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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벌린 : 당신이 쓰는 '자유' 개념이 틀린 이유

by 삼중전공생

다음의 것들은 '자유'의 올바른 정의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간주한다면, 극단적으로 '부자유'해보이는 상황까지 실상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1)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내가 토마토를 먹고 싶을 때, 토마토를 먹게 되면 나의 선호가 충족되게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것을 '자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자유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호의 충족은 자유가 아닙니다.


내가 감옥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경우에 나는 마음대로 철창 밖에 나가 뛰어놀 수 없습니다. 이때 내가 "사실 나는 밖에 나가 뛰어놀고 싶지 않아"라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나는 감옥에 갇혀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밖에 나가 뛰어노는 것이 '하고 싶은 일'이 되지 않으면 설령 그것이 타인에 의해 금지된다고 하더라도 나의 자유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정부의 억압적인 통제를 받는 티베트 고승을 떠올려 봅시다. 티베트의 고승은 세속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자신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금지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합시다. 자유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 티베트 고승은 여전히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직관과 분명히 충돌합니다. 따라서 선호의 자발적 충족은 자유의 올바른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2) "나의 진정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


사람들은 종종 마약 중독자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마약 중독자가 중독 증세에 이끌려 마약을 찾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마약 중독자가 마약에 중독되지 않고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더라면 그 자신에게 명백하게 해로운 마약을 갈구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마약 중독자가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마약을 끊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약 중독자에게서 마약을 강제로 뺏어가는 것은 마약 중독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오히려 그를 자유롭게 되도록 도와주는 행위가 됩니다.


어린 아이를 그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로 학교에 앉혀 수업을 듣도록 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아이의 자유를 침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아이를 자유롭게 만드는 행동이 됩니다. 아이가 교육을 통해서 품성적으로 성숙한 어른이 된다면, '아, 어릴 때는 몰랐지만 어른이 되어 현명한 상태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학교 교육이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지금 밖에 나가 뛰어놀고 싶은 어린 아이의 의사를 억압하고 책상에 앉혀 수업을 듣도록 만드는 것은 아이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진정한' 이익, '계몽된' 선호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자유의 올바른 정의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진정한' 이익인지 그 정답을 항상 찾을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를 믿을까, 불교를 믿을까'이 고민 중에서 우리는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계몽되지 못하고, 진정으로 현명하지 못해서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본래 정답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열렬한 이슬람 신도들이 나의 집에 찾아와 알라를 믿으라고 강요한다고 합시다. 그때 나는 이슬람을 믿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고 칩시다. 자유를 '나의 진정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이때 열렬한 이슬람 신도들이 "너는 이슬람이 너의 진정한 이익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상태이니, 우리는 너가 자유롭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 이슬람교를 강요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내가 강제로 세뇌를 당해 이슬람교도가 되어 이슬람교를 믿기 전의 나를 돌이켜 보니 '이슬람교를 믿기 전의 나는 '진정한 진리'를 깨닫기 전이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강제로 자유롭게 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자유'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3) "하고 싶은 일을 실제로 할 수 있는 것"


나의 지갑에는 현재 3만원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백화점에 진열된 2천만원 짜리 시계를 사고 싶습니다. 3만원으로 2천만원 짜리 시계를 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물론 내가 백화점에서 시계를 사는 것을 방해하거나 금지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백화점에서 시계를 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경우에도 내가 '부자유'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자유' 그 자체와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은 다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자유로워야 한다고 믿는데, 만약 자유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능력'까지 함축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당장 시계를 사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2천만원씩 쥐어 줘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현가능하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부적절한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가 침해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평등한 자유'라는 관념을 양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자유'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명목적으로만 보장되는 자유보다 실제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더 유용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자유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의 충족'이 다르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 올바른 정의는 무엇일까요?


이사야 벌린은 "소극적 자유"라는 개념을 제안합니다. '자유'란 '나의 선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소극적 자유'의 개념에 따르면 내가 얼마나 자유로운가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선택지가 열려있고 그런 선택지들이 나의 인생에게 가지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지를 내가 실제로 선택하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잠재적 선택지에 대해서 장애물이 없다면 나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 정부의 억압을 받는 티베트의 고승은 자신이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지 간에 '부자유'한 상태가 됩니다. 이슬람 신도의 종교 강요를 받는 나 또한 그들로 인해 내가 다른 종교를 믿을 선택지, 혹은 종교를 믿지 않을 선택지를 제한당하기 때문에 '부자유'한 상태가 됩니다. 지갑에 3만원 밖에 없지만 2천만원 짜리 시계를 사고 싶은 나는 내가 시계를 사는 것을 막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시계를 실제로는 살 수 없음에도 여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장애물'이란 '의도적인 것'어야 한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태풍이 불어서 갈 수 없는 경우에는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태풍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그것은 선택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 애당초 선택지 자체가 없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방해가 없었더라면 선택지가 나에게 열려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어떤 남자가 고의로 내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면, 그 남자의 의지에 따라 내가 집에 돌아갈 수도 있으므로 이때 나는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유'를 이상한 의미로 정의하는 사람들도 많고 자유를 이상한 의미로 정의해놓고 자신이 자유주의자라고 떠드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속지 말아야 하고 그런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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