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기질

by 심지훈

*광복 79돌 하루 전 해방정국을 다룬 소설 <산하> 2권을 읽다가 8장 ‘악의의 선풍(續)’ 한 대목(pp325~328)을 필사해 나눈다. 이 시절을 살아봤다고 해서 이런 글을 아무나 쓸 수 있겠는가 경외(敬畏)하면서.

동식은

“자네들은 단정(單政·남한 단독정부)을 지지하는가 또는 반대하는가?”하고 차례대로 물어보았다.

“지지도 반대도 안해요.”하는 답이 있었다.

“지지하지만 나서서 운동하긴 싫어요.”하는 답도 있고 그 반대를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지지를 하든 반대를 하든 정치의 열풍 속에서도 교실에 남아 있을 정도의 학생들이고 보니 그 다섯 명에겐 공통되는 기질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동식과 비슷한 기질이다. 내성적이고 학구적이며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런 기질이다. 모두들 학자가 될 수 있는 소질의 소유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하고 묻는 학생이 있었다. 그런 학생들이 상대이고 보니 동식은 솔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양심적으론 김구, 김규식 양선생의 태도가 옳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공산당에 동조하는 결과가 되지만 그렇진 않다. 공산당은 아무래도 무슨 저의가 있는 것 같다. 단정을 반대하는 목적과 동기에 불순한 것이 있는 것 같애. 하여간 김구, 김규식 양선생의 의견과 태도를 지지하긴 하지만 나도 아까 어느 학생이 말한 대로 나서서 활동하기 싫어. 그러니까 결과적으론 단정의 수립에 굳이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선생님은 그런 태도를 철학자로서 옳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느 학생의 질문이었는데 그 물음은 진지한 것이었다. 빈정대는 투가 전연 없었다.

“나는 기껏 철학도일 뿐이고 철학자로서 자처할 순 없으니까 철학자의 태도를 말할 순 없어. 그러니 아까의 말은 내 기질이 그렇다는 얘기지 다른 의미가 없어.”

그러자 철학도로서 이 시국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 문제를 토론해보자는 제안이 있었다.

“유일한 철학이라야 한다, 또는 철학은 꼭 하나라야만 한다는 전제를 세울 수 없으니까 철학도의 태도에 관해서 일반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철학도라고 해도 그것은 육신의 인간이다. 그러니 갖가지 기질의 철학도가 있을 수 있지 않는가? 한 가지의 태도만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하고 동식은 먼저 문제를 제기했다. 그랬더니

“기질을 개재시키면 과학으로서의 철학은 성립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철학에 있어서의 기질은 극복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지 용인될 성질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하는 의견이 학생 측에서 나왔다.

“좋은 의견이다.” 해놓고 동식은 ‘게오르그 짐멜’의 말을 인용했다.

“철학이란 어느 기질을 통해서 이뤄진 세계관이다. 거꾸로, 제시된 세계관을 통해서 나타난 기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과학으로서의 철학이기에 앞서 인간의 철학이라야 할 때, 철학에서 기질을 무시할 순 없다.”

“기질과 기분은 어떻게 다릅니까?”하는 질문이 나왔다.

“기질은 개성이란 말과 바꿀 수가 없다. 기분이란 그때 그때의 마음의 상태다. 기질은 일관성, 또는 반영구성을 갖지만 기분은 일시적, 충동적인 것이다. 철학에 있어서 기분은 용인되지 않지만 기질은 용인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철학이 기질을 통한 세계관이라면 35억의 인구가 있으니 35억의 세계관이 있다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학(學)으로서의 철학은 파산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것도 좋은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동식은 대답은

“꼭같은 달이 35억의 눈동자에 각각 비치듯, 단 하나의 진리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35억 가지의 철학으로 풀이해서 우리는 산다. 이를테면 누구나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35억의 눈동자에 비친 달의 광원(光源)은 따지고 보면 하나다. 하나의 철학 또는 몇 개의 철학으로서 이론화할 수 있다는 것은 철학에서도 수학에서나 마찬가지로 최대공약수를 찾아내는 노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분으로 풀이된 철학은 35억 개가 되지만 공약수를 작용시키면 불과 몇 가지로 정형화 할 수가 있다. 이 정형화의 명수를 철학자라고 한다. 자기의 철학을 가졌대서 누구나 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그리스 철학은 이러한 사정을 아주 간명하게 가르쳐주는 교재가 된다.”

