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점의 추억

by 심지훈

어제 저녁답에 대전 탄방엠블병원 601호실 화두는 라온이의 2학기 방과후수업 중 한자교실이었다.


라온이가 폐렴으로 입원하던 월요일 오전 10시 정각, 바이러스 검사를 앞두고 아내는 빛과 같은 속도로 미술, 바둑, 로봇과 함께 한자 방과후수업 신청을 단번에 성공했다. 죄다 경쟁력 있는 수업들이어서 속도가 관건이었다. 아내는 “예스!”를 외쳤다. 해냈다는 뿌듯함의 표시였다.


어제는 신청한 방과후수업 일정을 최종 조율을 앞두고 있었다. 퇴근한 아내는 바론이와 함께 여느 날처럼 병실을 들렀다. 라온이에게 물었다. 한자를 한날 달아서 할 것인지 다른 과목과 1시간씩 나눠서 할 것인지 하는 내용이었다.


라온이는 한자는 하기 싫다고 싫은 내색을 하였다. “라온이 의사를 안 묻고 한 거야?” “우주항공을 안하겠다니 한자를 한 건데. 인기가 제일 많아서.” “애가 원해야 하는 거지.” 아내는 라온이를 설득했고 라온이는 싫다고 버텼다. 모자간 공방이 한동안 지속됐다. 라온이 얼굴이 붉어졌다. “그걸 지금 꼭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거야? 아픈 애를 데리고.” “오늘까지 결정해야 하거든.” “어쩌겠나. 저 싫다는 거. 한자 쉽지 않아. 저가 필요로 해야 하지. 초등 1학년이 한자가 되나. 한 5학년은 돼야 하지 싶은데.”


느닷없이 바론이가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보챘다. “라온아, 바론아 너네 빵점 맞아본 적 있어?” 빵점이란 말에 두 아들이 깔깔댄다. “아니, 없는데.” 두 녀석이 신명에 겨워 뱉는 말.


그리 아빠가 한자 빵점 맞은 묵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빠는 옛날에 빵점 맞은 일이 있어. 초등학교 다음 중학교 1학년 첫 모의고사에서 한자 시험을 빵점을 맞은 거야. 충격이 엄청났지. 그래 아빠가 라온이 1학년 여름방학처럼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한문 교과서 맨 뒤에 정리된 기역(ㄱ)부터 히읗(ㅎ)까지 한자 1500자를 마루에 앉아 손으로 써가며 죄다 외운 거야. 그 일로 아빠는 중고등학교 6년간 한자 시험을 죄다 100점만 받았어.”


라온이는 그렇다 쳐도 다섯 살 바론이가 이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는 게 신통했다.


내처 영어 공부도 그리 영어 교과서 맨 뒤 A~Z까지 단어를 중2 여름방학 때 죄다 외운 적이 있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그런데 영어는 한자와 달라 단어를 외운다고 성적이 오르지는 않더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라온이 엄마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돈 버렸다 생각해야지. 다 때가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러면서 내심 따로 라온이를 설득할 요량이었다.


이른 아침 <산하2>를 읽는데 우리들 사연에 참고할 만한 적실한 예가 나왔다. 미국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의 교육 태도에 관한 것인데, 능히 사표로 삼을 만하다.


이병주 선생은 이를 ‘제퍼슨 정신’ ‘제퍼스니즘’이라고 표현했다.


-----(제퍼슨) 그의 재질로 봐서는 1년 남짓한 시간이면 법관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년 이내엔 그 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까닭은 그가 법률의 조문을 해석하고 외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제퍼슨은 어떤 법률이든 그 역사와 근원을 알려고 했다. 이를테면 로마에서 비롯된 것이냐, 프랑스에서 비롯된 것이냐 또는 앵글로 색슨의 계통이냐 하는 것까지 따졌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좋은 법률인가 아니면 개정해야 할 법률인가, 국민에게 도움을 주는 법률인가, 국민에게 해를 주는 법률인가 하는 점을 탐구했다. 그러기 위해서 동료들이 시험에 합격해서 법관이 되는 것을 보면서도 제퍼슨은 다음과 같은 일과를 5년 동안 변동없이 지켜나갔다.


아침 8시까지 물리학 공부.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법률 공부.

12시부터 1시까지 정치학 공부.

오후, 역사 공부(고대에서 현대까지).

저녁부터 취침까지 문학 공부.


이렇게 하면서도 제퍼슨은 매일 세 시간씩 바이올린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가운데도 장차 법관이 될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법관으로서의 수련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일제시대 법률 공부를 하는 많은 친구를 가졌지만 하나같이 법률조문만 해석하고 외워 고등 고시에 합격할 목적만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소. 법률에 사로잡힌 법관이 아니고 인간을 위한 법관이 되기 위해서, 또 악법을 만들지 않는 입법자가 되기 위해서, 법률을 국민의 이익되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도 제퍼슨 같은 태도를 배워야 할 줄 압니다.”---- <산하2> 353쪽


이 이야기를 라온이에게 들려줄까 했는데 유튜브 삼매경이라 그만두었다.


대신 라온이에게 한자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알아듣도록 설명했다. 라온이는 고민하더니 해보겠다고 했다. 라온이는 말귀를 잘 알아먹는 아이다.


공부는 제 필요와 목적에 따라 해야지 부모가 끈다고 되는 수는 없다. 되는 게 기적이다. 어제 낮에 라온이한테 깜짝 놀란 일이 있다. 요즘 ‘칸의 여인’ 전도연 주연의 영화 <리볼버>도 가볍게 눌러 화제작에 오른 <사랑의 하츄핑>. 이 영화가 흥행돌풍을 일으키자 ‘티니핑에 부모 등골 휜다’는 후속 기사가 떴다.


하츄핑은 티브이 애니메이션 <티니핑>의 주연 중 하나이고, 티니핑의 주연은 수십 개이다. 그에 따른 아이템도 수백 가지가 된다. 그 숱한 아이템을 아이들은 모두 갖기를 원하고, 모두 사주기에는 부모들이 경제적으로 힘에 부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비단 티니핑만의 문제가 아니다. 라온이가 좋아하는 <신비 아파트>도 주연과 캐릭터가 다양하다. 내가 라온이한테 놀란 점은 그 숱한 <신비 아파트 귀신도감>의 그 어려운 이름과 장기를 줄줄 다 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 아내에게 한 말.


“귀신들을 억지로 외우게 했어봐. 그 어렵고 복잡한 캐릭터와 장기를 낱낱이 외울 수 있을지.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본다. 라온이를 믿고 기다리자.”


내가 한여름에 마빡에 땀 삐질삐질 흘려가며 한자와 영어 단어를 독파한 것이나 제퍼슨이 5년간 제 법률의 근원을 따져가며 지독스럽게 공부한 것이나, 또 규칙적으로 물리, 정치, 역사, 문학, 음악을 독학한 것은 모두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라온이에게 그런 자질이 잠재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면 된다. 어제는 라온이 담임선생이 아내에게 안부 문자를 주었다. 그 과정에서 오고 간 대화에서 담임선생은 “라온이는 어느 누구보다 모범적이어서 칭찬만 해주면 되는 아이”라고 전했다. 여러모로 아빠보다 낫다. 난 복이 많은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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