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크레타 하니아
그리스 한달살기를 하다 충동적으로 섬 여행을 떠났다.
신혼여행의 성지 산토리니에서는 코로나 시기 결혼식을 올려 제주도 신혼여행을 다녀온 한을 풀듯 파란색 커플 옷을 맞춰 입고 열심히 인생샷을 건졌고, 유럽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크레타 섬의 헤라클리온에서는 크로노스 궁전을 방문하며 나름의 역사 공부를 했다.
하루에 2만보씩 걷고 나자 어느새 체력은 바닥나 버렸다.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 느지막이 마지막 목적지인 하니아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저녁 10시쯤 하니아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기에 늦은 시간 낯선 장소에서 느끼는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숙소로 곧장 걸었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여행 일주일 전 급하게 예약한, 컨디션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는 곳이었다. 짧게 머무를 것이니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숙소는 세트장 같은 아기자기한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구글맵 목적지에 도착했고 조심스레 숙소 문을 열자 1층 로비에 백발의 파마머리를 한 호스트가 우리를 맞이했다. 40-50대로 추정되는 그리스인 호스트 '레프'는 환한 미소를 가진 유쾌한 호스트였고, 우리에게 자신의 소중한 집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1층에는 레프와 가족들의 옛 사진들이 놓여있었고, 여러 조명과 따뜻해 보이는 카펫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세련되진 않았지만 알록달록 여러 색감으로 꾸민 정감 있는 숙소였다.
우리의 방은 2층에 있다고 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아주 좁고 단차가 큰,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제각각인 나무 계단이었는데, 아찔한 단차와 공포심을 자극하는 삐그덕 소리에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계단을 짚으며 네발로(?) 레프를 뒤따랐다.
2층에 도착하자 오른편엔 주방과 화장실이 보였고 왼편에는 방문이 있었다. 레프는 숙소를 소개해주고 쉬라며 1층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우리는 조심스레 방을 살피고 나서야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이동하느라 주린배를 채우기 위해 비장의 무기, 신라면을 꺼내 들었다.
라면을 끓이기 위해 방문을 열자 주방이 정면에 보였다. 나는 시력이 좋지 않음에도 안경도 렌즈도 끼지 않아 멀리 있는 사물을 흐릿하게 보며 산다. 그런 내 눈이 방문에서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주방 싱크대 위 검은색 물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이 움직였다. 그렇다면 생명체라는 뜻?...
애석하게도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커다란 검은색 생명체는 분명 바퀴벌레였다.
나는 짝꿍에게 바퀴벌레가 있다며 주방을 가리키고는 방문 뒤로 숨었다. 바퀴벌레는 그새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짝꿍이 확인해 보겠다며 주방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냄비 하나를 치우자 검은 형체가 드러났다. 진짜 바퀴벌레였다. 그것도 주먹만 한 바퀴벌레.
우리는 이미 방콕 한달살기를 하며 바퀴벌레와 한바탕 전쟁을 벌인 적 있는 사람들이라 웬만한 바퀴벌레는 잡을 수 있었지만 짝꿍조차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며 후퇴했다. 멀리서 봐도 검은 형체가 너무나 컸다. 이 글을 쓰면서도 바퀴벌레가 주먹만 했다는 말, 아무도 안 믿어주겠지? 벌써 억울한 심정이다.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붙잡고 레프에게 바퀴약을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레프는 아직 1층에 있었는지 바로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바퀴벌레가 어디 있냐 물었다. 방문 뒤에 쫄보처럼 서서 주방을 가리키자 레프는 성큼성큼 주방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탁!!
레프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퀴벌레를 '손'으로 내려쳤다. 나는 너무 놀라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분명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벌레 약도, 휴지도, 하다못해 신문지도... 그 어떤 것도.
그렇다, 레프는 오로지 맨손으로 주먹만 한 바퀴벌레를 내려친 것이다. 내가 도대체 뭘 본거지?... 나는 내가 본 것을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주먹만 한 바퀴벌레였다...!
내가 놀란 눈을 하고 온갖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오두방정을 떨자 레프는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말했다.
'바퀴벌레는 애니멀일 뿐이야~ 무서워할 것 없어~'
그러곤 '이상하네, 그동안 집에서 바퀴벌레를 본 적이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하하!' 하며 화장실 휴지를 뜯어 바퀴벌레를 감싼 뒤 1층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나와 짝꿍은 조금 전 일어난 사태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충격적인 장면과 더불어 바퀴벌레는 애니멀일 뿐이야,라고 말하며 쿨하게 사라진 레프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기도 했다. 그.. 그렇지. 바퀴벌레가 나를 잡아먹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바퀴벌레를 무서워할까?
충격의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하니아의 길을 걷다 우연히 레프를 만났다. 레프는 잘 잤냐, 바퀴벌레 또 안 나왔냐, 무서워할 것 없다, 걘 애니멀일 뿐이다, 라며 다시 한번 호탕한 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숙소에서 주먹만 한 바퀴벌레가 나온다면 기겁을 하고 도망가고 싶을 텐데 이상하게도 약간은 뻔뻔스러운 레프의 말과 행동에 나는 조종당하고 말았다. 그래 그건 애니멀일 뿐이지... 애니멀... 별것 아니야...라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의 바퀴벌레 사건 때문일까, 크레타 하니아의 여행은 아름다운 풍경보다 레프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더 많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두서없이 좀 풀어보자면,
하니아의 멋진 골목을 보여드리고자 엄마, 할머니와 영상통화를 하며 걷다 레프를 만난 적이 있는데 레프는 나의 카메라 화면 속에 얼굴을 들이밀며 환하게 웃더니 화질이 좋지 않아 잘 보이지도 않는 나의 할머니를 향해 '모스트 뷰티풀 그랜마!'를 외쳤다. 병상에 누워있던 할머니에게 '그리스 남자가 할머니보고 한국에서 가장 예쁜 할머니래!'라고 전해드렸더니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이후 지속되는 레프의 친절에 고맙다고 말했더니, '너희 할머니가 너 잘 챙겨달라고 부탁하셨어~'라며 능청을 떨었다.
몇 년 전 음악을 하는 한국인이 자신의 숙소에 묵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가 자신의 숙소 앞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며 공연을 했고, 그 기타를 레프의 딸에게 선물해 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인을 가장 좋아한다고. 그녀가 공연했다던 골목길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어느샌가 레프가 나타나 자신의 핸드폰에 담겨있던 그날의 공연 영상을 보여주었다. 영상 속엔 한 한국인이 내가 앉아있던 알록달록한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레프가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레프는 그냥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과도 곧잘 대화하며 친구가 되었다. 사람을 이렇게도 좋아하는 레프의 큰 숙소에 방이 고작 두 개밖에 없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아늑함과 지저분함의 경계에 있는, 레프가 자신의 삶과 정성을 들여 만든 공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놀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프는 늦은 저녁까지 숙소 1층 주방으로 추측되는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알고 보니 매일 밤마다 인근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받아 길거리 강아지들을 위해 밥을 만들고 있었다. 레프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과도 친구였다.
레프와 헤어지던 날, 레프는 우리에게 '이제 바퀴벌레 안무섭지?' 라며 다시 한번 확답을 받으려는 듯 물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바퀴벌레를 손으로 때려잡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용기가 솟아났다. 난 '그날만큼 큰 녀석은 여전히 싫지만, 작은 건 무섭지 않아,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세계여행을 하며 만난 그 어느 누구보다 주먹만 한 바퀴벌레를 때려잡던, 사람 냄새가 폴폴 나던 레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의 공간에 새로운 게스트를 맞이하며 예상치 못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