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아 책이 점점 얇아진다는 뉴스를 봤다. 읽지 않는다는 건 모호하거나 중의적 표현이다. 누가와 얼마가 생략된 비문이다.
‘누가’는 하기 쉬운 말로 대중일 것이다. 대중으로 바꿔본들 명쾌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대중은 무변대해처럼 특정하기 힘든 수다.
‘얼마’는 몇 쪽짜리 분량을 대중이 안 읽는다는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대중을 상대로 한 책들은 크기가 규격화돼 있다. 그 책의 볼륨도 비슷비슷하다. 그게 대중의 선호라고 출판사들은 인식한 듯하다.
책의 두께는 성인책 기준으로 300~320쪽 내외다. 대중이 선호한 책은 오랫동안 이 정도의 두께였다. 이 책을 읽지 않아 점점 얇아진다는 것은 대중이 이 선호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면 대중은 몇 쪽 분량을 선호한다는 것인가. 100쪽 내외라는 게 뉴스가 전하는 내용이다. 뭐 기가 차다고 할 건 없다. 읽는다는 건 분량이 아니라 횟수가 더 중요하니까.
글은 읽는 것이든 쓰는 것이든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여간해선 잘 드러나지 않는 영역이다. 중간에 멈추면 허사인 영역이다. 그러나 지속하면 저도 모르게 여실히 드러나게 돼 있다.
읽는 일과 쓰는 일은 둘 모두 은근과 끈기를 필요로 한다. 좋아한다고, 흥미가 있다고 지속할 수는 없다. 둘 모두 강단과 결기가 선행돼야 지속할 수 있는 일이다.
독자들은 작가의 강단과 결기와 은근과 끈기의 결과를 볼 뿐이다. 그렇다고 모든 작가가 세상 빛을 보는 것도 아니다. 어떤 작가는 그런 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무너지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살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자기만 보고 살아가기도 한다.
책의 분량이 늘어난다거나 혹은 줄어든다거나 하는 변화 뒷면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아주 냉랭한 표정을 지은 채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작가도 먹고살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출판사가 먹고살아야 한다.
출판사와 작가와 관계는 대개 출판사가 갑이다. 무명작가에게는 필연적으로 작동되는 메커니즘이다. 책을 안 내본 사람은 책 내는 게 무슨 벼슬처럼 느껴져 출판사의 부당한 요구를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흔한 게 인세를 주지 않는 것이고, 되레 출판 비용만큼의 책을 사가져 가라는 요구다. 일종의 떠넘기기다.
나는 책을 사기 위해 구태여 서점을 찾지 않는다. 요즘 책들은 책의 정신을 잃었다. 팔리면 된다는 목적 아래 겨우 포장지를 예쁘게 꾸미는 수단을 갖고 흥정하려 든다. 누가 성형공화국 아니랄까봐 책에까지 성형술을 들이대고 있다.
요즘 책은 표지가 화려하다. 화려한 중에 팔랑팔랑 가볍다.
그런데 책의 정신은 애시당초 출판사가 잃은 게 아니다. 이름 있는 작가들조차 책의 정신을 인세 몇 푼에 팔아넘겼다.
미국이나 유럽 서점을 가봐라. 책 표지를 치장하는데 에너지를 과하게 쓰는 건 한국 책의 유별난 특징이다. 미국의 책들은 그저 누런 갱지에다 표지는 단출하다. 메인 주제만 전달한다. 그런데도 책값은 비싸다. 책 내용을 자신다는 뜻이다. 독자도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책들은 외환위기를 기해 정신을 거세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마음의 심층까지 파고들었다면, 외환위기 이후에는 마음의 표층만 갖고 재잘댄다.
그래서 나는 필요한 주제의 책을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구한다. 외환위기 이전의 관점과 깊이를 요즘 책들은 갖지 못한다. 외환위기 이전 책이 읽을 만하다면 그 이후 책들은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것이 태반이다.
