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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경이 Jun 29. 2024

단계 벼루와  연탄


  내가 중학교 1학년 어느 봄날  우리 가족은 얼마 되지 않는 살림살이를 리어카에 싣고 잠시 얹혀살던 도렴동 이모네 집을 떠나 필운동으로 이사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살길이 막막해진 우리 가족은 고등학교 이상 된 언니 오빠는 남의 집 가정교사나 직장을 잡아 떠나가고 나와 막내 오빠만 부모님 곁에 남았다.

우리가 이사 간 집은 스무 평 정도 되는 한옥인데 대문을 들어가면  시멘트로 만든 작은 물탱크가 마당 가운데 있고  왼쪽에 방 두 개, 오른쪽에 방 두 개가 있는 전형적인 서촌의 작은집이었다.

안방에는 기차에서 간식을 파는 주인과 아내, 일곱 살쯤 되는 아들이 살았다. 작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우리 네 식구가 살아야 할 어두운 건넌방이 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작은 집은 처음 보았지만 사촌오빠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이모네 집 보다 마음은 편했다. 

 마당 건너에는 만삭인 아내와 연탄공장에 다니는 남편 임 씨, 그리고 말을 잘 못하는 대 여섯 살의 용주라는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임 씨는  한국전쟁 직후 혼자 개성에서 피난 내려와 연탄공장에서 일하다 용주 엄마를  만나 결혼식도 못하고  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그는 비 오는 날 소주 한잔 마시면  타향살이 몇 해던가~~`를 부르며 울었다.  평소에 말이 없는 그는 자기 아내에게 고향에 내 또래 여동생이 있었는데 나를 보면  자기 동생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고 했다.  

  자존심때문에 아무일이나 할수 없던  유식한  우리 아버지는 새벽부터 담배를 피우며  연신 기침을 했다. 그리고 조간신문을 읽으며 세상을 탓했다. 엄마가 한 평도 안 되는 부엌에서 연탄불에 밥을 하는 동안 나와  막내 오빠는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중학교에 가니 사 오라는 것도 많았다. 혹시 미술시간이나 수예 시간에 필요한 준비물 살 돈을 달라고 하면  오늘은 주시려나.. 혼자 생각하다 말도 못 하고 그냥 가기가 일쑤였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 등교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키워 본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보다 더 힘들었던 건 엄마였을 것이다.  

 학교에 다녀오면 아버지는 읽고 난 신문지 위에 붓글씨를 쓰고 계셨다. 한 줄 쓰고 그 위에 또 쓰고 신문지에 빈칸이 없어질 때까지 쓰셨다. 아버지의 벼루는 글 쓰는 선비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 했다는 단계 벼루라고 했다. 붉은빛을 띤  갈색과 진한 초록색으로 된 매끈한 벼루는 초록 부분에는 솔잎이 갈색 부분에는 소나무 가지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솔잎 부분이 약간 떨어져 나가 국보급 골동품은 아니지만 집에 쓸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던 그 시절 아버지의 자존심이었다. 엄마가 시집올 때 해온 장롱도 빚쟁이들에게 빼앗긴 형편에 그 벼루가 완벽한 상태였다면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형편에서도 아버지는 커피를 마셔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심지어 붓글씨 선생님에게 갈 때 빈손으로 갈 수 없다며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 학교에 가지고 가야 할 준비물도 못 가지고 가서 선생님께 야단맞아야 하는 나에게 단계 벼루는 갔다 버리고 싶은 물건이었다. 

 이사간지 얼마 후 용주네 집에 어떤 아주머니가 오고 방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더니 아기울음소리가 났다.  그 집 아기는  참 쉽게도 태어났다. 출산을 도와준 아주머니는 금방 가고  연탄공장에서 일을 마친 임 씨가  한 손에는 연탄 한 장, 다른 손에는 찬거리를 사 들고 와  부엌에서 밥하고 마당에서 빨래하고 소리 없이 모든 일을 혼자 해 내었다. 

 임 씨가 집에 올 때 새끼줄을 꿰어 들고 오는 연탄은 특별한 연탄이었다.

그 시절 작은 연탄공장에서는 석탄가루를 틀에 넣고 위에서 눌러 구공탄을 만들었다.  한 번만 눌러 만든 연탄은 쉽게 깨지기도 하고 열두 시간 이상 가지를 않았다. 그가 집으로 가져오는 연탄은 세 번을 눌러 만든 거라서  하루 종일 탄다고 용주 엄마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특별히 만들어 오는 질 좋은 연탄으로  밥도 짓고 방도 따뜻하게 해 주니 그는 그의 가족을  행복하게 해 주기에 충분한 가장이었다. 

 엄마는 언제나 바느질을 했다. 여자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올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임 씨는 우산을 쓴 채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아기 기저귀를 빨고 있었다.

우두커니 앉아서 그 광경을 보던 엄마가 방에 들어와 한숨 쉬며 말했다.

나도 연탄걱정 좀 안 하고 살아 보았으면.. 


 그때는 1963년,

내가 열두 살

엄마가 마흔여섯,

 귀 떨어진 단계 벼루보다 잘 타는 연탄이 더 쓸모가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33년 후,  엄마는 결혼한 지 60년 만에 아버지와 다시 결혼식 했다.

연탄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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