 우연히 한 화장품 회사에서 제안이 왔고 일주일 만에 합격을 하여 고민 없이 15일 전 바로 퇴사를 통보했다. 당연히 퇴사 후 엄청난 미움을 사버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 전 인간관계는 어떻게 되든 나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이 업계를 떠날 거라 확신했기 때문에.


8년 만에 첫 이직, 하자마자 2달 만에 또?

화장품 회사로 이직 한 뒤 많은 혼란이 찾아왔다. 처음 경험해보는 다른 세계관, 그리고 무너저가는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무너저있던 브랜드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부담감, 내가 예상하지 못한 업무들까지. 혼란스러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결국 두 달여 만에 다시 선배가 추천한 매거진의 뷰티 에디터 면접을 보게 되었고 그 전 회사들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회사였지만 '차라리 원래 하던 일, 나에게 제일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라는 생각으로 가까스로 올린 연봉까지 제자리로 되돌려놓으며 고향 같은 매거진 업계로 돌아왔다.


다시 매거진 에디터로 노동환경과 일의 딜레마

그렇게 다시 매거진 에디터로의 생활을 시작한 지 일주일째. 주변에서 '그래도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회사를 가야 한다'는 말이 왜 인지 실감했다. 1인 대표는 말 그대로 독재정치를 펼치고 있고 그뿐 아니라 내가 상식이라 믿었던 수준을 넘어서는 날 선 그의 말투와 폭언에 하루하루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어느 새인가 나는 그 시스템에 완전히 적응해버렸다. 되려 내가 여기서 이런 작업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음에 감사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사건의 시작, 시말서와 각서를 쓰고 퇴사하다

그러던 어느 날 금요일 밤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급하게 제주행을 택한 나. 일박이일이라도 숨통 트일 곳이 필요해 떠난 제주도에서 해방감과 즐거움을 만끽하며 와인에 취해갈 즈음이었다. 갑자기 회사 단톡 방을 찢어 놓은 한마디. '00팀 000과 000은 시말서와 각서를 써서 나에게 주도록'.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혹시 며칠 무단결근을 했냐, 아니면 회사에 몇천만 원짜리 손해를 입혔냐 묻더라. 잘못이라면 내 팀의 후배가 지출증빙에 이름 석자를 빼먹은 것. 잘못의 경중이 있겠냐만은 회사 생활을 10년 가까이하도록 시말서란 것을 처음 써보는 것은 물론 태어나서 각서라는 것을 처음 써보는 나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열이 나고 몸에 경련이 왔다. 같이 제주에 있던 선배는 그 회사 당장 그만두라고 했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퇴사 면담을 잡았다.


퇴사 후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면 아직도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오랜 직장 생활 후 두 번의 이직이었다. 처음부터 오래 버틸 수 있는 회사라 생각은 안 했지만 내 커리어를 생각해서라도 일 년은 버티고 싶었다. 이 기준을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단위로 그 사람의 참을성을 평가하는 한국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었다. 일 자체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고 보람도 컸으며 내가 성장하는 느낌도 강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퇴사를 결정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6개월도 많이 버틴 것이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제 막 이 조직에 익숙해질 때쯤, 일이 손에 익을 때쯤 그만두는 것이 참으로 아쉽기도 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그만두는 것이 맞는지 물었다. 물론 내 입장에 선 사람들은 나에게 잘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난 불특정 다수에게 한번 더 묻고 싶다. 물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지만. 나보다 더 심한 직장 내 괴롭힘이나 핍박을 견뎠던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과연 난 그만두길 잘한 것이 맞는 걸까?

내가 참을성이 부족한 걸까?

그리고 당신들은 참을만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