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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경이 Jul 19. 2020

푸른 돌고래를 만난 섬

채널 아일랜드 국립공원

 산타바바라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쯤  서쪽으로 가면 여덟 개의 섬들이 있다.

1980년 그 섬 중 다섯 개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북미의 갈라파고스라고도 불리는

 채널 아일랜드 국립공원이다.


이 섬들은 천오백만 년 전 멕시코에 붙어 있던 육지였는데 산 안드레아 폴트가 밀어내어 섬이 되었다고 한다.. 그 섬에는 4만 년 전부터 츄마쉬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빙하기에 바닷물이 얕아서 육지에서 건너와 살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발을 디딘 후 유럽의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몰려왔다.

50년 후, 카브리요라는 포르투갈 사람이 샌디에이고를 출발해 샌프란시스코까지 갔다. 그 항로에 섬들이 있었다. 유럽에서 온 탐험가들이 발만 디디면 그 땅은 그들의 것이 되었다.

1822년 마지막 원주민이 이 섬을 떠나고 난 후 사유화되어 150년 동안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이 섬을 산 사람들은 육지에서 메리노 양과 말, 돼지를 가져와 농장을 만들었다. 남북전쟁으로 양모의 수요가 많아지며 양 떼로 인해 초원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1860년대는 여기서 전복이 많이 난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 사람들이 전복을 멸종시킬 만큼 잡아들였다. 그들은 전북을 잡아 쪄서 말려 중국으로 수출했다. 한 파운드에 5전이었다고 한다

그다음에는 일본 잠수부들이 산 전복을 잡아갔고 1990년에 전복잡이 시대가 막을 내렸다..   

1950년대 독수리가 DDT 때문에 멸종했고 회색 여우가 멸종되었다.

198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이곳을 옛 모습으로 회복시키자는 움직임이 일어나서 독수리를 부화시켜 살게 하고 여우도 풀어주었다. 여기서만 자라는 동식물을 보호하고 외지에서 들어온 동식물은 육지로 돌려보내는 일을 국립공원과 자연보호협회에서 하고 있다.





 산타바바라 남쪽 벤츄라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 본 산타 크루즈 섬은 다섯 개의 국립공원 섬 중에 가장 크다.

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바다 동굴이 있다는데 카누를 타고 접근해야 해서 나는 가 보지 못했다.



그 대신 내가 갈 수 있는 제일 먼 곳까지 걸었다.

야생화가 피어있고 가슴이 탁 트일 정도로 시원한 바닷바람, 절벽 아래로 밀려오는 파도는 100년 전의 캘리포니아가 이런 모습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내 딸이 중학교 때 즐겨 읽던 책 중에 ‘푸른 돌고래의 섬'(Island of blue dolphins)이라는 책이 있다.

츄마쉬 인디언 200명 정도가 사는 작은 섬에 러시아 모피 상인들이 수달을 잡으러 와서 이 책의 주인공인 카라나의 아버지를 비롯해 젊은 남자들을 모두 죽인다. 일을 할 남자가 없는 이 섬에서는 노인들과 여자, 그리고 아이들은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늙은 추장이 혼자 도움을 요청하러 육지로 간지 한참 후에 산타 바바라에 있는 선교단에서 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데려가려고 배를 보낸다. 주인공 카라나가 배에 타고 보니 동생 라모가 안 보였다. 배가 떠나기 시작하는데 동생이 섬 언덕에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 카라나는  배에서 뛰어내려 섬으로 돌아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라모는 야생 개들에게 물려 죽는다. 카라나는 혼자 집을 짓고 낚시를 하고 활과 화살을 만들어 사냥도 하며 용감하게 혼자 살아간다. 18년을 그렇게 산 후 산타바바라 선교회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육지로 데려간다. 카라나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자신이 만든 전복껍데기로 만든 장신구로 치장한 후 설레는 마음으로 육지를 향한다.. 책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산타바바라에 아름다운 성당과 수도원이 있다.

1812년 지진으로 무너 저 내린 것을 대부분 츄마쉬 인디언들의 손으로  1820년 재건했다. 성당 옆에 공동묘지가 있다. 1789년 인디언들을 선교한 이래 4000명 이상이 이 마당에 묻혔다. 선교의 속도보다 전염병으로 죽는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이 공동묘지에 한 인디언 여인이 묻혀있다.



후아나 마리아..

'푸른 돌고래의 섬'의 주인공 카라나가 묻힌 곳이다.

 육지에 온 카라나는 이곳에 온 지 7주 만에 이질에 걸려 사망한다.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 신부님이 세례 주고 이름을 후아나 마리아라고 지어 주었다.


인디언들에게 세례를 주고 찬송가를 가르쳐 보아도 인디언은 인디언으로 남았다

1803년 2천 명 정도가 이 성당 안에서 살았는데 1880년 2명만 남았다.

한 지붕 아래 두 문화가 같이 살아 보려 무진 애를 썼지만 서로 바라는 것이 달라 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채널 아일랜드 국립공원을 둘러보고 육지로 돌아오는데 왼쪽을 내다보라고 선장이 방송을 했다.

푸른 돌고래 떼가 우리가 탄 배를 따라오고 있었다.

여기가 정말 푸른 돌고래의 섬이구나. 

수족관에서 본  돌고래는 왠지 슬퍼 보이는데 태평양의 검푸른 바다를 자유롭게 날 듯이 헤엄치는 돌고래들은 자유롭고 당당하다. 섬에서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용감하고 자유롭게 살아온 카라나를 만난 것 같아 더욱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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