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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과 끌림 사이의 불연속, 그럼에도 사랑

기고글 아카이빙

by 신우

이 글은 대학교 교지 기고글로 아카이빙을 위해 업로드합니다.

24년 1월경 작성된 글입니다.



무연정 무성애자입니다.


여기 설렘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성에게건 동성에게건, 호감을 지닌 상대 가 세심하게 챙겨주어도 감동은 받을지언정 데이트하고 싶다는 끌림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이들이 있다. 상대에게 헌신적으로 굴며 일상을 공유하면서도 연인관계로 ‘발전’ 하는 것만은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서로를 아끼는 연인 사이이건만, 상대가 성적인 교류를 요구하는 것에 불편해하거나 어색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무연정자 혹은 무성애자라고 부른다.


세상은 이들에게 각박하다. 미디어는 설렘과 끌림과 성적인 긴장도로 가득 차 있고, 연애를 하지 않음은 일종의 부족함이다. 솔로는 미완의 존재이고 커플은, 그 중에서도 특히 시스젠더1 여성과 시스젠더 남성의 결합으로 이뤄진 커플이 더욱 완전한 존재이다. 솔크2는 슬프다는 말이 당연하게 돌아다니고, 연애하고 싶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는 이들이 드문 세상이다. 게다가 연애하기만 하면 다인것도 아니다. 둘 사이의 독점적인 성적 교류는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구시대적인 성보수주의적 관점을 지닌 것처럼 여겨진다. 이 모든 세계관에서 한 걸음, 아니 어쩌면 수백 킬로미터쯤 떨어진 이들이 있다. 앞서 말한 무연정자와 무성애자다. 무연정(aromantic)과 무성애(asexual)는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둘의 경계는 흐릿하다. 어디까지가 로맨틱하고 어디서부터는 섹슈얼한지에 대한 논의는 일단 제쳐 두고, 다만 이 둘이 어느 정도 구분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넘어가자. 무연정 유성애자나 유연정 무성애자의 존재가 이미 그 둘이 구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세부적인 분류로 들어가자면 특수한 조건에서만 끌림 을 느끼는 스펙트럼(친밀감이 높은 상대에게만 느끼는 등) 내에서도 섹스 혹은 연애를 대하는 태도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극도로 싫어하기도 하는 반면 어떤 이 들은 각자의 이유에서 이를 즐기기도 한다. 아주 가끔이더라도 성적인 끌림을 느끼는 이들도 있고, 섹시하다는 말 자체가 이해가가지 않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한가지 공통점이라면 이들은 끌림에 있어서 어떠한 불연속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보통의’ 유연정 유성애자들에게는 호감과 연애적 끌림과 성적인 끌림이 하나의 연속 선상에 있다. 누군가는 동시에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는 선형으로 느끼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같은 면에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연애하고 싶은 상대에게 섹슈얼한 끌림을 느끼거나, 섹슈얼한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 연애적 끌림을 느끼는 것은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고, 그것을 당연히 여겨주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무연정자 혹은 무성애자, 혹은 무연정-무성애자는 이중 적어도 하나 이상의 불연속성을 느낀다. 호감을 느끼는 상대라 할지라도 그의 특정 행동에 설렘을 느끼지 않거나, 느낀다고 하더라도 연애적 끌림과는 무관한 것이다. 혹은 연애적 끌림 을 느껴 연애하더라도 성적인 끌림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게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르겠다만, 세상은 이들을 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성별이분법과 이성애가 당연시되는 세상에서 퀴어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당히 대수로운 일이다. 거기서 TQIAP+3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방에서 왜 연애하지 않느냐는 질문, 연애 상대로부터 너는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 네가 아직 좋은 여자 혹은 남자 혹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니 스스로를 예단하지 말 라는 조언, 이외에도 수천 가지의 몰이해와 억압의 말들을 듣는다. 인정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예단했을지도 모른다. 남들과 달라 보이고 싶어서 혹은 연애를 어차피 하지 못할 것 같으니, 핑곗거리를 삼아서 무성애자 혹은 무연정자라고 이 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 참 좋은 사람을,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운명에 가까운 사람을 만나보지 못해서 그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어떠한 부 분에서는 남들과 달리 설렘과 끌림 사이의 명확한 불연속성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LOVE WINS (사랑이 이긴다)


 불연속을 느낀다고 해서 무성애/무연정 스펙트럼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을 모르는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양철 인간4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저 어떠한 상대방을 연애적 대상으로서, 혹은 성적인 대상으로서 끌림을 느끼지 않 을 뿐이지 충분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다. 그저 이러한 사랑은 유별난 우정 정도로 치부되는 세상일뿐이다. 에이엄브렐라5에 속하는 이들의 사랑은 사랑으로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이긴다 ‘love wins’라는 구호는 에이엄브렐라에 속하는 이들 을 포함하지 못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이유다.


