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향 김기오 선배의 퇴직

by 심지훈

지난 주말 김천을 가면서 김기오 선배께 전화를 넣었다. 김기오 선배는 영남일보 편집기자로 고향이 나와 같다. 선배께서 이달 31일부로 35년 신문사 인생을 마감한다고 알려주었다. 옛 기억이 소록소록 떠올랐다.

내가 영남일보 60주년 공채로 입사한 건 2005년이었다. 그해 영남일보는 새 사주의 새 시스템을 편집국에 안착시키는 중이었다. 분위기는 다소 어수선했다. 석간신문 시대를 마감하고 조간신문 시대를 연 것이 그해였다. 신문발행 시스템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신문사로선 엄청난 결단이었지만, 신문산업 흐름상 더 늦으면 죽음의 골로 드는 것이었기에 더는 미룰 수 없는 결정이었다.

이때 수습기자 교육방식도 바뀌었다. ‘취재기자도 편집을 알아야 기사를 잘 쓰고 신문을 안다’는 사주의 판단에 따라 루키들은 ‘최소 6개월 최대 3년간 편집기자로 일할 것’을 주문받았다.

수습 6개월을 마치고, 나와 동기들은 편집기자로 내근에 들었다. 8개월 뒤에 들어온 후배들도 그 수순을 밟았다. 그러나 펄떡이는 활어 같은 후배와 동기들은 6개월 만에 현장으로 나갔다. 그들은 편집 학습의 중요성보다 에너지를 발산할 공간성을 더 중히 여겼다. 그 나이는 대체로 그럴 때이기도 했다.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동향 선배이자 편집기자 김기오 선배의 조언에 따랐다. 김기오 선배는 일찍이 흰머리를 가졌다. 곱상한 외모에 흰머리의 선배는 선비 같은 이미지를 풍겼다. 늘 고전을 끼고 살았다. 실제 선배는 선비 같았다. 언행이 점잖고 무엇이든 조근조근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다가도 편집국 내 불편부당한 문제에 대해서는 대쪽 같은 심성을 내보였다.

그 김기오 선배가 그 좋은 기회를 뿌리치고 현장으로 나가는 신출내기들이 안타깝고도 한심했던지 “편집에 편 자를 알려면 적어도 대장을 1,000장은 뽑아봐야 한다. 그러려면 산술적으로 3년이 걸린다”며 “자네만큼은 3년을 다 채우고 현장을 나가면 좋겠다”고 충심으로 말했다. 나는 선배의 강렬한 눈을 보며 두 번 생각 않고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편집기자로 3년을 꼭 채웠다. 그 시간은 실로 값졌다. 나는 취재기자들의 기사를 갖고 편집을 하면서 좋은 기사와 나쁜 기사를 가리는 눈을 떴다. 그리 기사 쓰는 법을 절로 익혔다. 동시에 기사 아이템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내가 사회부로 발령나 현장으로 나갈 때, 김기오 선배는 ‘낭중지추(囊中之錐)’를 이야기했다. “자네는 편집을 잘했으니 취재도 잘할 걸세. 기대하겠네.”

김기오 선배의 조언과 기대에 힘입어 사회부에서 신통방통한 기사를 많이 내자, 변종현 현 영남일보 편집국장과 김기오 선배는 “역시 편집을 해 본 놈은 다르다”고 추어주었다. 그때 변 선배는 1면 편집 담당자였다. 보도방 아가씨가 손님에게 칼 맞아 죽은 사건이 터지자 보도방 아가씨들이 호신용 가스총을 갖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걸 증명하는 기사를 1면 톱으로 낸 아침이었다. 이건 종사자 특성상 인터뷰 자체가 성립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회부 기자는 불가능에 가까운 기사를 써야 능력이 있는 거였다. 나는 어디를 찔러야 보도방 아가씨가 내 앞에 와 술술 이야기를 해줄지 그 구멍을 알았다.

사회부에서 한창 일할 때, 이듬해 정기인사가 있기 일주일 전 사장의 호출이 있었다. 곧 있을 인사에서 신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담당자로 가 주면 좋겠다는 거였다. 선배는 무척 아쉬워했지만 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만날 새벽 6시 30분에 경찰서로 출근해 새벽 2시에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1년 가까이 하면서, 드는 노력에 비해 보람이 정말 없다는 걸 알고는 사회부 기자가 아니라 기자를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무렵 사장으로부터 연구원 제안을 받았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가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던 것은 층층시하의 편집국의 지휘 대신 곧바로 사장의 지휘를 받으면 된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리 4년차에 사장과 독대하는 기자가 됐다. 사장실 옆 회장실도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10개월 하면서 정상은 아니다는 걸 알았다. 기자로서 정체성은 옅어지고 사업부 직원인지 편집국 직원인지 스탠스가 모호했다. 그저 결과야 어떻든 돈을 모아오면 되는 식이었다. 서른, 앞길이 구만리인 내가 할 짓은 못 된다 여겼다. 이미 사회부에 있으면서 사직서를 2번 냈다가 자의 반 타의 반 철회했고, 이번이 3번째 사직서였다. 화투는 낙장불입, 인생은 삼세번. 그리 사표를 던졌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3년 뒤 아버지가 저 하늘에 오르셨다. 영남일보에서 김기오 선배가 편집국 직원들의 부의금을 챙겨 김천 장례식장을 찾았다. 참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땐 김 선배도, 옛 동료들도 챙길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 덕분에 낳은 첫 시집 <문인송 가는 길>을 낸 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5년 뒤인 2018년 여름이었다. 그제야 부조를 한 옛 동료들에게 마음의 빚을 다소나마 덜 수 있었다. <문인송 가는 길>에 서명을 하고, 짧은 편지를 적어 영남일보 편집국으로 보냈다. 연구원 시절 사수였던 백승운(현 문화부장) 선배를 통해서였다.

그간 김기오 선배와는 1년에 한 번꼴로 통화를 해왔다. 시간이 흘러 선배들 퇴직소식이 들려오면서 김기오 선배 퇴직은 꼭 챙겨야지 하는 마음으로 동향을 살폈다. 그랬는데, 지난 토요일 퇴직 소식을 접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새해 선배를 대구에서 뵙기로 했다.

35년…. 인생 모두를 건 신문사에서 선배는 노동법이 정한 퇴직에 이어 회사로부터 연장 제안을 못 받았으니 “잘렸다”고 했다. 더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회사가 그냥 “나가라”고 했단다. ‘잘렸다’와 ‘나가라’는 같은 말이다. 35년이면 무척 오래한 것인데도, 직장생활의 마감에 기쁨, 행복, 만족 같은 감정은 1도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괜스레 섭섭한 게 퇴직이다.

선배는 금전적 보상 대신 마지막 12월 한 달은 쉬기로 했단다. 아직 마음 수습을 해야 할 때라 느꼈다. 선배도 35년 전엔 수습기자였을 것이다. 35년 편집기자 인생을 수습하면, 아직은 젊기로 다시 수습인생을 시작해야 할 줄로 안다. “자넨 일찍 잘 나갔다”는 한마디가 큰울림으로 남는다.
/심보통 202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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