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비 Mar 16. 2020

보스니아 내전 생존자의 이야기 1편

흑과 백의 문제가 아닌, 회색 지대에 놓이게 되어야만 알게 되는 것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selco는 발칸 반도 사람입니다.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무수한 전화를 입은 역사가 있지만, 특히 92년에서 95년 사이(보스니아 내전)는 가혹한 시기였습니다. 이 전쟁 중 포위된 어느 도시에서 살아남은 남자의 이야기는 서바이벌리스트보드 포럼에서 아주 인기가 있는 게시글입니다. 제가 봐도 뼈가되고 살이 되는 귀중한 이야기라 이렇게 올려봅니다.


https://www.survivalistboards.com/


이제 내가 겪었던 경험담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영어가 짧으니 이해해달라.) 난 발칸 지역에 살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92-95년 그곳은 지옥이었는데, 나는 그 시기 인구 5~6만 정도 되는 어느 도시에서 1년간 전기, 연료, 상하수도, 식량 보급망, 그리고 기타 거의 모든 것을 입수할 수 없는 무정부 상태에서 살았다. 도시는 1년간 포위돼 있었으며 사실상 SHTF(Shit-hit-the-Fan: 재난이 들이닥친 상황) 상황이었다. 우리에겐 조직적인 군대나 경찰 같은 것은 없었고, 그저 총을 가지고 자기 집과 가족을 지키는 방어자들의 작은 그룹들로 흩어져 있었다.

우리 중 일부는 좀 더 나은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사태가 시작할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는 며칠 분량의 식량과, 일부가 권총을 갖고 있었고, 소수만이 AK-47을 가졌다. 어쨌든, 한두달이 지난 시점에서 강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병원은 도살장 같아졌으며, 경찰은 사라졌고, 병원 직원의 80퍼센트는 그냥 자기 집에 가버렸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우리 가족은 당시 꽤 큰 편이었고 (큰 집 한채에 15명의 가족이 있었고, 대여섯 자루의 권총에, 세자루의 칼라시니코프(AK) 소총을 갖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들 대부분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포위된 도시를 돕기 위해 미군 공군이 10일마다 MRE(미군 전투식량)를 투하해주었지만 (미국의 도움에 신의 가호 있으라) 충분치는 않았다. 일부 가옥에는 작은 텃밭에 소량의 채소를 길렀지만, 대부분은 그마저도 없었다.


석달 후 아사자와 동사자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버려진 집에서 모든 문, 창문틀을 벗겨서 태웠다.  나는 내 가구를 전부 난방에 소모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었는데, 대부분 물이 나빠서였고 (내 가족 중 두 명이 그렇게 죽었다), 우리는 빗물을 받아 마셨으며, 비둘기를 여러번 잡아 먹었고, 한번은 쥐도 먹었다. 그 상황에서 돈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다.


암시장이 가동하면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바꿔팔았는데, 예로 들자면: 콘 비프 캔 하나는 여자를 몇 시간 살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안타깝겠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내가 아는 바로, 그런 여자 대부분은 그저 필사적인 애엄마들이었다. 양초, 라이터, 항생제, 연료, 배터리, 총탄과 음식 등등이 거래됐으며 우리는 그런 것을 얻기 위해 마치 짐승처럼 싸웠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많은 것이 바뀌고,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괴물로 변했다. 끔찍했다. 무력은 숫자에 기반했다. 당신이 집 안에 혼자 있으면, 제아무리 무장을 잘 했다 할지라도 강도 당하고 살해당할 것이다. 어쨌든, 전쟁은 끝났고, 그에 대해 미국에 감사한다 (다시 신의 가호 있으라). 전쟁에서 어느 편이 이겼는지는 중요치 않다.

거의 20년 전 일이지만, 내게 있어서는 어제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며, 나는 그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


나와 내 가족은 이제 잘 준비되었으며, 잘 무장했고, 많이 비축했으며, 많이 배웠다. 지진, 전쟁, 쓰나미, 외계인이든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는 중요치 않고, 진짜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이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볼때, 당신은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무력은 숫자에서 나온다. 가족과 가까이 지내고, 함께 준비하며, 친구를 현명하게 선택하고 그들도 함께 준비하도록 하라.



