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나들이 후기

by 심지훈

요즘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맛집 후기’를 적지만 나는 그런 후기를 적어 본 일도, 적어야겠다고 생각해 본 일도 없다. 적는다는 건 남긴다는 것이고 남긴다는 것은 자랑삼겠다는 것인데, 먹고 자고 싸는 본능을 자랑하는 이는 사람이라기보다 동물이지 않은가 하는 낯뜨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나들이 후기’ 같은 것은 동물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인간만의 고도의 지적 행위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 나들이가 당대와 후대에 본이 될 만한 일이겠거니 싶으면 애써 적어 남겨야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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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했던. 머피의 법칙이 얄궂게 작동한 날이었다로 기억될 만한 그런 날 말이다. 어제가 그랬다. 어영부영하다가 대전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냅다 뛰었다. 동대구역에서 대전역으로 올 때도 플랫폼까지 내달렸다. 대전역에서 내려 버스정류장까지 또 질주했다. 모두 1~2분을 놓고 물리적 시간과 달리기 시합을 벌였다. 시간과의 시합에서 지지 않았다는 건 샐리의 법칙은 아닐지언정 그럭저럭 나들이를 잘 마무리를 지었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선방한 하루였다.


수년에서 십수 년 만에 친정 선배님을 만난 날, 나는 꼭 신입기자 때처럼 종종걸음을 놓았다. 선배님이 차로 마중을 나와 동행하며 내 행선지마다 데려다주어 버스나 기차를 탈 때처럼 뛸 일은 없었지만 나는 나대로 무척 바쁜 하루였다.


애당초 어제 나들이는 이근욱 선배님과 2년 전 한 약속에서 시작됐다. 근욱 선배님이 퇴직하고 얼마 뒤 동대구역에서 나를 픽업해 경산 대보식육식당을 데려가 돼지찌개를 사주셨다. 그 무렵 오뚜기에 입사한 아들이 아니었다면 진작 요단강을 건넜을지도 모르는 근욱 선배님이 큰 수술을 받고 입맛을 거의 상실했을 때 유독 이 식당 돼지찌개만이 넘어가 건강을 회복했다고 했다. 선배님의 입맛을 살리고 목숨도 살린 그 돼지찌개는 참말로 별미였다. 그날 점심을 하고 대구로 돌아오면서 1년 먼저 퇴직한 손동욱 선배님 근황을 나누다 “다음번에는 셋이서 한번 오지”라고 했던 일이 있다.


그 ‘다음번’이 어느새 2년이 흘렀다. 내 나이 마흔일곱. 내 나이에 이르면 개인사로, 가정사로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 점점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나처럼 전업작가의 삶을 살면서 스스로 꼿꼿한 정신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시간을 관리하지 못하면 그 인생은 머지않아 시원찮은 판에 놓이기 십상이다. 하나 어느 삶을 살든 내 나이에 이르러 소명이란 것, 사명이란 것을 갖고, 원대한 꿈을 잃지 않으면 제 삶 단도리에 몰입할 수 있다. 나는 아직 해야 할 일과, 가봐야 할 길이 아득도 하여 내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다.


하여 선배님들께 안부를 전하는 일도, 내 보이차 스승 운경 선생님과 나누는 즐거운 다담도 30대에 비해, 40대 초반에 비해 그 횟수와 시간이 확연히 줄었다. 나는 내 두 아들을 잘 건사하고, 아직은 세상살이에 눈을 좀 더 떠야 하는 아내도 잘 돌봐야 하는 가장이다. 이 일만으로도 하루가 빠듯하다. 내 본업인 글을 읽고 사유하고 짓는 일은 물리적인 시간을 당겨 써야지만이 그럭저럭 되는 형편이다. 내가 새벽형 인간이 돼버린 것은 노력이라기보다 차라리 운명에 가깝다. 그러나 나는 시시포스의 형벌에 놓인 지경은 결코 아니다. 내가 좋아 새벽형 인간이 되어 내 본업을 7시 20분 전에 일차로 마치고, 아이들 등교하면 또 이차로 즐긴다.


