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질경이 Jun 27. 2024

신사와 딸깍발이

                                   

 한국 현대수필 100년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는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와 이희승의 '딸깍발이'를 읽었다.   두 글 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실렸던 글이다.


 마당에서 낙엽을 태우는 사람은 백화점에서 커피를 갈아 집에 와서 마시고 장작을 때서 목욕물을 덥힌다. 그의 벽돌집에는 담장이가 올라가고 마당에 낙엽이 쌓여간다.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낀다. 방에는 침대가 있고 다가오는 겨울을 생각하며 월동 걱정 대신에 크리스마스트리 세울 생각과 스키를 타 볼까 계획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근심이 사라진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그는 멋쟁이 신사일 것이라고 상상하며 그런 삶을 동경했다.  나뿐 아니라 1960년대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딸깍발이를 배울 때는 그 궁상스러움과 무책임이 무조건 싫었다. 우리 집에 그런 사람이 한 분 있었기에 더욱 반감이  생겼을 것이다.


"두 볼이 여윌 대로 여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 볼의 가죽이 입안에서 서로 닿을 지경이요 콧날은 날카롭게 오뚝 서서......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무력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 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문 입은 그 의지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그래도 두 눈은 개가 풀리지 않고 영채가 돌아서 무력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이마는 대게 톡 소스라쳐 나오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 버스러진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작가가 혹시 그 시절의 우리 아버지를 앞에 앉혀놓고 보면서 그대로 묘사하지 않았나 할 정도로 놀랐다.

"사실로 졌지마는 마음으로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 불은 안 쪼인다는 지조... 이 몇 가지가 생활신조였다." 


 먹을 것과 땔감이 없어도 청렴과 개결을 생명으로 알고 예의와 염치만 따지는  딸깍발이를 이해하는 일은 십 대의 나에게는 불가능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창밖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두 남자를 생각한다.


 '낙엽을 태우며'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자랑하는 요즘 유행하는 SNS에 올라온 글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쓴 "메밀꽃 필 무렵"과 이 글을 읽으며 상상하는 그 신사가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딸깍발이를 다시 읽어본다.

"현대인은 너무 약다. 전체를 위해서 약은 것이 아니고 자기중심 자기 본위로 만 약다. 백년대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일, 코 앞에 일에 만 현명하다.  의기와 강직은 찾아볼 수 없다".  


1952년 전쟁 중 피난도 가지 못하고 고난을 겪으며 쓴 이희승 선생의  글이 70년을 지난 지금 이 시대에 더 무겁게 다가와 절실하게 느껴진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이 두 글을  다시 읽으며  지금은 거의 멸종 상태라서 찾아보기 힘든   남산골 딸깍발이 같은 선비가 많이 그립다.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이나 이 세상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쾨쾨한 샌님이라고 깔보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지금 내 곁에 계신다면 담뱃갑에 용돈 좀 끼어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드리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매화꽃 핀 선암사에서 만난 목장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