동식은 이어 유심론 철학 또는 유물론 철학으로 갈라지는 바탕에 벌써 기질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그 유물론, 유심론이 갖가지 색체를 띠게 되는 것도 결국 기질의 문제라고 풀이했다.

“기성의 철학을 찾아갈 때도 우리를 이끄는 것은 기질이다. 어떤 기질은 ‘칸트’를 택하고 어떤 기질은 ‘헤겔’을 택한다. 또 어떤 기질은 ‘키에르케고르’를 택하고 어떤 기질은 ‘마르크스’를 택한다.”

“철학은 진리의 학인데 그렇게 기질이 이니시어티브를 쥐고 있다면 진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먼저 기질이 작용한다고 했지 기질이 진리를 부정한다고는 안했다. 말하자면 이렇게 된다. ‘마르크스’에게 진리가 있다. 철학자는 아무도 그 진리를 부인하진 않는다. 부인하진 않지만 어떤 기질은 그 진리를 굉장히 중시하는데 어떤 기질은 이와 반대로 그 진리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기질은 ‘마르크스’의 진리를 중시하는 나머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어떤 기질은 ‘마르크스’의 진리를 부인하진 않지만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까닭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진 않는다. 철학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와 달라 누구에게나 동질성으로 작용하진 않는다. 기질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철학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철학이라야 하니까 기질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니까 갖가지 철학도가 있을 수 있고 갖가지 태도가 모두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끌려 ‘철학도는 행동을 해야 한다.’로 될 수도 있고, ‘철학도는 방관자라야 한다.’고 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었다.

“동시에 오늘을 이끄는 철학을 연구하는 태도도 있을 수가 있고, 내일을 준비하는 철학도 있을 수가 있다. 이 사회를 옳게 발전시켜야겠다고 서두르는 철학과 나란히, 사회적 문제는 초월하여 생과 사를 스스로의 과제로 하는 철학이 있을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소외현상(疎外現象)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비롯된 것이란 ‘마르크스’의 교조(敎條)를 믿고 진정한 휴머니즘을 건설하기 위해 자본제적 생산양식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고, 인간의 소외현상은 인간 생득(生得)의 상황이니 신에의 귀의로서만 자기 구제가 가능하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신봉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통일된 세계관은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아닙니까?”하는 질문이 나왔다.

“통일된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은 파산했다는 말이 있어. 나는 이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다. 억지로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 놓고 강제로 설득 또는 굴복시키려고 드는 것보다 복수(複數)의 세계관을 제시해놓고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이 옳은 철학적 태도라고 나는 생각해.”

“진리엔 원래 설득력과 강제력이 있는 것 아닙니까? 진리에 강제력이 없다면 진리의 존귀성이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진리라고 하면 보편타당성이 있는 것인데 복수의 세계관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선생님의 말씀은 진리의 보편타당성과 유일성을 파괴하는 위험천만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말을 한 학생은 이 때까진 한마디 말도 없이 침묵해 있던 창백한 얼굴의, 아직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청년이었다. 동식은 약간 당황했다. 그래 조심조심 말을 가려나갔다.

