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궁고재를 찾아 주어 고맙소.
생명의 저점에서 방황할 때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 심할 터인데
내 조언을 구하고자
대전까지 찾아준 것은 더 고맙소.
누군가 나를 성심으로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최고 기쁨이 아닐까 싶소.
보이차와 낮술 덕분에 좋은 시간이었소.
서른다섯이라 하셨지.
한창 좋을 때인가….
귀하가 대구로 돌아가고
문득 내 서른다섯이
스멀스멀 밀려왔소.
나 역시 극도로 불안했소.
신문사를 박차고 나와 끝 모를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서 방황했소.
다행인 것은 결혼 전이었고
우울증을 극복한 뒤였기로
덜 고통스러웠소.
두 돌 딸아이,
가장(家長),
불안한 미래,
엄청난 압박일 거요.
그 압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불안 선배’로서 적어도 그러면 안 된다는
몇 가지를 어제 알려주었소.
말은 쉽지만 실천은 말처럼 쉽지 않을 거요.
전세자금 대출이자를 갚기 위해
새벽 3시에 세차를 하고
월급이 나오다 안 나오다 하는
불안한 회사로 출근한다는 이야기에서
나는 귀하의 희망을 보았소.
귀하는 건강한 몸을 가졌고
짱짱한 정신을 가졌소.
이제 귀하가 할 일은
귀하 자신을 굳세게 믿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어기차게 나아가는 것이오.
불안하다는 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오.
내게 스카우트 제의가 온 것은
서른일곱을 며칠 앞둔 연말이었소.
그러니까 내 ‘생명 시계’는
내가 크게 느끼고 있던 불안과
무관하게 한시도 멈추지 않았고
나는 그 상황에서 만날 글공부와 씨름했소.
그러면 그 시간만큼은 평온했고 행복했소.
여기서 멈추면 진짜 낭떠러지란 생각에
사즉생의 각오로 배수진을 쳤던 거요.
말하자면 벼랑 끝 전술을 펼쳤던 거지.
그러다 나도 모르는 내 생명 계획에 따라
(이런 걸 귀하처럼 천주 믿는 이들은 섭리(攝理)라 하지.)
도로 신문사로 들어간 거요.
서른한살부터 서른여섯까지
나는 가장 밑바닥에 있었지만
거기서 무척 괴로웠지만
되돌아보면 내 짧은 생에서
가장 맑은 정신으로 산 시간이었소.
그리고 도로 돌아간 신문사에선
내가 갑이었고, 내가 결정권자였지.
나는 글과 씨름하며
버티는 힘을 길렀고
사안을 보는 눈을 틔웠고
지식과 상식과 지혜라 일컫는 것들을
두루 섭렵했소.
그리 나는 나만의 생명 법칙을 세웠고
진정 내 생명을 사랑하기 시작했소.
나는 이제 내 생명에 태만할 겨를이 없다오.
내 생명의 가장 크고도 위대한 스승은
인간이 아니라 여리디여린 미물(微物) 노루귀였소.
노루귀는 고개를 숙여야 볼 수 있는
작디작은 봄의 전령이라오.
이른 봄 피었다가 꽃샘추위에 죽고
날이 풀리면 다시 꽃을 피우기를 2~3번 한 뒤
노루의 귀 같은 잎을 풍성하게 틔운다오.
나는 그 노루귀의 삶을
낮은 자세로 찬찬히 보면서
‘삶은 이런 거다! 이래야 하는 거다!’
한 깨달음을 크게 얻은 거요.
유레카!
나는 그로부터 인간에게 기대는 삶을 잊었소.
나는 그 누구 아닌 내 자신만을 믿소.
생명은 어느 생명이라도 노루귀처럼
홀로서야 하고, 그러려면 ‘나다움’이 있어야 하오.
나다움은 매력이고 실력이고 색깔이오.
보이지 않는 미래하고 씨름하는 시간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하는 건
지혜도 지식도 아닌 차라리 상식이라 맞소.
이 상식을 행하지 못하면
귀하는 상식도 없는 인간이 되는 거요.
물정 모르는 딸에겐 배신을 주는 거고
당신을 보고 사는 아내에겐 불신을 주는 거요.
자, 내가 서른다섯 컴컴한 터널 속에서
저 너머에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내 삶을 방기하고 술 여자 게임으로 방탕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오.
나만 없는 게 아니라
지금의 아내도 없을 것이고
지금의 내 두 아들도 없을 것이오.
생명은 매사 진지해야 하고 매사 열정적이어야 하오.
생명은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소. 단 한번뿐이라오.
내 생명 값은 누가 채점하는 게 아니라
죽기 직전 꽉 쥔 주먹이 스르르 펴질 때
자기 스스로 확인하고 돌아가면 되는 거요.
내 양심에 비추어 어떤 삶을 살았나가
이생의 유일무이한 성적표가 되는 것이라오.
새벽 3시 세차를 하고
오전 9시까지 회사에 출근하고도
체력이 남아돈다니
귀하에게는 머지않아 쨍하고 빛이 있으리!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도서관으로 가서 귀하가 좋아하는 책을 펼쳐
숱한 생명들과 치열한 인터뷰를 시작하시오.
우리네 생명길은 종이,
우리네 몸뚱어리는 붓,
H는 뒷날 어떤 유서를 남기고 싶으오.
이 한마디는 정말 등골이 써늘써늘 할 거요.
/심보통 2025.11.28.
*
차, 술이 생각나거든 언제든 궁고재를 찾으소.
매력을 쌓으며 보냈을 10년 뒤 귀하의 생명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