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이야길 해줬으면 좋겠어.
아내는 화장대 앞에서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뒤편 침대에 걸터앉아서 화장대 거울에 비친 아내의 얼굴을 보고 있다. 하얀색 슬리브리스를 걸친 아내의 어깨너머로 거울이 있고 그 안에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내의 얼굴이 보인다. 손은 화장품 파우치를 분주하게 오가고 있지만 모든 신경은 내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거실을 뛰어다니고 있었고 약속 시간을 맞추려면 우리는 10분 후에는 나가야 했다.
나는 그때의 이야길 아내에게 해야 한다는 부담을 마음 한편에 묵혀둔 채 약물과 상담치료를 받고 가까스로 내 인생에 돌아왔다. 나의 상담사는 이 모든 이야기를 아내에게 털어놓는 게 반드시 필요할 것이며, 이후로도 공개적으로 아내와 함께 다뤄야 한다고도 조언했다. 하지만 그걸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요구받게 될 줄은 몰랐다.
몸이 굳었고 생각이 멈췄다. 잠깐의 침묵으로 생각을 가다듬으려 했다. 뭔가 빨리 답하지 않으면 더 이상한 상황을 만들 거라 마음이 촉박했다.
"나는 과거가 현재의 우리 관계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그것에 대해 이야길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잘 모르겠어. 괜한 일이 되지 않을까."
회피를 선택했다. 뭔가 이유를 대고 있지만 사실 그냥 두렵고 부끄러운 것이다. 아내는 이 주제를 끄집어내서 정면으로 마주 보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거다. 그래서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아내는 그렇게 넘어간다는 게 우리 관계를 계속해서 압박할 수 있는 불안 요소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네가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10분,
그 사이 내가 그 모든 일을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네가 그걸 아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그래서, 뭐랄까요. 그때 사귀셨던 분과...
상담사의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었지만 나는 이 문장을 넘어서지 못했다. 상담사는 말을 멈췄고 뭔가 물을 때 하던 그녀의 습관대로 무릎에 올려뒀던 쿠션을 끌어당기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가 뭔가 대답을 해야 하는 거 같은데 질문을 듣지 못했다.
'사귀었다고.'
그 관계가 그랬었나? 한 번도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모든 정황을 들은 상담사가 이 관계에 '사귀었다'는 꼬리표를 달아주고 나니 이제 생각해보게 된다. 사귄다는 말 자체도 너무 생경했다. 십 대 때나 중요하게 여겼던 단어 같았다.
// 이렇게 풋내 나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관계가 나한테 있었다는 거군요. 두 아이의 아빠인 나한테. 굉장히 문제가 있네요. 그러니까 이건 잘잘못이 있는 상황이에요. 피해자인 아내, 가해자인 나. 그리고..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한 내가 '사귄' 그 여자분. 이렇게 되는 거네요.
반박하고 싶은 생각에 빈정거리는 말들이 떠오른다. 상담사에게 그럴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내 속에선 그렇게 불리는 건 거부하고 싶다고, 전혀 그런 게 아니었고 그저 친한 여자 사람이 있었던 것뿐이었다고, 절대로 아내와의 관계를 배제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항의하고 싶었다. 문제가 되었던 모든 상황의 꼬인 부분들을 설명하고 그 꼬리표를 떼고 싶었다. 누가 뭐라 부르던지 실제 사건들은 바뀌지 않겠지만 그렇게 판단을 받은 것 자체가 두렵고 부끄러워 견디기 어려웠다.
아내는 아이라인을 그리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아내의 질문을 더 직접적으로 요약하면 내가 그 여자를 '사귄'일에 대해, 아내가 발견한 것들 이외의 모든 이야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그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고 내가 언제 언제 그녀를 만났으며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한 파편들을 쥐고 있다. 아내는 그것들을 우연찮게 줍기도 했고 뒤져서 찾아내기도 했다. 그 조각들이 하나하나 발견될 때 아내는 참고, 화내고, 도망치고, 이혼을 요구했었다. 이제 그걸 모두 조립해 보기 위해 나머지 조각들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침대 모서리에 그대로 앉은 채, 그날 상담실에서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던 나를 기억 속에서 더듬어 찾았다. 이제 아내와 상담사 모두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나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기 인식은 자유의 원천이며 따라서 행복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자기 인식의 요소 중 하나는 자기 삶의 시간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기억은 사람을 가두는 감옥이 될 수 있고 뒷걸음질을 강요하기도 하며 미래를 바라보는 홀가분한 시선을 차단하기도 합니다. 기억이 휘두르는 전횡을 막는 방법은 오직 자기 인식뿐입니다. - 페터 비에리, <자기 결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