다양성을 향한 지속 가능 한 움직임 ‘다움’(이하 다움)에서 2021년 청년 성소수자 사회적 욕구 및 실태조사 6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에이섹슈얼 응답자 140여 명 중 87.9%는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참여하기 어렵다고 응답했다. 이유로는(복수 응답) 지나치게 연애나 성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1위(44.7 %), 성소수자 중에서도 비주류인 정체성을 이유로 배척받는 두려움이 2위(35.8%)로 나타났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가에 대한 질문에도 에이섹슈얼 응답자의 41.4%만이 ‘동의한다.’로 답해 평균치인 61.4%에 비해 낮게 나타났다. 또한 지난 1년간 성소수자로서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한 에이섹슈 얼 중 42.1%는 상담 기관에서 차별을 경험하였다고 답했다. 주로 직장이나 공공기관에서 차별받았다고 답하는 LGBT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love widens’나 ‘사랑이 왜 이겨 내가 이겨’와 같은 슬로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love wins’라는 구호가 갖는 함의가 퇴색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love wins’는 대표적인 퀴어의 구호로 2015년 5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혼 합헌 판결이 나왔을 때 터져 나온 구호이다. 수많은 동성애 혐오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죄악과 타락이라고 명명하는 이들에 맞서 싸워 이뤄낸 승리의 역사가 깃든 구호이기도 하다. 여전히 사랑은 성소수자 혐오를 이긴다는 맥락 속에서 성소수자의 가장 대표적인 구호이다. 수많은 성소수자가 돌봄과 사랑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을 고려하면 이 구호는 다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소수자 혐오는 단순히 개개인의 호불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차별의 문제이다. ‘다움’의 앞선 보고서에 따르면 성소수자의 11.8%는 한 번도 커밍아웃한 적이 없다. 즉, 10명 중 1명 이상이 늘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간다. 또한 전체 응답자 중 절반가량은 가족 중 스스로가 성소수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답했다. 가장 빈번하게 겪은 부정적인 경험으로는 ‘성소수자라 는 것을 알지만 모르는 체했다.’가 약 48%, 언어적 폭력, 대화 회피 등이 뒤를 이었다. 전체 응답자의 41.5%는 최근 1년간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한 것으로 나타났고 이는 일 반 청년(4.8%)의 8배에 이르는 수치이다. 그렇기에 성소수자들에게 사랑과 돌봄에 관한 화제는 일상적인 문제이며 생존의 문제이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올해의 작가상 2023] 중 하나인 이강승 작가의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돌보게 될까(who wil care for our caretakers)>의7 전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어떤 종류의 퀴어이든 대부분의 퀴어는 성소수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경험하고, 사회적인 관계에서 혹은 매우 친밀한 관계에서까지 부정당하는 경험을 겪는다. 이들 내의 관계 또한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기존의 시스젠더-이성애로 이뤄진 가족 체계보다 불안정하다.


나와 서로 돌봄을 주고받던 이가 수술을 해야 할 때 법적 보호자가 아니라는 이 유로 발만 동동 굴러야 하는 일, 그가 죽었을 때 배우자가 아니라서 장례를 치르지 못 하는 일, 상실 이후의 유산을 받지 못하는 일 등, 이러한 일이 향후 몇 년간 지속될 미래가 동성혼이 법제화되지 않고, 하물며 다른 시민결합 제도도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렇기에 퀴어들은 매번 퀴어퍼레이드에서 ‘love wins’를 더 강하게 목소리를 드높여 세상에 외친다. 이는 하나의 소망이자 선언이다. 사랑이 이길 것이라고, 우리의사랑은 언젠가 인정받을 것이라는 외침이다.



