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우한용 선생님은 ‘항암소설’이라 못박고, 소설 평설을 쓴 김지혜 교수(명지대)는 “드문 ‘노년 성숙소설’”이라고 규정했다. 평소 우 선생님은 당신 작품이 한 줄로 비정되는 것을 질색한다고 하셨다. 작품의 성격은 독자가 저마다 달리 볼 일이지 누가 비정한다고 비정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겠다. 그런 의미에서 유독 선생님 스스로 이 소설만큼은 ‘항암소설’이라 하겠다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평설가는 평설가대로 ‘노년 성숙소설’로 보았으니 우 선생님의 평소 소신은 또 한 번 실현되었다. 축하를 드려야 하나…. 여기에 보태 나는 내 독법에 따라 이 소설을 ‘경이로운 마디소설’이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이롭다는 ‘놀랍고 신기한 데가 있다’는 뜻이다. 유의어 중에 ‘쇼킹하다’가 놓여 있다. 어감에 놀랍고 신기함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물음표, 공백이 있는 낱말이다. 그 공백은 맥락으로 채울 수도 있고, 그 낱말을 떠올린 이의 주체적 관심과 적극적인 해석으로도 메울 수 있다. 물론 아예 물음표 자체를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우 선생님이 페북에 <소마틱 오디세이>를 연재할 때, 찬사와 추앙조의 댓글이 적이 못마땅했다. 우 선생님 글 실력이야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만큼 알 것이고, 단순히 암환자가 되어서 쓴다는 이유로 그런 조라면 차라리 우공이산(愚公移山)을 평생 업으로 산 우공(愚公) 선생님을 너무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예의 짝은 비례(非禮)다. 나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우공 선생님을 어릴 적부터 뵈었다. 아버지로부터 우공 선생님 이야기를 간간 들으며 살았고, 두 분 장시간 통화를 수도 없이 듣고 자랐다. 무엇보다 소설가 둘이서 말만 아닌 어떤 실천적 행동을 보였는지 지켜보면서 자랐다. 우공 선생님은 그저 우공이 아니라 정말이지 태산을 움직여 보이겠다는 작심으로 생을 일궈온 분이 아닌가, 내 아버지를 통해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내 아버지도 대쪽같은 성정의 어른이셨다.
무늬만 작가 말고 진짜 작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작가의 삶을 영위한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는 중에도 작가의 삶을 영위하고,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작가의 삶을 영위한다. 작가만 그럴까. 진짜 직업인은 그런 삶을 가꾸며 산다.
실력이야 상대적이어서 나을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고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내가 <소마틱 오디세이>을 두고 ‘마디소설’이라고 한 까닭은, 우한용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대체로 마디를 잘 긋는다. 마디를 잘 긋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길에서 의미 있는 부분을 잘 떼어 기억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에다가 소설가인 우한용 선생님이 마디를 못 긋는다면 아마도 지나가던 소가 웃을 것이다.
마디를 긋는다는 것은 자기 삶을 통제한다는 것이고, 통제할 줄 안다는 것이다. 마디 있는 삶은 쉬이 고꾸라지지 않는다. 선생님에게 암은 마디였을 것이다. 단번에 정리하고 넘어갈 의미있는 마디. 대나무의 마디는 텅빈 채로 20~30미터까지 자란다. 사람의 마디는 채움으로써 다른 공백을 남긴다. 마디는 어찌 되었든 긋고 넘어가야 한다.
‘마디소설’ 앞에 ‘경이로운’을 놓은 것은 찬탄과 추앙의 뜻이 아니다. 꼿꼿한 실천력을 대변하는 말이다. 여기에 “암환자이기에”라는 주제넘는 정적(情的) 감상 따윈 없다. 우 선생님의 글은 언제나 무척 교훈적이다. 선생님의 삶의 맥락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인간은 맥락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선생님은 평생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대중을 상대로도 하나 혹은 둘은 늘 가르쳤다. 이건 선생님이 내 아버지 출판기념회 때 그리고 내 형님의 결혼식 주례 때 말씀 내용으로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6년 전 내 출판기념회 때 선생님이 “가줄까”라고 하신 적이 있다. 나는 “안 와 주셔도 된다”고 했다. 내 기념회와 선생의 한말씀은 결이 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인은 항시 남을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한다. 이때 가르친다는 것은 삶에서 좋은 걸 몸소 일러준다 정도가 좋을 것이다. 더군다나 글 짓는 이는 능히 남을 계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걸 부정하면서 글을 쓴다면 그이는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고, 올곧은 글쟁이가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 될 터이다. 중요한 건 결국 몸소 보여준다는 것, 실천적 행위인 것이다. 말만 번지르르한 식자는 세상에 널렸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기꾼도 세상에 널렸다. 이때 식자와 사기꾼은 뭐가 다른가. 겉껍데기가 다르다. 속성은 나쁜놈으로 매같다.
그런 의미에서 <소마틱 오디세이>는 ‘경이로운 마디소설’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문장에 ‘우와! 우와!’할 것이 아니라 우공 선생님의 마디 긋는 법을 제 생명길에서도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다부진 마음을 세워야 옳다. 세운 다음 실천해야 옳다. 그 실천이 글(쓰기)일 까닭은 없다. 선생님은 선생님의 방식대로 마디를 그었을 뿐이다.
아마도 현대 소설가 중에서 ‘마디’를 이렇게 선명하게 새긴 이는, 새기고 간 이는 유일무이하거나 아주 드물 것이다.
선생님의 문장을 이야기하는 것은 후학으로서 비례(非禮)다. 선생님의 다른 마디를 기대할 뿐이다.
/대전 글방 궁고재(窮考齋)에서 심보통 2025.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