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훈 스토리텔링 작가
나는 아홉 살, 여섯 살 된 두 아들을 둔 마흔 중반 허들을 넘어선, ‘나도 아비’다.
내 아버지는 11년 전 높고 푸른 따스한 가을날 한 줌 흙으로 가셨고, 내 어머니는 여든을 앞두고 땅바닥에 폭삭 주저앉아 하루아침에 중환자가 됐다. 정신은 멀쩡하시지만 몇 발자국만 걸어도 오금과 햄스트링(넓적다리 뒤쪽) 그리고 허리가 절단날 것처럼 고통스러워 이전과 달리 거의 잠자리에 누워만 계신다. 의사가 권해 수영장을 갈 때, 비타민D가 부족해 햇볕을 쬐러 갈 때, 화장실 갈 때, 식사할 때 등 함께 사는 누님의 도움으로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생활하신다. 그게 벌써 1년 반이 됐다. 어머니가 아프시기 전에는 곁에 있는 아버지만 애닯다(애달프다) 싶었다. 어머니가 저리 되자 어머니가 애닯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리우면 무덤가를 찾으면 되지만, 어머니가 그리우면 그저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한다. 찾으면 짐이고 고통이다. 나는 1년 반 동안 우리네 삶의 과정에서 극치의 아이러니 경험 중이다.
내가 내 사연으로 <소마틱 오디세이>를 시작하는 까닭은 내 현재 상태가 예사롭지 않을뿐더러, 지은이 우한용 선생님은 11년 전 먼저 흙으로 돌아간 내 아버지(소설가 심형준沈亨準‧ 1949~2013)와 지극한 예와 끈끈한 정으로 평생을 지내온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한용 선생님을 어린 시절부터 뵈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영국 총리의 손자로 태어나 7명의 총리를 ‘아저씨’라고 불렀다는데, 나는 소설가의 아들로 태어나 우한용 선생님을 내내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 꼬마는 이제 흰머리가 제법인 지천명을 앞두었지만 여적 나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정겹다.
나는 지금까지 우한용 아저씨의 작품집을 수권 봤다. 그중 <멜랑콜리아>는 지금의 아내와 연애할 때 나왔는데, 아버지 서재에 있던 책을 밤새 읽고는 다음 날 여자친구 손을 잡고 서점에 가 꼭 읽어보라고 선물로 주었다. <악어>, <소리숲>, <심복사>, <왕의 손님>, <수상한 나무>, <사랑의 고고학> 등도 나는 놀래가며 읽었다.
우한용 아저씨의 소설은 모두 쉽게 읽히는 대중소설과는 결이 다른 만만찮은 소설이면서, 지적 자극을 충동하는 묘한 매력의 소설이었다. 이것이 우한용 아저씨의 일관된 작법이고 내가 매 작품마다 가진 일관된 느낌이다. 무척 다양한 지혜와 지식, 그것들에 관한 유별난 통찰을 소설 속에 적실하게 놓는 건 우한용 소설가의 장기 중 으뜸 장기이다. 모르긴 해도 나는 우한용 소설가의 숨은 광팬(狂fan) 중 한 명일 것이다. ‘우한용 아저씨’ 소설이 이름만으로 친숙해서 읽었다가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우한용 소설가’의 실력에 매료돼 버린 것이다.
그러나 <소마틱 오디세이>는 이전 소설집과는 받아드는 감도가 전혀 다르다. 아저씨께서 페이스북에 연재한 이 소설을 거의 빼먹지 않고 읽었지만, 사실 나는 페북의 우한용 아저씨에는 관심이 덜하다. 아저씨가 막 페북을 시작했을 때는 아저씨 글을 열심히 읽었는데, 어느 날 새벽 ‘아, 내가 아저씨의 글을 너무 가까이하는 게 아는 건 문제가 있다’고 돌연 인식했고, 그 길로 아저씨 글에서 멀어졌다. 나는 내 나이 때 맞는 글을 써야 하는데, 아저씨의 글을 읽고는 아저씨의 색채가 내 글에 묻어나기 시작했다. 이건 내 스타일을 잃는 지름길이었다. 해서 나는 아저씨의 근황을 잘 몰랐다. 아저씨는 그러는 사이 내 페북을 찾아 ‘두 아들 잘 키우소’를 댓글로 남기곤 사라지셨다. 두 아들 키우면서 나도 ‘막둥이가 좀 더 자라면 상림원으로 한번 찾아뵈야겠다’는 막연한 기약만 해두었다.
그랬는데, 어느 날 새벽 아저씨가 암에 걸렸다는 걸 페북에서 읽었다. 그것도 재발이라는 걸 읽었다. 처음에는 충격이었다. 그땐 내 어머니가 건재했을 때다. 그러다 얼마 안 가 내 어머니도 주저앉으셨다. 노인이 되면 필히 주저앉거나 암에 걸리는 모양이다- 하고 충격파가 좀 가셨다. 석가가 고통을 주제로 사성제(四聖諦‧arya sacca)를 들려줄 때, 첫째로 고성제(苦聖諦)를 말했다는데, 그 뼈대가 생노병사(生老病死)이다. 나는 우한용 아저씨의 암 소식에 이어 내 어머니의 주저앉음을 통해 나는 고통, 늙는 고통, 병든 고통, 죽는 고통을 비로소 내 사유권(思惟圈)에 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소미틱 오디세이>를 이리 읽었다.(2편에서 계속)
/심보통 2025.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