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초 처가를 갔더니 장모가 이런 말씀을 주신 적이 있다. “하나는 좀 야문 줄 알았더니 둘 다 헤프네. 그래 가 우짜노.” 창졸간 일격이라 입도 뻥긋 못했다. 속으로만 ‘살다 살다 별소리를 다 듣겠네’하고 말았다.
나는 뒤늦게라도 부자는 못 될지언정 일찌감치 ‘규모의 경제’만큼은 정확히 터득했다고 자신한다. 그건 환경적으로, 경험칙으로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익히게 된 것이다.
나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려서는 우리 집이 동네에서 가장 잘 살았다. 친구들에 비해 부족한 것 없이 넉넉하게 살았다. 그런데 ‘이 잘살았다’ ‘넉넉하게 살았다’는 말은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의 식견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10대를 보낸 1980~1990년대 시골 사정은 너 나 할 것 없이 극도로 어려웠다. 거개가 초가일 때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나던 해(1979년) 초가를 허물고 양옥 옥상집을 지었다. 우리 동네 1호 양옥집이었다. 그랬던 만큼 일단 집이 특출났다.
내가 태권도 도장을 다닌 건 초등학교 3학년(1988년) 때의 일인데, 시골에서 시내 학원을 다니는 아이는 드물었다. 형과 내가 도장을 다니고 6개월~1년 뒤 동네 형들의 도장 행렬이 이어졌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88년 무렵, 동네 어귀에 중국집이 생기자 한 그릇에 700원 하던 짜장면을 주말마다 배달시켜 먹은 집은 우리 집이 거의 유일했다. 또 격주마다 어머니를 따라가 시장에서 떡볶이를 사먹은 아이도 내가 유일했다.
이 같은 기억들로 유년시절이 다복했다고 나는 기억하는 것이다.
이 환상이 깨진 건 대학을 가서였다. 1998년 경산 자인은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잿빛 콘크리트 아파트가 높고도 기다랗게 줄지어 있었다. 도로는 아스팔트는 깔렸지만 흰 선은 칠해져 있지 않았다.
그걸 옛 자인고 정도에서 보면 내 눈엔 영락없는 ‘미래도시’였다. 정감이나 부러움보다는 무서움이 우선했다. 우리 시골마을과 비교하면, 어찌 비교할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야 내가 유복했었다는 환상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그나마 대학 때는 장학금을 받고 다녀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얻은 첫 직장 신문사에서도 대구가 고향인 동기 2명은 내내 박봉의 월급을 갖고 불평·불만하기 바빴지만, 촌놈인 나는 현실감각이 아주 떨어진 덕분(?)으로 박봉인지조차 모르고 허허실실만 했다. 그땐 일 배우는 게 좋았고, 사람 만나는 게 그저 좋았다.
신문사 월급이 적으면 적은 대로 나는 열심히 저축했다. 그 월급에 3년 적금을 부어 1000만원을 모았을 땐, 지금 논설위원으로 있는 이창호 선배가 그랬다. “지훈아, 너 참 대단하다. 어떻게 하면 그 월급으로 3년만에 1000만원을 모을 수가 있노? 그 비결이 뭐꼬?”
신문사 월급이 정말 적다는 건 기자 생활 5년째 접어들어 절실하게 느꼈다. 정말 이 돈 갖고는 집 장만은커녕 장가도 못 가겠다는 위기감이 솟구쳤다. 내 뇌리 속엔 여적 생생하다.
신문사에 사직서를 제출한 그해, 서울 출장을 다녀온 뒤 대구 북구청 앞을 지나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길가에 차를 세웠다. 추풍낙엽이 꼭 내 앞날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선 내 청춘과 시간이 너무 아깝다 느낀 순간이었다. 그리 사직 결심을 굳혔다.
딱 5년 일하고 내 손에 쥔 돈은 2000만원이었다. 대구가 고향인 동기는 나보다 1년 뒤에 방송사로 이직하면서 수중에 쥔 돈이 7000만원이라고 했다. 그때 절감했다. 제집이 있다는 것과 아직 용돈 걱정 없는 부모 벼슬 아래 있다는 것이 단숨에 5000만원의 격차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튼 나는 내 규모에 맞게 쓸 수밖에 없었다. 월급의 80%를 적금으로 우선 떼고, 나머지를 갖고 아쉬운 대로 생활하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그런데 그리 살아도 중간중간 소소한 수당도 있고 큰 걱정 없이 살긴 살아지더라는 게 내 경험이다.
나는 박봉으로 우울해하는 대신 남들 못하는 경험의 가치를 돈보다 더 우위에 두며 살았다. 없는 돈 나오라고 소리치고 운다고 벽을 부순다고 나오나,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하고 소소한 일상을 즐기면 되는 거 아닌가, 하면서.
내 생각대로 내 다짐대로 내 일에 충실하고 일상을 즐겁게 지내다 보니 또 그런대로 돈길이 열렸다. 워낙에 박봉이었으니 남들이 평범하다는 돈, 보잘것없다는 돈도 내게는 큰돈이었고, 귀한 돈이었다.
그렇다고 더 벌었으니 이제 좀 써볼까 하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한 적이 없다.
돈이란 게 그렇다. 묘하게도 생기는 족족 출처가 딱 정해져 있는 것처럼 쏙쏙 나가더란 것.
돈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야무지게 쓰고 잘 관리해야 할 요물이다. 있을 때 허리끈을 졸라야 뒤를 대비할 수 있다. 없다고 찡찡댈 것도 없다. 바야흐로 물질만능시대 아닌가. 소비가 흥하면 물자가 넘쳐나고 물자가 넘쳐나면 중고시장도 건실해진다. 꼭 새것만 고집할 필요도 없는 시대다.
중고를 써도 돈을 잘 쓰는 법은 익히고 실천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돈을 잘 쓰는 유일한 방법은 ‘적재적소에 쓸 땐 쓴다’는 확고한 원칙을 세워 그에 맞게 지출하는 것이다.
나는 야무지게 살면서 타인에게 박하다는 인상을 준 적이 없다. 밥을 사도 내가 샀지, 얻어먹은 경우는 잘 없다. 뭔가를 받았다면 늘 그 이상으로 되돌려주었다. 다만 돌려줄 땐 내 형편을 우선한다. 형편에 맞추어 잊지 않고 뒤늦게라도 고마움을 표시한다.
나는 돈 부자는 아니지만 책 부자에다가 마음 부자다. 게다가 아들 부자이요, 마누님 부자다.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이런 걸 두고 지족상락(知足常樂)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거라는 게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