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를 다녀왔다. 올해 첫 외출이자 마지막 외출이다.
나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불출(不出)할 작정이다. 불출하며 독서에 정성을 다할 요량이다. 그런 중에 올해부터는 다시 쓰기에 일로매진할 참이다.
글공부란 걸 해 보면 아주 담백한 일상을 얼마나 잘 가꾸는지가 관건이란 걸 체득하게 된다.
담백한 일상의 줏대는 기복 없는 항상심(恒常心)을 유지하는 것이다.
고요하되 뚝심 있게 흐르는 맑은 시냇물처럼 부드럽되 근기(根氣) 잃지 않는 맑은 정신으로 통섭적 읽기.-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닌가 싶다.
아니, 이 같은 정신은 차라리 모든 직업인의 기본자세라 해야 옳을 것이다.
어제 선배 몇 분을 만나고 왔다. 일진이 아주 좋은 날이었고 묘한 날이기도 했다.
이근욱 선배님이 동대구로역으로 마중나오셨다. 대구의 공기는 산뜻했고 겨울날씨 같지 않게 포근했다.
선배님 차로 선배님이 부러 생각해 놓은 경산 소재 옛날식 소고기찌개 노포로 점심을 하러 갔다. 식당 여주인은 우리 직전 손님들까지 대기시간이 제법 길었노라 귀띔해주었다.
허름하지만 생기(生氣)가 남다른 식당. 그 식당의 식탁에 오른 소고기찌개는 시나브로 술을 불렀다. 6년 만에 가진 만남에, 그것도 신년이겠다 술 한잔 부딪히지 않는 게 선배님께는 숫제 불손이요 비례(非禮)이다 싶었다.
소주를 한병 시켜놓고 차 안에서 풀다 만 회포를 이어갔다. 소고기찌개가 입에서 달달하게 씹히는 중에 침이 절로 솟는 것이 참으로 맛있었다. 이런 걸 두고 별미라는 겔게다. 별미와 함께하는 소주는 특유의 쓴맛 대신 단맛을 돋우었다.
점심을 먹고는 늘 그립고 감사한 분이 계신 곳, 언제든 고향집처럼 따스하게 반갑게 맞이해주는 곳, 기물(氣物)이 가득해 양기(陽氣)가 휘감아 도는 곳, 마음그릇이 더없이 넓은 내 보이차 선생님 계신 곳, 대한민국 최고의 보이찻집 <보석다관>으로 이동했다.
이근욱 선배님과 <보석다관> 양보석 선생님은 기질적으로 합(合)이 잘 맞는 분들이다.
이근욱 선배님은 2년 전 영남일보를 퇴직, 지난해 1월 3일자로 한국경제 대구경북 지사장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양보석 선생님은 3년 전 12월말 공직에서 물러나 30년 숙원이었던 다관을 시작하셨다.
두 분 다 30년 넘는 직장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제2인생에 무사히 안착하신 것이다.
나는 이근욱 선배님이 한국경제에서의 삶을 <보석다관>에서 잘 활용하시면 좋겠다 싶었다.
다관(茶館)은 중국 사람들의 사교장. 점심 식사 후 담소를 나누고 정보를 얻는 장소라는 뜻이다. 프랑스로 치면 살롱이고, 미국으로 치면 커피숍, 우리네 고조선으로 치면 신시(神市)와 같은 곳이다. 다만 다관과 살롱, 커피숍이 좁은 장소의 교류장이라면 신시는 오늘날 시장과 같은 넓은 장소의 교류장이다.
양 선생님이 내게 팽주(烹主·차를 우려주는 사람)를 권했다. 주인장께서 선배님 대접을 직접하라 배려해 주신 것이다.
나는 팽주가 되어 차를 우리고 두 분은 마주앉아 다담(茶談)을 시작했다. 두 고수의 대화는 유리 숙우(공도배)에 담긴 보이차가 찻잔에 부드럽게 흘러내리듯 청산유수로 흘러갔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에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팽주 역할만 잘하면 됐다. 1시간은 금방 흘렀다.
그 시간, 다관에는 여성 1분과 남성 1분이 각기 다른 테이블에 앉아 차를 즐기고 있었다.
여성 1분은 대구 불교방송 관계자였고, 남성 1분은 전직 조선일보 대구경북 광고지사의 차장 출신이었다.
이근욱 선배님은 이 남성이 안면이 있다고 하시면서 다관을 떠났다. 여성분은 그보다 10분 일찍 자리를 정리했다.
선생님과 나 그리고 남성 1분이 남았다. 셋은 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도 이근욱 선배님이 눈에 익는다고 했다. 출신을 따져보니 같은 업계 종사자였다. 두 분은 오랜만에 통화했다.