원래는 손동욱, 이근욱 두 선배님만 뵙고 날 밝을 때 대전으로 후딱 돌아올 생각이었다. 우리 라온이 바론이를 건사하는 게 그중 중하기 때문이다. 내 소임을 다 못하면 아내가 바빠진다. 아내는 바쁜 자리에 가 있다. 가장이 아내에게 짐이 되면 쓰겠나. 그러나 인간사 돌아가는 일은 늘 변수가 도사린다. 김기오 선배님 퇴직소식을 접했다. ‘언제 또 가겠나. 내려간 김에 손, 이 두 선배와 점심을 하고, 김 선배를 따로 봐야겠다.’ 그런 수가 돌았다.


여기까지도 비교적 가벼운 일정이었다. 여기서 잠깐, 기자의 루틴을 알아야 요해가 쉽겠다. 기자는 바지런해야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어느 직업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고 의문이 들겠지만, 현장 기자의 일정은 무척 빠듯하다. 특히 사회부 신출내기 기자의 하루 루틴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 기본이다. 어떤 날은 삼성 이재용이도 아닌데 저녁약속이 연속 3개일 때도 있다. 술자리까지 이어지면 체력전에 돌입해야 한다. 많을 때는 하루에 6~8개 약속을 소화해야 한다. 윤동주도 아니고 시인이 될 것도 아닌데 별 헤아리며 귀가하는 일이 다반사인 게 사회부 기자다.


나는 짧은 기자 생활을 마감하고도 이 루틴을 한동안 유지했었다. 마흔줄에 가까워 이 루틴을 깨버렸다. 체력적으로 달리기도 했고 내 삶의 환경이 바뀌어 더 지속할 수도 없었다. 내겐 심라온과 심바론이가 생겼다! ‘하루에 하나의 일정만 소화한다.’ 그 규칙이 선 이후로 나는 늘 여유가 넘쳐났다. 한국일보 재직 7년 동안 재택근무 중에 대구 볼 일이 있으면 볼 일을 빛의 속도로 끝내고, 나는 내 보이차 스승 운경 선생님과 늘상 8시간을 보내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그땐 선생님과의 시간이 그토록 즐겁고 중요했다. 기자를 탈퇴(?)한 이상, 내가 더는 사람 만나러 종종걸음을 놓을 까닭이 없었다. 그건 내 의무가 더는 아니었다. 나는 한 사람을 만나도 깊은 관계면 족했다. 내 파트너는 오직 운경 선생님뿐이었다.


어제는 대구를 갔는데도 운경 선생님을 못 뵙고 올 뻔했다. 다행히 김기오 선배님이 내가 청한 <보석다관>으로 오시겠다고 했다. 그리 선생께 4시 30분에 뵙겠다고 급히 전화를 넣었다. 그전에 1차로 손, 이 두 선배님과의 회포를 다 풀어야 했다. 대전 성심당 빵을 사다 드리면 좋을까 싶었는데 이놈에 성심당은 줄이 어마무시하다. 가만 생각하니, 며칠 전 수박물관 이경숙 관장께서 문자를 주었다. ‘펀딩한 향수가 나왔어요. 대구 오시는 길에 들러 받아가세요.’ 아내 말이 “향수는 호불호가 있고, 잘못 주면 오해를 살 수 있다”고 했다. 이 경우 내무부장관 말씀을 따르는 게 좋겠다 싶어 일전에 “향수는 안 받겠다”고 했는데, 이 관장으로선 펀딩한 고객에게 그럴 수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밥과 차는 선배님들이 번갈아 사실 테고 나는 뭔가 마음의 선물을 준비해야 할 터였다. ‘경산 가서 식사하고 차는 수 박물관 옆 커피숍에서 하재야겠고나’하고 수가 굴렀다. 이 관장께 급히 기별을 넣었다. 그리 향수 선물을 마련했다.


손, 이 선배님이 동대구역으로 마중을 나오셨다. 저 멀리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내 걸음걸이만 보고도 “저기, 심지훈이다”하고 손 선배님이 딱 알아보았단다. 스토리텔링연구원에서 한 조를 이뤄 1년간 경북도내 명소를 샅샅이 훑은 보람이 있다 싶었다. 경산을 오가는 차 안에서 그리고 점심을 하면서 또 대구에서 차를 마시면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과거지사를 이야기하고 오늘을 이야기하고 더러 내일도 이야기했다. 얄궂게도 돼지찌개는 못 먹었다. 대보식당은 최근 전현무가 하는 예능프로에 나온 바람에 장사진을 이루었고, 맞은편 다른 돼지찌개집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휴무였다. ‘두꺼비 추어탕’으로 갔다. 그곳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이제는 농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이근욱 선배님의 요단강 못 건넌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었다.


