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 파티

by 심지훈

아모르 파티


이번 주말이면 라온이가 겨울방학에 든 지 꼭 3주가 된다. 라온이가 방학에 들면 내 스케줄은 대개 멈춰 선다. 일단 새벽 글짓기는 좀 놓아야 생활이 된다. 라온이 일상에 맞춰 에너지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글 짓는 일과 라온이와 일상을 함께하는 일 중 에너지가 더 드는 건 아무렴 글 짓는 일이다. 때문에 새벽에 에너지를 쓰고 이어 오전부터 라온이와 함께 하는 일은 무리가 따른다. 둘 중 하나를 뒤로 미뤄야 한다면 지금은 글 짓는 일이다.


라온이는 어느새 열 살, 3학년을 앞두고 있다. 신학기 준비로 국어, 영어, 사회, 과학 교과서를 한번 훑어보고 있다. 라온이는 1~2학년 때 국어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3학년 때 가장 기대되는 과목은 체육, 음악, 도덕이라고 하고, 가장 부담되는 과목은 역시나 국어를 꼽았다. 라온이는 여느 또래 아이들과 달리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집에 함께 할 수 있는 아빠가 항시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라온이와 아빠는 많은 걸 함께 하며 갖은 추억을 쌓고 있다. 반면 어린이집 때부터 관심 없던 영어의 경우 아직 알파벳을 익히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도 영어는 아빠랑 하니까 어렵지 않을 것 같다고 하고, 사회 과학도 목차를 보더니 할 만할 것 같다고 한다.


나는 내 일상이 라온이 일상 쪽으로 무게가 더 실릴 때면 ‘아모르 파티’를 생각한다. 김연자가 부른 <아모르 파티>가 아니라 니체가 말한 “Amor fati”를 떠올린다. “운명에 대한 사랑” 혹은 “운명을 사랑하라”로, 김연자 덕에 우리 사회 널리 알려진 이 말은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니체는 말했다.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큰 결례는 자신의 삶이 가진 재료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살다 보면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가, 내가 꼭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할 때가, 내가 꼭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할 때가 왕왕 생긴다. 그럴 때마다 속상해하고 화내고 뚱하게 지낸다면 그건 니체가 보기에 삶에 대한 결례다. 니체가 보기에만 그런 게 아니다.


실상 인간은 누구나 하루 24시간을 평등하게 갖는다. 이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할 때, 쓸 수 있는 시간을 계획대로 쓴 것에 자족하는 일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쓸 수 있는 시간을 부득불 다른 곳에 써야 할 때, ‘내 삶이 가진 재료를 미워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걸 해낼 때 인간은 후회를 덜 남기고, 전화위복할 수 있다.


당장 뜻대로 안 된다고 조급해 마라. 그 빼앗겼다고 느낀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그다음 다시 찾은 자기 시간을 근면·성실하게 써라. 그렇게 해도 대세엔 지장이 없다. Amor fati! 진정 운명을 사랑하라.

/심보통 202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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