이 남성분은 보이차를 배우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이 분이 자리를 먼저 떴다.
선생님과 단둘이 남았다. 작년에 빌려 간 러시아 국책연구소에서 발행한 사회주의 중심의 <세계철학사>를 반납하고, 선생님이 구했으면 한 <인간 단군을 찾아서>를 준비해 가져다드렸다. <낙강문학> 3호에 발표한 <다판(茶板) 제작기>가 수록된 책도 함께 챙겨드렸다.
오후 5시 30분쯤 재미있는 여성이 한 분 찾아오셨다. 보이차(茶) 선생이었다.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함께 앉아 그야말로 보이차에 관한 ‘다담’을 나누었다.
신년이라 선생님과 저녁을 함께 할까 싶었는데, 다담이 시작되면서 그저 관망만 해야 했다.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여자 차 선생이 가방에서 차 감정을 받고 싶다며 차를 꺼낸 게 발단이 됐다.
차 선생이 차 선생한테 차 감정을 의뢰한다? 내 눈에는 그것이 진풍경이었다.
내력은 20년 된 보이청차. 보이차 감정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
-포장지를 연다.
-육안으로 차의 상태를 살핀다.
-차향을 맡아본다.
-차를 깨 자사(紫沙·차 우리는 주전자)에 넣고 끓인 물을 붓고 우린다.
-이때 찻잎은 담뿍 넣는다.
-3~4초 뒤 다관뚜껑을 열고 차향을 맡는다.
-첫 탕은 숙우와 찻잔에 부어 버린다.
-둘째 탕을 시음한다.
-자사에서 찻잎을 몇 개 집어내 살핀다.
나는 시음을 아주 찔끔하고 다시 마시지 않았고, 선생님과 여자 차 선생은 여러 번 했다.
양 선생님은 뜸을 들이며 에둘러 못 먹을 차라고 이야기하셨다.
‘아니, 왜 못 먹는 차라고, 약품 처리가 됐든지, 정상적인 찻잎이 아니라고 말씀을 안 하시지?’
나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고 지켜만 봤다. 이 보이차 감정평론은 말로써는 가늠되기 힘들어보였다.
여자 차 선생이 시종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소장한 20년 발효된 청차 두 편을 뜯어 시음을 함으로써 여자 차 선생은 뭐가 잘못된 것인지 더듬더듬 뒤따라왔다.
내가 물었다.
“선생님 가져온 차가 안 좋다는 걸 아셨잖아요? 그럼 이 차는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버리시는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또 엉뚱한 답변을 내놓았다.
“가져가서 보관을 더 해봐야죠. 그래도 이 상태면 버려야겠죠.”
보이차의 힘은 발효에서 나온다는 기본이 이 분에게는 엉뚱하게 적용되는 거였다. 나쁜 차는 나쁜 차인 채로 세월이 가는 것이지, 세월이 간다고 나쁜 차가 좋은 차가 될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냥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면 되는 것인데, 뭘 몰라 연연해 하는 짝이다. 무지의 소산이다.
하나 더 물었다.
“선생님이 경험한 보이숙차의 나쁜 경험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나쁜 보이숙차도 여러 경우가 있잖아요?”
“나쁜 숙차는 탕색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요, 향이나 맛은요?”
“좋지 않지요?”
“어떻게 좋지 않습니까?”
“불쾌하지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보이차 선생이란 사람이 이런 답변을 내놓으면….
탕색(찻물 색)이야 발효 정도에 따라 다르다. 내 몸이 직접적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맛이 더 중요하다.
발효과정에서 썩은 찻잎을 갖고 가공한 보이숙차는 오줌지린내가 난다. 2010년쯤 시중에 유통된 보이숙차는 이런 지린내 차가 보편적이었다.
그다음 5년 뒤엔 나프탈렌 향이 피어올랐다. 찌린내를 가리기 위해 약품처리를 한 것이다. 이 역시 먹으면 몸을 상하게 하는 차다.
이런 나쁜 향을 가진 차는 혓바닥과 목구멍이 바로 알아챈다.(둔한 사람은 모르긴하더라만.)
이런 저질 차들은 혓바닥이 굳어지고, 갈라진다.
아니면 목구멍이 딱 막히거나 뒤에 갈증이 인다.
이런 차들은 몸에 하등 좋을 게 없으니 마시면 안 된다.
보이차 선생이라면 이 정도 이야기는 들려주는 게 상식이다.
그 여자 차 선생은 양보석 선생님께 여러 질문을 했지만, 주구장창 변죽만 울리고 있었다.