선배님 특유의 너스레에 경북콘텐츠진흥원 권경수 사무국장이 <대구 나들이>를 읽은 늦은밤 전한 말이 떠올랐다. “근욱(대건고 동기)이 참 좋은 친구입니다. 말하는 스타일과 특유의 너스레가 눈에 선하네요.” 그리 두 분 인연을 알고 안부를 전하겠다고 했다. “선배님들과 좋은 시간 보내시라”는 답신이 왔다.


수박물관 지척 커피숍에 차를 세우고 두 선배님께 잠시 기다려주십사 했다. 이경숙 관장께 뛰어갔다. 아무튼 뛰는 날이었다. 눈치 빠른 이 관장께서 포장해서 뒤따라가겠다고 했다. 3분 거리의 커피숍으로 도로 들어서자 이근욱 선배님이 눈짓을 했다. 참 버라이어티한 날. 대구한국일보 유명상 씨가 떡 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근욱 선배와 유 대표는 동향 친구다. 대구 사회가 이리도 좁장하다. 그리 얼떨결에 이제는 남이 된 유 대표와 인사를 나눴다.


잠시 후 크리우펀딩에 성공해 출시한 굿즈, 조만간 국립중앙박물관 굿즈숍에 입점할 그 향수를 포장해 이 관장께서 뒤따라왔다. 그리 두 선배와 서로 인사를 나눴다. 칸막이를 사이로 옛 동지 유명상 씨와 나는 아무렇지 않게 서로 다른 테이블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주구장창 이어갔다. 아마도 유 대표와 동석한 이 중 한 명은 디자이너 최복호 씨일 것이다. 내 눈은 작지만 시야는 대개 넓다. 유 대표는 3년 사이 살이 많이 쪘고 얼굴은 이전보다 안 좋았다.


오후 4시. 남자 셋이 오전 11시에 만나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것이다. 이 관장님은 6시 30분에 다시 뵙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파장. 근욱 선배님이 나는 <보석다관>에 내려주고 동욱 선배님은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보석다관> 주인장 운경 선생님이 색소폰 줄을 목에 찬 채로 반겼다. 잠시 근황을 나눴다. 곧 다관 광창으로 허연 머리의 김기오 선배님이 보였다. 책을 한 권 들고 있어 목사님 같기도 했다. 11년 만의 만남. 2시간 동안 운경 선생님이 우려주는 보이 숙차와 생차를 마시며 다담을 나누었다. 준비해간 <히데타다와 신문왕 이야기>를 드렸다. 선배님이 들고 온 책은 부러 내게 주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깐수 정수일 선생의 <해상 실크로드 사전>. 경북도문화관광공사 김남일 대형(大兄)이 2013년에 정수일 선생을 만나 펴낸 <실크로드 사전>과 한 형제다. 깐수 선생은 <해상 실크로드 사전>을 끝으로 사연 많은 이 생을 마감했다. 깐수 선생은 실크로드 어느 밤하늘의 별이 돼 있으리라.


김기오 선배께 보이차를 시연해 보일 수 있는 것은 행운이었다. 선배님도 퍽 만족했다. 선배님이 이경숙 관장께 데려다 주었다. 상주 칼국수집에서 한 그릇 8,000원 하는 뽕잎 칼국수를 먹으며 올해 5월 예정인 경북도문화관광공사 주최, 수박물관 주관 <어린이 민화 상상 사생대회> 계획을 들었다. 다 듣고 몇 가지 의견을 전했다. 대회명을 ‘어린이 민화 상상 사생대회’로 할까 생각 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말맛이 시원찮다 싶었다. “말맛이 별로에요. 어린이 민화 씽씽 사생대회라고 한다면 말맛이 살겠지만, 상상 뒤에 사생은 둘 다 밋밋해요. 민화를 보지 않고 상상해서 마음대로 그려 보는 대회라면 차라리 ‘어린이 민화 마음대로 사생대회’ 혹은 ‘어린이 민화 네 멋대로 사생대회’가 낫지 않아요? 아이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대회명도 20세기처럼 가지런히 놓지 마시고, ‘마음대로’ ‘네 멋대로’를 디자인적으로 도드라지게 해주고요.” 이 관장님은 “마음대로 사생대회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 관장님은 이 대회에 글쓰기를 병행하고 싶다고 했다. 자기가 그린 민화에 대한 생각을 적도록 하는 것이다. 참가 학생의 그림과 글을 모두 도록에 담고, 그 도록을 활용하게 한지를 삽지할 계획이란다. 우리 한지에 직접 그려봐야 민화의 맛을 알 수 있다는 것. 그런데 한지 값이 비싸 주어진 예산 갖고는 모자랄 판이라고 했다. 곧장 김윤식 신협중앙회장이 떠올랐다. 김 회장 찬스를 모처럼 한번 쓸까 하고 수가 돌았다. 한지가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1연이 100장인데, 1연이 필요하다고 했다.(한지 1연은 20장 아닌가?) 아무튼 한지 100장에 100만원 상당이라고 했다. 그 정도면 김 회장께 청을 넣어도 되겠다 싶었다. 서예가인 김 회장은 신협중앙회장을 8년간 2번 연임하면서 전주한지 살리기 운동을 적극 벌였다. 한지를 만드는 전주 흑석골을 지원하고 흑석골 일대 환경부 소유 산에 닥나무 숲도 조성했다.


