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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실 정의

by 심지훈

조선 임금 중 가장 많은 미담을 남긴 이는 성종이다. 하루는 성종이 밤에 미행을 나갔다가 한 초가에서 이상한 모습을 목격했다.


웬 노인이 밥상 앞에 앉아 울고 있고 상복 입은 젊은이는 노인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머리를 깎은 여승이 일어서서 빙글빙글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장면이 하나의 명화라고 하자. 그럼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객은 무슨 생각을 할까. 드러난 사실로써 ‘아주 얄궂은 그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 세상사는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이 다반사다. 때문에 사실 너머의 진실을 읽어내는 안목이 대단히 중요하다.


위 장면의 진실을 알기 위해 성종은 신분을 감추고 노인에게 물었다.


-왜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진실’을 들려줬다.


“오늘이 이 늙은이의 생일입니다. 헌데 집이 가난해 보시다시피 저기 서서 춤추고 있는 며느리가 머리카락을 깎아 팔아 음식을 장만해 생일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제 어미의 상복을 입고 저렇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고요. 그러니 어찌 두 눈에서 눈물이 나지 않겠습니까.”


위 장면의 진실은 찢어지게 가난한 노인과 아들 내외의 눈물겨운 생일파티인 것이다.


세상사에 사실과 진실이 가려지면 그 다음은 정의 실천이 남는다. 성종은 정의를 이런 방식으로 실천했다.

며느리를 칭찬한 다음 소매 속에서 붓과 벼루를 꺼내 노인에게 주며 말했다.


“며칠 뒤 대궐에서 과거를 실시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때 이 붓과 벼루를 가져가 꼭 과거에 응시하십시오.”


며칠 뒤 특별과거 포고령이 발표됐고 노인은 과거장으로 갔다. 제목을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상가승무노인곡(喪歌僧舞老人哭) : 상주는 노래하는데 스님은 춤을 추고 노인은 울고 있다.


노인은 자신의 생일잔치를 가지고 답안을 작성했고, 성종은 답안지를 보고 노인을 뽑아 합격시켰다.


사실과 진실과 정의에 관한 실제 명화로는 풍만한 여인의 젖가슴을 빨고 있는 노인의 사연이 담긴 루벤스의 ‘노인과 여인’이란 작품이 있다.


동명의 제목으로 푸에르토리코 버전과 네덜란드 버전이 있어 스토리는 서로 다르지만, 처음 이 그림을 드러난 사실로써 보는 관람객들은 ‘흉측한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해설사가 들려주는 진실 속엔 두 버전 모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진한 감동이 숨어 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아버지가 숨을 거두기 직전, 막 출산한 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풀어 오른 젖을 물리는 것밖에 달리 할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푸에르토리코 버전에서 이 노인은 우리나라로 치면 안중근 열사 같은 그 나라의 대표적인 독립투사 키몬(Cimon)이었다.


이 진실에 관한 정의 실천 집행자는 푸에르토리코 언론이었다.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사회 정의 차원에서 당시엔 묻어두는 것으로 처리했다.


만약 푸에르토리코 독립운동의 아버지가 옥중에서 이토록 구슬피 죽어갔다는 소식이 국민들에게 전해진다면 국가 소요사태가 일어날 것이고, 이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옳지도 좋지도 않다고 당시 언론은 판단한 것이다.


Kbs 대구가 어제 오후 7시 뉴스에 보도, 8시쯤 다음 포털에 걸려 오늘 아침까지 댓글 9,000여 개가 달린 <‘밥맛 없다’며 폭언, 폭행…경찰이 영양사 집단 괴롭힘> 제하 기사는 여러모로 사실 진실 정의를 생각하게 한다.


여성 vs 경찰들, 폭행 vs 툭 건드림, 3,500원 vs 3,000원, 편집된 서장의 말….


이런 충돌하는 사실 너머엔 또 다른 진실이 없을 수 없다. 취재기자는 주장도 사실인 양 포장하면서까지 진실을 덮었거나 진실까지는 문전도 못 가본 게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만약 진실을 파악하고서도 저렇게 일방을 죽이는 방식의 보도를 한 것이라면 ‘밖으로 알려 처리할 일인지, 안에서 처리하도록 지켜볼 일인지’ 하는 정의 실천력에 큰 장애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과 진실은 차치하고 청문감사 결과가 용두사미면 대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또 피해자라는 여성은 일파만파로 번진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 계속 직을 유지할 것인가.


기사를 그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머리로 쓰면 언젠가는 탈이 나게 돼 있다. 기사는 뜨거운 가슴으로 느끼고 냉철한 머리로 신중하게 써야 한다.


그런 자세로 임해도 기자가 개인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은 죽을 때까지도 이루기가 어렵다. 하지만 기레기로 전락하는 것은 반나절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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