소위 내공(內功)이란 것은 몇 가지 질문이면 그 수준이 가늠되고 1시간이면 그 바닥이 온전히 드러난다. 밑천이 드러나는 것이다. 물질이 만연한 사회일수록 드러난 자들은 사짜일 확률이 높다. 대중작가, 대중스타, 대중00. 대중이 붙은 자들을 조심해야 하는 게 대중시대다.
질문은 머리가 명석해야 잘하는 것이다. 말을 뱉는다고 의문문으로 던진다고 유창하게 말을 구사한다고 좋은 질문이 될 수 없다. 질문은 그저 하는 게 아니고 뭘 알아야 제대로 할 수 있고 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졸창간 시작된 시음회에 한 분을 초대했다. 기차 타기 전 차를 한잔 하기로 한 이학무 전 한국일보 지사장이었다.
이 장관을, 아니 이 향연을 이왕이면 보여드리고 싶었다. 해서 다관으로 오시라 했다.
여자 차 선생은 이학무 지사장이 오시자, 자리를 서둘러 파했다.
양보석 선생님과 이학무 지사장 그리고 나 셋이 남아 20년 된 맛 좋은 청차 2종을 호식하며 이번엔 정치 다담을 나눴다.
낮에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돼 버린 5선의 주호영 국민의 힘 의원이 선거 전단을 들고 찾아온 터였다. 주 의원은 양보석 선생님의 고교 2년 선배다. 주 의원은 다음주에 차 한잔 하러 오마 하고 나갔다. 혈색은 좋아 보였다. 뒷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짠한 구석이 있었다.
“이번에 무소속 출마?”
밤 8시가 가까워오자 식사를 밖에 가 해결하느니 다관에서 해결하자고 했다. 짬뽕을 먹으려다 피자로 선회했다. 다관 부근에 도미노피자가 있었다.
짬밥이 제일 낮은 내가 피자를 찾아왔다. 피자를 곁들여 먹는 보이차맛을 아실는지. 기가 막히다. 기름진 음식과 보이차는 궁합이 최적이다.
어느새 시곗바늘은 밤 10시를 향해 부지런히 달리는 중이었다. 나도 이제 대전으로 달려가야 할 것 같았다. 10시 38분 열차를 예매하고 다담을 마무리했다.
다관의 다담은 누군가 부러 끊지 않으면 끝이 없다. 다관은 말한 대로 정보 교류의 장이고, 사교의 장이기 때문이다.
241년 전 저기 대서양 너머 프랑스는 프랑스혁명 전야에 살롱에 모인 지식인들로 가득했더랬다. 그들은 루소의 <사회계약설>을 갖고 난상토론을 벌여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전 프랑스를 덮고 전 유럽을 뒤덮었더랬다.
우리는 저 이태리에서 넘어온 피자를 먹으며 밤늦도록 나라걱정을 했다. 다관은 그런 이야기가 묵직하게 오가도 거리낌이 없는 곳이다.
오후 2시 10분부터 시작된 다담은 밤 10시 10분에야 끝이 났다. 꼭 8시간이었다.
찻값은 이학무 지사장님이 내주셨다.
이학무 지사장님이 동대구역으로 배웅해주는 길, 가만 생각하니 오늘은 ‘전·현직 지사장의 날’이기도 했다.
이근욱 선배님은 한국경제 대구경북 광고지사장, 이학무 선배님은 전 한국일보 대구경북 광고지사장, 그리고 우연히 만난 중년의 남성분도 신문사 광고지사 출신이었다.
여기다가 오늘 다관을 다시 찾기로 한 이학무 지사장의 동행자는 정선태 연합뉴스 대구경북 광고지사장이다.
이학무, 정선태, 이근욱 지사장님은 모두 내가 좋아하는 선배님들이다. 그러고 보니 김중겸 매일경제 대구경북 광고지시장도 있다.
<보석다관>에서 이학무, 정선태, 이근욱, 김중겸 선배님을 모두 초청해 ‘지시장의 날’을 한번 열어드릴까도 싶다.
양보석 선생님의 다관에 이학무, 정선태, 이근욱, 김중겸 선배님이 함께 모이면 대구의 뒷골목 역사와 비사(祕史)까지 미주알고주알 날아다닐 것이다. 나는 팽주로 차만 우려주면 될 일이다.
금기를 깨고 두 번째 외출을 감행해야 할까도 싶지만, 자중할까 한다.
나도 어느덧 마흔 중반을 넘어섰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있고, 그에 비해 시간은 유한하다는 걸 실감하는 나이에 이르렀다. 유한한 시간은 희끗희끗 돋기 시작한 새치가 경보음처럼 알려주고 있다.
선배님들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