이후 내용은 답글에 대한 답변글입니다.

사실상 도시는 거리 단위의 집단으로 쪼개진 상태였고, 내가 살던 거리(약 15~20채의 집이 있었다)는 협동 순찰조(매일 밤 5명의 무장 남성)가 돌면서 적이나 강도를 막았다. 우리는 같은 거리에 있는 사람들끼리도 거래했으며, 우리 동네에서 5마일 떨어진 어느 거리는 일종의 집단 교역꾼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은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밤 시간에만 갈 수 있었다. (낮 동안에는 저격수 때문에 위험했다). 거기서는 거래하기 보다는 강도 당할 위험이 컸기 때문에, 그 동네는 딱 두번만 다녀왔으며, 정말이지 절실하게 필요한 경우에만 갔었다.


왜 땔감이 문제가 됐느냐?

발칸 반도 지도를 보면 많은 숲이 있지만, 내가 살던 도시는 국경 근처 남부였다. 그 도시의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도를 잘 살피면 국경 부근 지역은 바위 투성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도시 내, 공원 등지에 나무가 있지만, 도시의 대부분은 건물로 돼 있으며, 믿거나 말거나지만 요리와 난방에 전기를 쓸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도시 내의 모든 나무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라지더라. 그게 다 소모되면 남은 것은 가구, 문, 나무 바닥 순서다... (그리고 그런 부류는 아주 빨리 소모된다.)


강도가 차 타고 돌아다녔냐는 질문

우리 동네 내에서는 움직일 수 있는 차는 없었다. 대부분의 도로는 폐허와 잔해, 버려진 차량, 무너진 집 등으로 막힌 상태였고, 연료는 금처럼 귀했기 때문이다. 어딘가 가려면 항상 밤시간을 이용해야 했고, 혼자 가는 일은 절대 없으나 큰 집단을 이루는 일 또한 없었다 (2~3사람이 보통). 항상 잘 무장하고, 빠르게, 그림자에 숨어서, 폐허 사이로, 도로의 개활지는 최소한으로, 항상 숨어다녀야 했다.


우리 지역에는 교외 지역이라든지 농장이라든지는 없었다. 교외 지역은 항상 적군에 의해 점령돼 있고, 도시 내에서는 누가 적 편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 사태 속에 10~15명 가량, 종종 50명 가량까지 뭉친 강도 집단이 있었다. 하지만 또한 당신과 나, 아버지들, 할아버지들, 보통 사람들 같은 죽고 강도 당하는 사람 또한 있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들 대부분은 회색의,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우리는 가진 것을 총동원해야 했는데, 당시 잘 준비되지도 않았고, 준비할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고로 당신 또한 우리가 일종의 석기 시대,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이 그 상태로 돌아가야 했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이지 가능한 무엇이든 사용해야 했다.

한가지 예를 들면, 나는 큼직한 프로판 가스통(부탄이었는지 종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음)을 갖고 있었는데, 난 이것을 요리나 난방에 쓰지 않았다. 매우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난 내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 가스통을 개조해서 가스통 호스를 일종의 작은 마개에 연결했다. 이를 통해서 나는 1회용 가스 라이터를 재충전 할 수 있었고 (당신이 방법만 알면 1회용 가스 라이터는 더이상 1회용이 아니다.) 그런 라이터는 장래에 작은 도움이 되어주었다. 짧게 설명하면, 누군가 내게 빈 라이터를 가지고 오면 나는 그 라이터를 충전해주었는데, 그런 1회 충전 당 식량 캔 하나 또는 양초 하나 혹은 상대가 제시 가능한 뭔가로 바꿔먹을수 있었다.


