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는 요즘 전 4권 1500쪽 분량의 대하소설 <산하>(이병주 作)에 빠져 있습니다. 이 삼복더위에도 읽던 책을 전부 뒤로 하고 깨알 같은 글씨의 1991년판 <산하>를 읽기로 마음먹은 것은 얄궂은 이유가 있습니다.
최근 MBC가 보도한 뉴스 하나를 우연히 봤는데 가뜩이나 이게 뭐가 뭔지 납득이 되지 않던 터에 그 뉴스의 주인공이 저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의 사연을 보면서 유주현 선생의 <조선총독부>를 읽을까, 이병주 선생의 <산하>를 읽을까 고민하다 손이 먼저 간 <산하>를 읽기로 했습니다. <산하>를 다 읽으면 일제 36년을 다룬 <조선총독부>(전 5권)를 읽어 볼 참입니다.
<산하>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 가도를 달리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중심축으로 놓고, 이 나라가 어떤 과정을 통해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이룩했는지 역사(=실록)를 바탕으로 풀어낸 역작입니다.
2.
아마도 대한민국 언론인이라면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하 방통위원장)’이란 직책을 마다할 인사가 없을 것입니다. MB정부 때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만사형통(萬事兄通·이명박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을 빗댄 말)’과 더불어 ‘넘버2’였습니다. 그만큼 방통위원장은 막중하면서도 막강한 자리입니다.
그 방통위원장에 이진숙 전 대전MBC 사장이 내정됐습니다. 오늘 청문회가 있는 날일 겁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이동관, 김홍일 방통위원장이 탄핵 표결을 앞두고 내리 사퇴했습니다. 그 바통을 이진숙 씨가 이어받았습니다. 이 씨의 여정도 녹록지 않을 겁니다.
이 씨는 MBC 재직시절 이라크 종군기자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매체의 성향을 따질 때 좌로 치우친 MBC의 내력을 보면 이진숙은 민주당 인사여야 맞을 겁니다.
그녀는 2022년 대구시장 선거 때 국민의힘에 공천 신청을 했다가 고배를 마셨습니다.
3.
제가 봤다는 MBC 뉴스에는 대구 사람 표명관 씨가 등장합니다. 표명관 씨가 뉴스의 주인공이 된 것은 방통위원장 내정자 이진숙 씨 때문입니다. MBC가 이진숙 씨의 지난 대구시장 출마 때 고액후원자를 살폈더니 표명관이란 사람이 나오고, 표 씨의 내력을 살폈더니 그가 극우 인사라는 것입니다.
MBC의 의도는 공정해야 할 방통위원장이 극우 인사와 어울린 것은 물론 그로부터 후원을 받았으니 문제가 있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입니다. 이미 이진숙 씨 자체가 극우 인사로 분류돼 있는 상황이니, 생채기를 내기 위한 기사로 보아도 좋겠습니다.
MBC는 자기 회사 출신의 이진숙을 비토 중입니다. 물론 이진숙은 MBC 재직시절에도 MBC내 야당으로 알려졌습니다. 대표적인 게 MBC 민영화 찬성입니다.
2022년 대구시장 선거 때 이진숙은 제게 페이스북 친구를 신청했습니다. 얼마 뒤 표명관 씨가 제게 전화를 겁니다. 이진숙이 자기 친구인데 우리 심 작가님이 내려오셔서 도와주면 좋겠다는 거였습니다. 대구시장 선거판에 들라는 건데, 저는 그때 표 씨가 ‘이 사람 정체가 뭐지?’하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표 씨는 일단 대구 달성에 사업체를 가진 사업가고, 동서양 사상서를 열심히 읽는 사람이고, 독특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고, 독고다이 기질이 농후한 사람이고, 노선을 따르기 보다는 인물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MBC 보도로만 보면 그는 극우 인사로 보아도 무방한데, 그의 10년 내력을 보면 MBC 보도는 ‘유치원생 보도’에 불과합니다.
4.
표명관 씨는 정치 철마다 대구시장으로 출마한 진보당 후보를 도왔다가, 민주당의 김부겸 씨가 국회의원에 출마하자 김부겸 씨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다 지난 대구시장 선거에선 국민의힘 이진숙 후보를 후원하며 제게 도와달라고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과거 이력을 알고 있던 제가 표명관 씨를 신뢰할 기반은 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그가 별안간 몇몇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좌파,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싸잡아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이진숙 씨가 대구시장에 출마하기 이전이었습니다.
