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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을 따라 도시를 걷다

색감에 홀리다

by 행복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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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coh GR3X

밤이 되면 도시는 원래의 색을 잃는다. 붉고 푸르고 노랗던 간판들이 검은 벽 속으로 스며들고, 자동차들의 잔열만이 공기 속을 떠다닌다. 그 와중에도 길 위에는 사람들이 있다.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무심히 걸어가는 발걸음. 나는 횡단보도 앞에서 그들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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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coh GR3X

그들의 얼굴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표정에는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담겨 있으니까. 피곤함, 기대, 권태, 외로움 같은 것들. 우리는 때때로 너무 많은 걸 읽어버린다.

횡단보도의 흰 선은 마치 무대의 조명 같다. 사람들은 그 빛 속에 짧게 등장했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내 삶도 어딘가에서 이렇게 스쳐 지나가고 있을까.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며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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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coh GR3X

개를 데리고 나선 사람이 지나간다. 개는 발랄한데, 주인의 걸음은 무겁다. 다음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자.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지만 어쩐지 힘이 빠져 보인다. 그리고 검은 외투를 걸친 여자가 지나간다. 그녀는 발걸음을 늦추며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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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coh GR3X

신호가 바뀌자 나는 발을 떼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내 그림자가 가로등 불빛 아래로 길게 늘어난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또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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