외환위기 이후 책들의 유용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영미권의 번역서는 필히 요즘 걸 봐야 도움이 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책을 내기 위해 구태여 출판사를 찾아다니지 않는다. 굳이 내 글을 책으로 묶어낼 욕심도 없다. 책을 한 권 낸다는 것은 책 속에 담긴 그 좋은 말의 성찬과는 별개로 지구를 아프게, 더럽게 행위가 된 시절이기 돼버렸다. 이 점, 작가라면 엄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나는 내 글들을 책으로 낼 요량으로 지은 적이 없다. 이 좋은 사이버세상에서 마음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면 족하다.
내가 지은 글을 책으로 냈으면 한 건 내 글을 읽은 독자들이었다. 독자가 원하는 일을 외면할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출판사를 소개해주겠다는 분들도 있었다. 나는 회의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온 답변이 “그 작가가 정우성이나 김제동 정도의 인지도가 되는 사람이냐”는 거였다.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왜 그런 딴따라들과 비교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건가.
제법 이름 있는 출판사였는데, 그런 출판사의 대표조차 글을 보는 게 아니라 유명세를 따져 책 팔아먹을 생각만 하는 거였다.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나는 두꺼운 책을 내 손님들께 선물하고 싶었다. 1000쪽짜리 책은 돼야 소유할 만한 게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을 품은지 오래다. 앞으로도 기획작품이 아니면 온전히 내 스스로 생각해서 쓴 책은 1000쪽짜리들 뿐일 것이다.
분량은 달리 말하면 작가의 성의이자 성실이다. 그리고 작가의 진정한 힘이다. 세상 모든 책은 필요에 따라 읽는 것이지 무턱대고 1쪽부터 끝쪽까지 읽는 게 아니다.
그런데 흡입력을 갖춘 책은, 근기 있는 독자라면 기꺼이 독파하고 마는 게 책이 가진 마력이다. 달리 작가와 독자 간 궁극의 합일 상태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책들의 평균 분량이 300쪽 내외인 것은 독자의 선호보다 실은 더 이상 쓸 내용이 없기 때문인 경우가 태반이다. 여기엔 원재료의 변변찮음과 작가의 내공이 결부돼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지성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가령 한평생을 글공부만한 대학의 교수라면, 그래서 명예교수를 달았다면 장난치듯 300쪽짜리 책만 낼 게 아니라 1000쪽짜리 책쯤은 시리즈로 10권씩은 낸 뒤에 유명을 달리해야 단다고 본다.
글공부는 하다 보면 통섭이 되는 분야다. 연륜과 경륜이 보태져 자기 분야에서 1000쪽짜리 책 한 권을 요리하지 못한 사람이 무슨 ‘명예’라는 감투를 쓴단 말인가, 그 명예의 실상은 불명예가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제대로 공부는 안 하고 시간만 채운 명예가 무슨 대수인가.
자기 전공을 만 가지 전공과 적절히 섞어서 재미있게 보여줄 수 있어야 진정한 석학이다. 그런 교수가 우리나라엔 없다.
소설가들 중에는 상당한 내공을 가진 이들이 더러 있다. 이문열, 고 박경리, 고 최인호 선생 같은 분들은 한국의 보물들이다. 근년에는 이런 대작을 선보이는 작가가 보기 힘들어졌다. 시류도 시류지만 그런 글공부를 해본 작가가 없어서, 그만큼 토해낼 아픔과 경험을 가진 작가가 없어서라는 게 내 판단이다.
이런 중에 소설가 허태연의 신작 <중고나라 선녀님>이 보기 드물게 1000쪽을 넘겼다.
시류를 따르는 작가, 깊이 공부하지 않는 작가는 제아무리 뛰어난 문재(文才)를 지녔어도 오래가지 못한다. 작가(作家)는 글로 집을 짓는 사람인데, 대한민국 아파트 같은 개성 없는 집을 지어서 어디에 쓰겠나. 온전히 자신만의 개성 있는 집을 지어야 옳은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