사연을 얼핏 보니 그의 아버지가 남로당 이력을 가진 분이고, 그는 그런 가정에서 자라 누구보다 공산주의자의 행태를 잘 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아, 유다른 집안의 아들이구나.’
그 정도 생각을 가지면서도 ‘허면 그 이전에 그가 보인 정치이력은 뭐지?’하는 의구심이 잠시 생겼습니다만, 그와 인연이 깊지는 않았던지라 그런가 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진숙 캠프에 들라는 표명관 씨의 몇 차례 전화를 물리다가 표명관 씨에게 정치적 노선이 다르니 더는 연락을 하지 말라는 입장을 전했고 이진숙 씨와도 페친을 끊었습니다.(게다가 저는 개인적으로 이진숙 씨 같은 선머슴도 아니고 박하달까 하는 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최근 성형한 모습은 더 싫습니다.)
표명관 씨와도 관계를 끊었습니다.
저는 극우니 극좌니 하는 걸 떠나 정치의 극단적 행태가 싫었던 겁니다.
그런데 2024년 현재, 우리 사회는 거짓말처럼 어떤 환영처럼 극단 사실주의로 치닫고 있습니다. 저는 이 극단의 뿌리가 행방정국과 일제강점기로부터 왔다고 보아 좀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어 <산하>와 <조선총독부>를 읽기로 한 것입니다.
스텝이 꼬여도 한참 꼬인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8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극우뿐일까요?
5.
이러고 있다가 오늘 아침 빅데이터전문가로 다음소프트 부사장을 지낸 송길영 씨가 쓴 <그냥 하지 말라>는 책을 1,000원 주고 사왔습니다.
서문을 읽어봤더니 ‘이놈 이거 순 약팔이구만’ 싶어 덮으려다가 이 ‘사’ 자는 또 어찌 약을 파나 싶어 인내심을 갖고 100쪽까지 읽어봤습니다.
전통과 가치관이 급격하게 무너진 사회, 기존 상식을 허물지 않고는 못버길 것 같은 사회를 빅데이터로 설명하는 책.
다중의 힘, 변화, 수용, 공감, 교류… 이런 키워드가 읽혔습니다.
빅데이터라는 게 SNS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 대중의 관심어를 다량으로 추적해 대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다음 스텝을 예측하는 것인데, 송길영은 자기가 해보니 만트라 같은 운명론, 소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법칙이 발견되더라는 겁니다.
그냥 읽으면 그럴싸한데 곱씹으면 다중이 만들어가는 세상이 늘 옳으냐 하는 문제는 관심 밖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해서 약을 파는 부류라고 보여진 것입니다.
송길영 식으로 ‘극우’와 ‘극좌’를 변화와 연관 지으면 어찌 될까요? 극우와 극좌가 다중의 관심이라면 응당 극우 혹은 극좌로 가야 하는 겁니다. 물론 송 씨는 이렇게 항변할 겁니다. 자기가 말한 욕망의 전제는 언제나 선의를 위한 욕망이어야 하는 것이니 극우와 극좌는 잘못된 변화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변화야말로 송 씨가 주목하는 다중(의 힘)이 아니면 태풍 속 찻잔에 불과합니다.
저는 왠지 송 씨가 다중세(多衆勢)를 등에 업고 우리 사회에 싼티나는 처방전을 마구 날리는 돌팔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난세에 정말 할 일이라면 이 난세의 뿌리를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어떻게 이룩한 나라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지, 어설픈 과학주의에 기대 ‘틀 지워진 변화’를 갖고 그 방향이 옳다고 부추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6.
근원 탐구에서 얻은 답이 극우라면 우리는 유약하기만 한 중도와 숙적 극좌를 상대로 80년 전과 같은 피 터지는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를 ‘미래 수업’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미래 수업은 오늘 학습해야 효험이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와 닿아 있고 오늘은 내일로 이어집니다.
송길영은 이 난세에 다중이 가는 길을 따를 것을 종용합니다. 저는 주도면밀하게 살펴 옳은 길을 힘을 모아 내서 가자는 쪽입니다. 다중은 늘 옳지 않습니다. 늘 옳을 리도 없습니다.
송길영의 책에서 거둬들일 단어로는 하나가 반짝입니다. ‘이종 교류(異種交流).’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난세의 묘법을 찾는 일은 누구라도 해볼 만한 일입니다.
<산하>를 다 읽으면 대한민국 정통성 이야기를 지어 나눌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