Love wins all?


이는 성소수자 뿐 아니라 장애인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만들어진 아이유(IU)의 ‘love wins all’이 비판받는 맥락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지금을 대혐오 시대라 한다. 분명 사랑이 만연한 때는 아닌 듯하다. 눈에 띄는 적의와 무관심으로 더 추워지는 잿빛의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무기로 승리를 바라는 것이 가끔은 터무니없는 일로 여겨질 때 도 있다. …중략… 사랑하기를 방해하는 세상에서 끝까지 사랑하려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공개된 곡 소개의 일부

뮤직비디오에서 남자는 양쪽 눈이 같게, 즉 장애가 없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 상태의 둘은 각각 웨딩드 레스와 턱시도를 차려입고 결혼식을 하며 야유를 퍼붓고 방해하는 이들로부터 도망쳐 냉혹한 현실로 돌아온다. 둘은 계속해서 네모로부터 도망치지만 결국은 대치하게 되고 네모는 위협적인 붉은 색으로 변한다. 다음 장면에서 옷더미 위로 둘의 웨딩드레스와 턱시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이 뮤직비디오를 본 팬들은 감동적이라며 칭찬이 일색이다. 하지만 장애인 혹은 성소수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그러할까? 일단 성소수자의 구호인 ‘love wins’를 사용하면서 그려낸 사랑이 “정상적인” 비성소수자의 유연정 사랑이라는 것은 아쉽다. 수어나 시각장애와 같은 요소를 낭만화8하였다는 비판도 피해 갈 수 없다. 뮤직비디오에서는 의아하게도, 뷔와 아이유가 장애가 없는 채로 애정 행각을 벌일 때, 야유를 퍼붓는 이들이 나온다. 사랑이 모든 걸 이긴다는 제목에서 ‘모든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혐오라는 단어는 싫어함의 의미도 있지만, 대혐오의 시대라고 일컬어질 때의 혐오는 단순히 감정의 영역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집단적인 반발심, 혐오감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사회의 구조적 차별이 장애 혐오, 성소수자 혐오, 외국인 혐오에 쓰이는 혐오의 정의에 훨씬 더 가깝다.


이 뮤직비디오에서는 현실의 장애인, 성소수자에게 닥치고 있는 일상적인 멸시와 조롱, 혐오는 묘사되지 않는다. 지금, 사회적 소수자들이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도 서로 연대하며 기어코 살아내는 투쟁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도둑맞은 가난이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도둑맞은 소수자성이다. 성소수자는 시스젠더 헤테로로맨틱 헤테로섹슈얼의 성정체성을 가진 이들과 그리 다른 이들이 아니다. 하지만, 시스젠더 헤테로 유연정 유성애자들만을 위한 세상에서 우리는 꽤 다른 이들로 치부된다. 장애도 일견 비슷하다.


어떠한 손상만으로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 사회 속에서 맺는 관계 속에서 그 손상은 비로소 장애가 된다.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중


차별적인 사회에 맞서 이긴다. 이걸 가능케 하는 것은 서로를 향한 연대이고 사랑이다. 하지만 이 뮤직비디오에서의 이긴다는 것은 누구를 이긴다는 것인지 불분명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차별의 기제와 혐오의 사회적인 의미를 지워버렸다.


2023년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예년과 같은 시청광장이 아니라 을지로 거리 일대에서 열렸 다. 기독교 단체가 주최하는 행사가 같은 날 신청되었고, 서울특별시는 그 행사가 아동과 청소년에 관한 것이므로 우선순위에 있다고 판단하며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에게 사용 불가를 통보했다. 2023년 생활동반자법9이 화두에 오르자 어떤 정치인들은 동성혼 허용법이라고 얘기하며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정작 동성혼 법제화는 이야기조차 되지 못했다.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과정은 법원과 판사에 따라 때로는 성희롱과 몰이해와 싸워나가는 과정이 된다. 신체적, 사회적 성별 불일치에 의한 불쾌감을10 해소하기 위한 의료적 처치(호르몬요법, 외과적 수술 등)에 대한 지원은 전무하다. 가족으로부터 부정당한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보호하는 제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성소수자들에게 위협 적인 아웃팅11은, 명예훼손죄에 해당하여 배상받을 수는 있지만, 그러한 사례는 소수에 불과할뿐더러 실질적인 삶의 회복에 도움이 되기는 힘들다. 퀴어문화축제 날이면 주변에 특정 종교단체에서 동성애 반대 시위를 연다.



