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교 1학년 어느 봄날 우리 가족은 얼마 되지 않는 살림살이를 리어카에 싣고 잠시 얹혀살던 도렴동 이모네 집을 떠나 필운동으로 이사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살길이 막막해진 우리 가족은 고등학교 이상 된 언니 오빠는 남의 집 가정교사나 직장을 잡아 떠나가고 나와 막내 오빠만 부모님 곁에 남았다.
우리가 이사 간 집은 스무 평 정도 되는 한옥인데 대문을 들어가면 시멘트로 만든 작은 물탱크가 마당 가운데 있고 왼쪽에 방 두 개, 오른쪽에 방 두 개가 있는 전형적인 서촌의 작은집이었다.
안방에는 기차에서 간식을 파는 주인과 아내, 일곱 살쯤 되는 아들이 살았다. 작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우리 네 식구가 살아야 할 어두운 건넌방이 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작은 집은 처음 보았지만 사촌오빠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이모네 집 보다 마음은 편했다.
마당 건너에는 만삭인 아내와 연탄공장에 다니는 남편 임 씨, 그리고 말을 잘 못하는 대 여섯 살의 용주라는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임 씨는 한국전쟁 직후 혼자 개성에서 피난 내려와 연탄공장에서 일하다 용주 엄마를 만나 결혼식도 못하고 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그는 비 오는 날 소주 한잔 마시면 타향살이 몇 해던가~~`를 부르며 울었다. 평소에 말이 없는 그는 자기 아내에게 고향에 내 또래 여동생이 있었는데 나를 보면 자기 동생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고 했다.
자존심때문에 아무일이나 할수 없던 유식한 우리 아버지는 새벽부터 담배를 피우며 연신 기침을 했다. 그리고 조간신문을 읽으며 세상을 탓했다. 엄마가 한 평도 안 되는 부엌에서 연탄불에 밥을 하는 동안 나와 막내 오빠는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중학교에 가니 사 오라는 것도 많았다. 혹시 미술시간이나 수예 시간에 필요한 준비물 살 돈을 달라고 하면 오늘은 주시려나.. 혼자 생각하다 말도 못 하고 그냥 가기가 일쑤였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 등교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키워 본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보다 더 힘들었던 건 엄마였을 것이다.
학교에 다녀오면 아버지는 읽고 난 신문지 위에 붓글씨를 쓰고 계셨다. 한 줄 쓰고 그 위에 또 쓰고 신문지에 빈칸이 없어질 때까지 쓰셨다. 아버지의 벼루는 글 쓰는 선비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 했다는 단계 벼루라고 했다. 붉은빛을 띤 갈색과 진한 초록색으로 된 매끈한 벼루는 초록 부분에는 솔잎이 갈색 부분에는 소나무 가지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솔잎 부분이 약간 떨어져 나가 국보급 골동품은 아니지만 집에 쓸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던 그 시절 아버지의 자존심이었다. 엄마가 시집올 때 해온 장롱도 빚쟁이들에게 빼앗긴 형편에 그 벼루가 완벽한 상태였다면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형편에서도 아버지는 커피를 마셔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심지어 붓글씨 선생님에게 갈 때 빈손으로 갈 수 없다며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 학교에 가지고 가야 할 준비물도 못 가지고 가서 선생님께 야단맞아야 하는 나에게 단계 벼루는 갔다 버리고 싶은 물건이었다.
이사간지 얼마 후 용주네 집에 어떤 아주머니가 오고 방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더니 아기울음소리가 났다. 그 집 아기는 참 쉽게도 태어났다. 출산을 도와준 아주머니는 금방 가고 연탄공장에서 일을 마친 임 씨가 한 손에는 연탄 한 장, 다른 손에는 찬거리를 사 들고 와 부엌에서 밥하고 마당에서 빨래하고 소리 없이 모든 일을 혼자 해 내었다.
임 씨가 집에 올 때 새끼줄을 꿰어 들고 오는 연탄은 특별한 연탄이었다.
그 시절 작은 연탄공장에서는 석탄가루를 틀에 넣고 위에서 눌러 구공탄을 만들었다. 한 번만 눌러 만든 연탄은 쉽게 깨지기도 하고 열두 시간 이상 가지를 않았다. 그가 집으로 가져오는 연탄은 세 번을 눌러 만든 거라서 하루 종일 탄다고 용주 엄마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특별히 만들어 오는 질 좋은 연탄으로 밥도 짓고 방도 따뜻하게 해 주니 그는 그의 가족을 행복하게 해 주기에 충분한 가장이었다.
엄마는 언제나 바느질을 했다. 여자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올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임 씨는 우산을 쓴 채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아기 기저귀를 빨고 있었다.
우두커니 앉아서 그 광경을 보던 엄마가 방에 들어와 한숨 쉬며 말했다.
나도 연탄걱정 좀 안 하고 살아 보았으면..
그때는 1963년,
내가 열두 살
엄마가 마흔여섯,
귀 떨어진 단계 벼루보다 잘 타는 연탄이 더 쓸모가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33년 후, 엄마는 결혼한 지 60년 만에 아버지와 다시 결혼식 했다.
연탄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