또다른 예를 들면, 나는 훈련받은 정식 간호사였고, 당시 나의 지식 역시 거래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훈련받고 교육 받아두어라. 그런 상황이 닥치는 경우 뭔가를 고치는 방법만 알면, 모든 물건이 다 소모되는 날이 오더라도, 그 특별한 지식을 음식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한 고치는 방법이란 신발이나 사람, 또는 다른 뭔가를 수리하는 것을 말한다. 내 이웃은 오일 램프에 쓰기 위한 일종의 기름을 만드는 법을 알았는데 (잔에 기름을 채우고 심지를 꽃아 쓰는 그런 것) 그는 굶주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내게 어떻게 기름을 만드는지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내 생각에 그의 집 뒤에 있는 나무와 소량의 디젤유를 이용한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요점은, 뭔가 배워두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고쳐줄 사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은 생존 영화가 아니었다. 그저 끔찍할 뿐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필요한 일을 했다. 이긴 사람 따윈 없다. 그저 우리는 무수한 악몽과 함께 살아남았을 뿐이다. 나의 집단에는 우리 가족, 내 혈연 관계인 친지(삼촌이나 할머니 등)으로만 구성돼 있었다.  우리 동네와 마을에는 가까운 친구도 몇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친구는 가족이었다. 나는 우리 그룹에 외지인은 절대 끼워주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발칸 지역에 산다. 단지 다른 동네로 옮겼으며, 좀 더 나이 들었고, 더 잘 준비되었을 뿐이다.


만약 내게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석달 더 준다면?

흠, 아마도 바다 너머로 도망가겠지. (농담) 이제 나는 상황이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 지를 잘 알기 때문에 음식, 위생, 에너지 등등의 보급품을 6개월치 보유하고 있다. 나는 약간 보안을 강화한 아파트에 살고 있고, 내 아파트에서 5마일 떨어진 어느 마을에 피난처가 있는 집을 갖고 있으며, 그 집에도 6개월 분량의 보급품이 있다. 그 마을은 작은 동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잘 아는 사이이고, 역시 (지난 전쟁의 경험 덕에) 대부분이 잘 준비된 사람들이다. 나는 네 종류의 화기에 각각 2천발의 탄약을 갖고 있다(이곳 법률 관계 상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나는 그 집에 큼직한 텃밭도 갖고 있으며 텃밭 가꾸기와 농경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배워뒀다.


내 생각에 이제 나는 상황이 발생할 때를 냄새맡는 지혜를 가진 것 같다. 알다시피 모든 사람이 다 괜찮다고 할때, 뭔가 잘못돼간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내가 스스로와 가족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본다. 상황이 더러워지면, 당신도 분명 자식을 살리기 위해 뭔가 나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확신한다. 당신은 영웅이 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가족과 함께 살아남고 싶어할 것이다. 혼자서 살아남으려는 자는, (이는 물론 내 의견이지만) 아무리 잘 무장하고 잘 준비해도 절대 살아남을 수 없으며, 결국에는 죽게 될 것이다. 난 이런 상황을 아주 많이 보아왔다. 가족 단위나 가까운 친구들이 많은 비축물자와 여러가지 다른 지식을 가지는 것이 최고인 것 같다.


한 사람이 혼자 매드 맥스처럼 살아남으려면 필요할 가장 중요한 한가지가 뭐냐는 질문

글쎄, 어떤 사람이 생존을 위해 준비하는게 아니라 강도처럼 살려고 할때 단 한가지만 꼽는다면, 총과 아주 많은 탄약이 될 것이다.


뭔가 한가지를 더 비축할 수 있다면 뭐를 비축하겠냐, 가장 좋은 거래용 물자는 뭐냐는 질문

탄약과 위생 그리고 에너지(배터리 등등) 외에 꼽으라면, 주머니칼, 라이터, 부싯돌 같은 거래가 용이한 작은 물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아주 많은 양의 술, 오래 보존이 가능한 위스키 같은, 사실 종류는 중요치 않고 어쨌든 가장 싼 것으로 많이 가지면 좋다. 술은 절망적인 시기에 가장 좋은 거래물품이었다.