“김 회장님께 전화를 한번 넣어 보겠습니다.”


그랬는데, 이 관장께서 신협중앙회장이 새로 선출됐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관계자인 나도 몰랐는데 참 별걸 다 안다 싶었다. 아마도 김윤식 회장 임기가 2월말이면 끝나는 터라 좁장한 대구 사회에 뉴스로, 정보로 나돈 모양이었다. 신임 회장을 검색해 보니, 어느 판으로 돌아갔는지 싶게 새 인물이 당선됐다.


이야기는 이어졌다. 글쓰기는 초등 1~6학년 공통이라고 했다. ‘초등 1~2학년 남학생이 글쓰기가 되려나.’ 다른 수를 내야지 싶었다. “글쓰기를 넣는 건 좋은데 3~6학년은 몰라도 1~2학년 아이는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럼 난감해할 터이고. 그림은 심사 대상이니 아이 혼자 그리게 하고, 도록용인 글쓰기는 부모가 함께 하도록 하면 무난하게 결과가 나올 것 같네요.”


뭐 그런 이야기를 내가 ‘어린이 민화 마음대로 사생대회’ 추진위원도 아닌데, 시답잖게 개진했다.


나는 우리 민화, 한복, 자수에 대한 관심이 많다. 내 관심을 잘 아는 이 관장께서 세상에 하나뿐인 <한복세상 한복특강 강의 자료집>을 제본해 주었다. 최근 포항에 경북도문화관광공사의 산업유산 유네스코 등재 추진위원 워크숍에 갔다가 대구에 들러 잠시 뵈었을 때 소개해준 자료집이었다. 제본을 해주겠다고 했는데 잊지 않고 준비해 두었다. <어린이와 외국인을 위한 민화 교수법>도 함께 주었다. 난 이미 ‘어린이 민화 마음대로 사생대회’ 추진위원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글 부문 심사위원인가.


이 관장께서 동대구역으로 배웅해 주었다. 또 1~2분 차였다. 플랫폼까지 냅다 뛰어 기차에 올랐다. 대전에 도착해 버스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택시를 탈까 고민하다 내려서는 버스가 집과 가깝다 싶어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5분 뒤 도착이었다. 제법 거리가 있어 또 한 번 시간과 달리기 시합을 벌였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다.


집에 막 들어서자 김기오 선배님이 옆에서 본 양 장문의 문자를 보내오셨다. 과분한 선물을 받았다고 하셨다. ‘선배님 오늘 하루 제 두 발은 신입기자 때마냥 무척 바빴고, 제 작은 머리는 오랜만에 무척 많은 수를 놓아 어찔어찔했습니다.’ 이리 보내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손, 이 두 선배는 내가 김 선배를 만나는 걸 알았지만, 김 선배는 내가 경산에 볼 일 때문에 온 정도만 알았다.