사랑 = 사랑 + 상상력


성소수자들은 때로는 이성애자처럼 행동하기로 강압 받고, 때로는 추악한 면만이 존재하는 상종하지 못할 인간으로 묘사된다. 무연정자들은 연애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의심받고, 무성애자들은 연애 상대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끼는 척 연기하며 살아간다. 비단 연애 과정뿐 아니라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자연스 럽게 나오는 연애 관련이나 섹슈얼한 이야기들에 아무런 ‘이질감’이 없는 척 행동하며 스스로를 속인다. 요새 남친/여친 없냐는 웃어른들의 질문에 억지로 웃어넘기고, 연애나 섹스에 관심 없는 혹은 다른 식으로 관심이 있다는 티를 내지 않는다. 그렇게 살면서 우리가 하는 사랑은 왜 사랑이 아닌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사랑은 사랑일 뿐이라고, 당신의 사랑이듯 우리의 사랑도 사랑이라고 말하며 살아간다. 나는 사랑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믿는다. 다만 그 사랑은 단순히 연애적인, 혹은 성애적인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부성애로 포장되는 가족애로도, 우정으로도 어 쩌면 인류애로도 부족하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며 그 밖의 다양함을 포함하는 사랑이 야말로 사랑이다. 그러한 넓은 의미로서 사랑이다. 사랑이 진정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랑에 상상력을 더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1 시스젠더(cis gender) 트랜스젠더의 반댓말로, 자신의 지정성별과 성별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

2 솔로 크리스마스의 준말, 연인이 없는 크리스마스를 이르는 말

3 퀴어의 LGBTQIAP+ 중 앞의 레즈비언(L), 게이(G), 양성애자(B)를 제외한 트랜스젠더(T), 퀘스 처너리(Q), 인터섹스(I), 에이섹슈얼(A), 범성애(P)를 의미한다.

4 종종 무성애 커뮤니티내에서 무성애자를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사랑을 모르는 양철인간으로 보는 세상의 시선을 빗대어 표현하기도 한다.

5 에이엄브렐라는 무성애, 무연정 스펙트럼을 일컫는 말로 무성애/무연정 안에서의 다양성이 있다 는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이다.

6 다움: 다영성을 위한 지속가능한 움직임, 『2021년 청년 성소수자 사회적 욕구 및 실태조사 결과 보고서』, 2022

7 이강승 작가의 전시 중 사후 성폭력 가해자로 폭로된 김기홍씨를 그린 드로잉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가해고발인이 반발하는 일이 있었지만, 후속 조치 없이 전시가 이어지고 있다.

8 현실적이 아니고 환상적이며 공상적이게 됨. 또는 그렇게 함

9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26일 혼인이나 혈연관계가 아닌 성인 두 사람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내용의 ‘생활동반자법’을 국내 최초로 발의했다. 이 법안은 성인 두 사람이 상호 합의에 따라 일상 생 활과 가사 등을 공유하며 서로 돌보는 관계를 ‘생활동반자관계’로 규정했다. 이들에게 동거 및 부양· 협조의 의무, 일상가사대리권, 가사로 인한 채무의 연대책임, 친양자 입양 및 공동입양 등 혼인에 준 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했다.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서비스, 출산휴가, 인적공제, 가정폭력방지 등의 제도에서 혈연·혼인에 의한 가족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했다. 10 성별 정정 : 현재 트랜스젠더의 성별변경을 위한 법률은 없다. 그러나 2006년 대법원에서 성별 변경을 허가하는 판례가 나온 이후로 개별 법원의 판단에 따라 성별 변경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절차에 대해서는 대법원 내부의 가이드라인인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 에 따라서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 정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10 성별 불쾌감(gender dysphoria)은 출생 시 지정된 자신의 신체적인 성별이나 성 역할에 대한 불쾌감을 뜻한다. 이는 자신의 지정성별과 젠더가 성정체성과 일치하지 않아 발생하는 현상이다.

11 아웃팅(outing)은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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