또한 위생 물품의 부족함은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직접 눈으로 본 바이다. 그리고 기타 간단한 물건들도 많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대량의 쓰레기 봉지와 덕트 테이프(박스 테이프) 같은, 강조하지만 아주 아주 많은 분량이 필요하다. 용도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무기라면 간단하게 가는 것이 좋다. 나는 이제 45구경 글록을 항상 휴대하는데, 내가 그 총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흔치 않은 구경이므로 나는 러시아제 TT(토카레프) 7.62mm 권총 두 자루 또한 숨겨다가 보관하고 있다. 이 동네에는 아주 흔하고 탄약도 많은 종류이기 때문이다. 나는 칼라시니코프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 동네에는 세 가구마다 한 자루씩은 있으므로 역시...


물은 어떻게 구했나?

전쟁 동안 나는 물은 대개 천장에서 (빗물을) 받아다 네개의 큰 통(드럼통 류)에 받아다가, 정수를 위해 끓였다. 마을 안에 강이 있긴 하지만, 상당히 오염된 상태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어쩔수 없이...난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포럼(서바이벌리스트보드)에 배우러 온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얼마나 나아가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뭔가 추한 행동을 하기 위해 준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일로 삶의 관점이 바뀌었나?

물론 내 삶의 관점이 바뀌었다. 이제 나는 상황이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지 알게 되었고, 더욱 중요한 점으로,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나는 더이상 정부와 공권력을 전혀,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이 모든 것이 괜찮다고 장담하는 경우, 당신은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말해주는대로 믿지만 말고, 열심히 연구하라.


무슬림 어쩌고 하면서 내전에 얽힌 종교적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

약간의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는 세 종교가 자리잡고 있다: 무슬림, 가톨릭, 유대교와 그리스 정교회. 난 무슬림이 아니며, 이 문제를 더 거론하지 않겠지만, 내가 설령 무슬림이라 할지라도 생존과 종교는 관련 없는 문제다. 나는 전쟁을 겪었고, 전투에 휘말렸고, 해야 할 일을 했으며, 젊은 남자들이 갈갈이 찢기는 꼴을 무수히 목격했다. 당신은 그런 참상을 영화 같은데서도 본 적 없을 것이다. 그런 문제에 나를 끌어들이지 마라, 이 주제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당신이 누군가 어떤 집단을 증오한다면 나를 거기에 연관시키지 말라. 나는 증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지막에 스스로를 파멸시키기 때문이다. 그 전쟁은 내전이었고, 종교에 큰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종교의 사람과 만났을때 어쨌느냐"고 묻는다면, 내 가족은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답변이 될까?


되도록 간단히 해명하겠다. 공격자와 방어자가 있고, 내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편을 바꾸었다. 전쟁은 승자 없이 끝났는데, 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 조약을 맺는 것으로 종전했다. 그 것은 잘못된 이유로 인한 잘못된 전쟁이었다. 나는 종교나 인종 때문에 싸우지 않았다. 나는 가족과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 지난 15년간 우리는 평화로웠다. 우리는 우리의 적이었을지도 모를 사람과 살아왔다. 나는 종교나 인종이나 다른 어떤 이유로도 다시 전쟁과 적을 갖고 싶지 않다. 전쟁에 관한 어떤 것도 일반화하지 말라. 전쟁에는 좋은 편도 나쁜 편도 없다. 우리는 모두 상처입었고 우리는 다시 함께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편이든 나쁜 짓을 저질렀으며, 어느 편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단 한가지, 생존술을 배우고, 여러분과 도움이 될만한 것을 나누고 싶어서일 뿐이다.


당신의 종교적 믿음, 인종, 정치적 의견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내가 살던 도시의 전쟁 전에 대해 말하자면, 그냥 펑범한 발칸 지역의 마을이었고, 평범하게 좋은 사람들, 학교, 극장, 공원, 대학, 공항이 있고, 범죄율은 아주 낮았고, 내 생각에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작은 마을과 별 다를바 없을 것 같다. 나는 당시 여러분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젊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나는 여기 전쟁이나 편가름이나 종교 등등에 대해 논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살던 마을은 진짜 SHTF 상황이었고, 그 점에 대해서만 논하고 싶다. 인터넷에는 많은 자료가 있으니 전쟁에 대해서는 그런 것을 알아보는게 좋겠다.


다시 생존으로 돌아가자.


작가의 이전글 비과학적이지만 과학적인 지수 바닥잡는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