집에 와 가만 생각하니, 또 한 번 대구 나들이에 나서야 한다. 이제쯤은 김윤식 회장을 한번 뵈어야 한다. 김 회장께 드릴 이임 선물은 뭔가 특별나야 한다. 또 수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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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간 관계를 어찌해야 좋은지를 직간접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내가 인연을 이어가는 선배들은 딱 세 부류다. 의리파이거나 소신파이거나 인정파다. 이근욱 선배는 내가 영남일보를 퇴직했을 당시엔 다른 부서의 별 인연 없는 그저 회사 선배였다. 그 선배가 느닷없이 점심을 하자며 그 더운 여름날 우리집에 두 번 찾아왔다. 그땐 만날 보던 후배도, 동료도, 선배도, 취재원도 연락이 하루아침에 닿지 않던 때였다. 그 민심 이반을 겪어보지 않은 이는 내 참담한 심정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근욱 선배를 의리파라고 생각한다. 그리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손동욱 선배는 인정파다. 온화하고 섬세한 분이다. 어제 듣자니 내 결혼식 때도 “가겠다”고 했는데, 축의금을 챙겨 온 내 사수였던 백승운 선배가 한사코 “선배는 오실 필요 없다”고 해서 그만두었단다. 이하석(현 대구문학관 관장) 고문도 오셨는데 백 선배가 왜 그랬을까, 피식 웃음이 났다. 언제고 한번은 물어볼 참이다. 손 선배는 조용히 여적 나를 돕고 있다.


11년 전 아버지 부의금을 들고 온 이는 김기오 선배다. 선배는 편집기자인데, 편집기자는 저녁 시간이 피크다. 그 빠듯한 시간에 동향 후배라고 대표로 부의금을 챙겨 온 걸을 보고 참말 눈물겨웠다. 나는 그 고마움을 어제 겨우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었다. 네 아이를 둔 외벌이 선배께는, 술을 끊은 선배께는 식사도, 술도 권할 수 없었다. 그리 권한 게 보이차였다. 선배는 인정파면서 소신파다.


언제든 너른 품으로 반겨주는 <보석다관>의 운경 양보석 선생은 의리파면서 소신파다. 내 짧은 생에 운경 선생과 인연이 닿고 스승으로까지 섬길 수 있는 건 애오라지 하늘의 뜻이라 믿는다. 선생께서 내게 베푼 은혜는 아마도 내 평생 다 못 갚을 것이다.


수박물관 이경숙 관장은 어제 놓인 칸막이 양옆으로 다른 테이블에서 각자 다른 이야기를 나눈 옛 동지 유명상 씨 덕분에 닿은 인연이다. <대구한국일보 시민기자 양성과정>을 하도 시원찮은 잡지만을 시종 내기에 대안으로 내가 제시했고, 그걸 엉뚱한 방향으로 잡아 이끌어 망가뜨린 게 유 대표다. 나는 기자보다 뛰어난 시민기자 10명을 양성하자고 했는데, 유 대표는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시민기자를 1,000명이나 만들어냈다. 이경숙 관장은 흡사 옥석 1,000개 중 유일하게 건져낸 옥이다. 이경숙 관장은 인정파면서 남들은 알아채기 힘든 강단 있는 소신파면서 여자로선 드문 의리파다. 그가 보이는 대로 순한 이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옛 동지 유 대표와 나는 애증이 좀 있다. 커피숍을 떠나 <보석다관>으로 이동하면서 유 대표한테 인사하는 걸 깜빡했다. 증은 증이고, 예는 예다. 다관에 도착해 “평안하시라” 문자를 넣었다. “지훈씨도 새해 행복하세요”라고 답이 왔다. 내가 손, 이 두 선배 앞에서 칸막이 너머 유 대표 들으라고 그랬다. “최근 박재일 선배께서 다시 영남으로 돌아오라고 하시던데 그냥 안 될 말이고,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저는 영남 대신 대구한국일보를 택하겠습니다. 왜냐 거긴 제 마음대로 제 뜻을 양껏 펼칠 수 있는 공간은 되거든요. 거긴 0에서 하나씩 일으켜야 하는 곳입니다. 단 저 유 대표가 개과천선을 하고 바른길로 가겠다는 다부진 마음을 갖는다면요. 헌데 그게 되겠습니까.” 나는 유명상 씨가 어떤 인간인지를 잘 모르는 게 아니라 어떤 유형의 인간으로 분류해야 할까를 잘 모른다. 나처럼 칼 같이 재단 잘하는 이가 유보한다는 건 둘 중 하나다. 논할 가치가 아예 없든지, 아니면 그 깊이를 헤아리기엔 내 내공이 부족하든지.


세상에는 깐수 선생 같이 드라마틱한 삶을 일구다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유명상 씨 같이 참 난망한 삶을 일구다 가는 이도 있다. 세상은 이래서 요지경.

/심보통 20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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