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광화 도량, 여산 도량

by 심지훈

혜광화는 내 엄마의 법명이다. 여산은 내 법명이다. 엄마가 대학 때 받아다 줬다. 엄마는 신실한 불자다. 절의 일이라면 직장생활 못지않게 열심히 하셨다. 그 엄마가 노화로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다. 골다공증으로 그 좋아하던 절엘 마음대로 다니지 못한다.


엄마는 골다공증 판정 전에 발목을 접질렀다. 발목이 불편해지자 멀쩡한 무릎이 아프다 했다. 그러던 중 주무시다 오른쪽 약지 심줄이 끊어져 생애 첫 수술을 받았다. 의사 말로는 자다가 끊어져 고통이 없지 생활하다 끊어졌으면 고통이 엄청났을 것이라며 행운이라고 했다.


그리고 발목-무릎 통증은 허리로 옮겨갔다, 아니 바이러스처럼 옮아갔다. 병원에선 양 허리 골의 밀도가 느슨해 텅 비었다고 했다. MRI 사진은 연탄처럼 시꺼맸다고 한다. 의사는 노인이라 수술 대신 통증완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을 것을 권했다. 모두 1년 반 사이 일어난 일이다.


의사는 쉬라고 했다. 그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했다. 해오던 생활습관이 있는데 말처럼 쉬울까. 조심한다고 했지만 통증이 도져 또 주사를 맞기를 2~3번 했다.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일모레 여든인 엄마는 1년 반 전까지 병원 한 번 안 다닌 건강한 분이셨다. 엄마가 골다공증 판정을 받고 자리에 눕자 나는 고향집을 찾지 않기로 했다. 남은 여생 에너지를 잘 분배해 시집 안간 누나와 좋은 추억 만드는데 쓰시라 했다. 그게 1년이 넘었다.


여름 오기 전에 경주 처가에 갔다가 잠시 들렀더니 1시간 바닥에 앉았다고 몸살을 앓으셨다. 괜히 찾았다 싶었다.


대전 우리집에서 김천 고향집까지는 1시간이면 족한 거리다. 결혼하고도 자주 갔고, 두 아들 낳고는 더 자주 갔는데 지나고 보니 엄마 에너지를 야금야금 갉아먹은 꼴이었다.


이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 아니, 가지 말아야 잘 하는 지경이 됐다.


1년 넘게 부러 고향집을 찾지 않으면서 어느 날, 자라온 습관이 참 무섭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서재와 거실에는 천주도, 예수도 아닌 부처가, 천주교 묵주도, 기독교 성경도 아닌 염주와 불경과 불서로 채워져 있다. 절에도 안 다니는 내가 시나브로 혜광화 보살 따라 불자가 된 것이다.


엄마 계시는 직지사 황계서실(黃鷄書室)이 청정도량이라면 내가 있는 대전 궁고재(窮考齋)는 또 하나의 청정도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 아닌가, 각자의 도량에서 수행하다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이리 생각하니 엄마의 삶이, 혜광화 보살의 삶이 덜 안쓰러웠다.


엊그제 오랜만에 아이들과 엄마가 영상통화를 했다. 영상통화는 물론 일반통화도 이제는 사치겠거니 하고 자제했는데, 막상 영상 속 엄마는 엉망이었다. 사나흘 끙끙 앓아 입술이 다 터지고, 몇 발자국 걸으면 무릎이 뒤틀리고 넙다리 고통이 심해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무던하고 묵묵한 엄마가 “죽을 지경”이란 건 정말 아프다는 뜻이다.


그 길로 양팔을 얹어 밀면서 이동할 수 있는 보조기구를 사고, 연포탕 거리와 삼겹살을 사서 아침에 내려갔다.


20년 전 캐나다 어학연수를 다녀와 한국 음식이 그리워 직접 해먹은 오징어볶음을 해드린 이후, 20년 만에 두 번째 요리를 해드렸다. 연포탕은 노인의 기(氣)를 보한다. 죽어가는 소를 되살린다는 게 낙지 아닌가. 갖은 채소와 버섯은 소화를 돕는다. 간도 천일염 큰술과 식초 큰술이면 충분하다. 낙지는 천일염을 한 수저 넣고 빡빡 문질러 간을 한다. 채소와 버섯이 충분히 익으면 간을 한 낙지를 넣고 보랏빛 낙지 국물이 우러날 때까지 끓인다.


그리 엄마와 함께 점심을 했다. 1년 6개월 만이다. 점심을 마치고 보조기구 높이를 맞추고 사용법을 알려드렸다. 여유를 찾을 겨를도 없이 설거지를 마치고 곧장 대전으로 돌아왔다. 첫째 아이 하교 시간을 겨우 맞췄다.


대전으로 와서 카톡을 보니 다행히 엄마가 보조기구 덕분에 걸을 수 있겠다고, 이제야 좀 살겠다고 했다.


건강한 사람은 중력 때문에 설 수 있고 걸을 수 있다. 하지만 허리 어깨 목 환자는 중력을 분산해야 통증을 줄이고 차도를 볼 수 있다. 엄마에게 양 팔목으로 힘을 주어 걸으면 다리에 힘이 덜 들어가고 척추가 늘어나 통증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알려드렸다.


이튿날 아침 가만 생각하니, 엄마 방에 철봉을 하나 달아놓으면 좋겠다 싶었다. 철봉을 달아놓으면 오가며 한 번씩 줄처럼 잡고 쉴 수도 있고, 양손으로 철봉을 잡고 아래로 잡아당기면 역중력 운동이 돼 척추가 펴져 통증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철봉매달기는 요즘 내가 즐겨하는 운동이다. 철봉매달기는 고질적인 손목터널증후군에 좋고, 척추에 좋고, 어깨에 좋고, 등에 좋다. 악력이 세지고 습관이 되면 잔근육도 키울 수 있다.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부쩍 한다.


‘함께 살 때야 가족이지 각자 솥 걸고 따로 살면 가족도 멀어진다. 멀어지면 봐야할 걸 못보고 지나간다. 못보면 일이 없고 보면 일이 된다. 결국 인간은 자기 도량을 가꾸고 지키다 한줌 흙이 되는 것 아닌가.’


올가을 엄마 도량엔 유달리 국화꽃이 만발했다. 아프기 전 같으면 엄마 성품처럼 정갈했을 마당이 높게 자라 고개를 떨군 커다란 국화 화분 세 개와 마음대로 자란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천연림 같았다. 커다란 국화꽃 화분이 대문 앞에서, 수돗가에서, 마당에서 흐드러져 눈길을 잡았다. 국화의 꽃말은 ‘고귀함.’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느 절이라도 대웅전 앞 탑 사방을 수놓고 있다.


오늘도 엄마는 엄마 도량을 지키고, 나는 내 도량을 지킨다. 나는 엄마와 아들의 삶이 아니라 혜광화 보살과 여산 거사의 삶을 들여다보는 게 적실하다고 생각한다.


텍스트 셋을 마련했다. 대한불교조계종이 2021년 사대부중을 위해 주요 불전을 쉽게 풀어 내놓은 <불교성전>이 하나요, 소설가 정찬주 선생이 편역한 <관세음보살본행경-관음보살이야기>가 둘이요, 지눌국사가 지은 <정혜결사문>이 셋이다.

keyword
이전 04화늙음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