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 중히 느끼는 한마디

by 심지훈


‘까불지 말자.’

나이가 찰수록 나는 이 말을 참 중히 느낀다.

까불면 다치기 쉬운 나이가 사십대다.

까불면 사람들에게 소외되기 쉽고

까불면 자기 몸 다치기 쉽고

까불면 가족을 포함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내가 두 번째 신문사에 재직할 때

제일 싫었던 게 월례회의였다.

회의여서 싫었던 게 아니라

회의를 장난스레 주도하는 대표 때문에 싫었다.

나는 월례회의에 가서 입을 연 일이 손에 꼽을 정도다.

봉숭아학당은 차라리 고급 코미디라기도 하지,

그 회사의 월례회의는 대표라는 자가

직원들을 알로 보고 유머를 한 편씩 발표하게 만들었다.

그래야 회의가 부드럽게 잘 된다나 뭐래나.

하지만 그 회의는 늘상 B급 복숭아학당이었다.

주구장창 대표 이야기로 꾸며졌고,

그 대표 이야기란 것은 순 사이비기자나 뱉을 수 있는 얘기였다.

차라리 대놓고 “우리 돈 좀 법시다”하는 게

사내로서, 백척간두의 경영자로서 나았을 것이다.

거짓과 위선과 기만과 오만과 독설로 가득한 그 회의는

결국 까불대기 자랑으로 채워졌다.

대표가 체로 일관하니

능구렁이 기자들도 체로 일관한 것이다.

그리 결론은 없고 무성한 말잔치로만 끝나기 일쑤였다.

대체 왜 이런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인지

나는 지금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자리에서 입을 뗀다는 건

나 또한 B급 인간이 되는 것이어서 함구로 일관했다.


인간은 말을 않고 살 수 없다.

말은 감정을 수반하고

감정이 실린 말은 여러 맥락을 만들어 낸다.

그 맥락은 진중하고 진실된 말일 때만 제대로 선다.

까불락대는 말은 까불락대는 행동을 낳고

엉뚱하고 시원찮은 맥락을 양산한다.


내일을 보고 살고, 뒤를 보고 사는 사람은

절대 까불지 않는다. 아니 까불지 못한다.

당장 자기 몸 상하는 이치를 알고

타자에게 폐 끼치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마흔 넘은 자나 못 미친 자나

마흔 들어서도 점잖지 못하게

까불락대는 자와는 가까이하지 말라.

그런 자를 친구로 둔 자 역시 거리를 두라.

끼리끼리 논다고 그런 자들과 엮이면

끝끝내 뒤끝이 좋지 않다.


나이 들면 얼굴값 나잇값 체신값 등등

해야 할 값이 의외로 많아진다.

그걸 잘 못하면 ‘꼴갑 떤다’는 말을 듣게 된다.

‘에이, 설마’라고?


앞에서 듣는 말만 말의 전부가 아니다.

등 돌리면 그런 말에 비수가 쏟아진다.

까부는 자, 너만 그걸 모른다.

까불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