“진리엔 강제력이 있다. 증기(蒸氣)는 이를 계속 가두어 두려고 했다간 드디어는 폭발하고 만다. 자라는 아이에게 언제나 어린아이의 옷을 입혀놓을 수는 없다. 이처럼 강제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엔 갖가지가 있다는 얘기다. 폭발을 두려워해서, 즉 그 강제력을 미리 느끼고 재빨리 행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폭발을 해도 다치지 않게 피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강제력을 느끼고 처신하는 사람은 영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덜 영리하다는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진리가 지닌 강제력이란 것은 고작 이 정도다. 진리는 유일하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사회 다음엔 사회주의 사회가 온다. 이것은 유일한 진리일지 모른다. 그런데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유일하니까 이것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해야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유일하지만 달갑지 않으니 되도록이면 그 진리의 실현을 지연시키려고 드는 사람도 있다. 보편타당성이 있으니까 진리이다. 그러나 그 보편타당성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경향도 있다. 진리의 존귀성도 그렇다. 내게 있어서의 철학적 진리의 의미는 내 기질과의 상관관계에 있다. 이런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반세기 전 일본에 좌익사상이 풍미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지식청년들이 이 사상에 휩쓸렸다. N이라고 하는 지금도 생존해 있는 고명한 평론가가 당시엔 대학생이었는데 자기의 방향에 관해 고민한 끝에 동기생인 K를 찾아갔다. K는 지금 일본의 문화계에선 거의 신격화되어 있는 문인이다. N이 K를 찾아간 까닭은, K가 동기생 가운데선 최고의 수재라고 꼽혀 있었는데, 그 K만이 유일하게 좌익운동에 냉담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N은 K를 붙들고 물었다.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K는 N의 말을 듣더니 서슴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마르크스’는 옳다. 그렇다고 해서 어쨌단 말이냐? 그래놓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버리더란 것인데, 나는 K의 말에서 많은 시사를 얻었다. 옳다고 해서 꼭 추종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다. 아무리 옳더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소중하지 않으면 방관할 수도 있고, 무시해버릴 수도 있고, 포기해버릴 수도 있다는 교훈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철학과 인간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 부처님의 경문은 내가 이해하는 한 그릇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불교도가 될 생각은 없다. 철학, 아니 체계를 존중하는 철학자는 배타성이 강한 탓으로 복수의 세계관을 인정하자고 하면 이원론자(二元論者)니 절충주의자(折衷主義者)니 해서 사갈(蛇蝎)처럼, 때론 사이비학자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철학은 화원(花園)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절마다 각양각색의 꽃이 피는 화원, 그 둘레엔 사철나무도 있고 낙엽수도 있는 그런 화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설익은 철학 때문에 하는 잠꼬대 같은 소리라도 해도 나는 개의치 않고 이 생각을 고집한다.

내 철학의 화원엔 소크라테스를 비롯해서 수 많은 철학자가 제공해준 씨앗이 뿌려져야 한다. 그곳에서는 니체와 마르크스가 경염(競艶)하고 헤겔과 키에르케고르가 각기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이렇게 학으로서보다 진리로서보다 지혜로서의 철학이 되자면 적어도 고금을 막론하고 심지어 공자와 플로티노스까지, 맹자와 토마스 아퀴나스까질 동시에 받아들일 참이다. 비빔밥을 먹어도 그 저작(咀嚼)과 소화의 과정에서 단일한 영양소로 환원되는 것이다. 음악은 오케스트라로서 그 아름다운 극치를 나타낸다. 그림도 역시 빛깔의 교향악이다. 철학만이 어떻게 배타적일 수가 있는가. 하나의 슬기, 한가닥의 지혜를 굳건히 하기 위해선 철학도 교향악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협화음마저 강렬한 멜로디로서 조절되는 통일성, 그것도 철학의 교향악적인 조작에서 나온다.”

“결국 철학도는 이 시국을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 겁니까?” 하고 한 사람이 결론을 서둘렀다. 동식은 자기의 장광설에 염증을 낸 탓으로 한 말일 거라고 짐작했다. 동식은,

“결국 철학도는 모든 사람들이 정치에 미쳐 날뛰는 소용돌이를 옆눈으로 보고 이렇게 교실에 앉아 있어도 된다. 이 말씀입니다.”하고 말을 꾸몄다.

모두들 와 하고 웃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미래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