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성리학과 귀신 :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이유

조선 성리학에서 제사를 통해 귀신과 소통한다는 것은

by 삼중전공생

이 글의 목적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인이 영원히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인에게 했던 후회되는 행동이나 말들 때문에, 혹은 고인과 좋은 시간을 더 많이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미련이 남았거나, 고인과 앞으로 더 좋은 날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모든 감정은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가 없는 많은 세속적인 한국인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불분명한 확신과 믿음 때문에 이 과정이 더 힘들고 지칠 수 있습니다. 여하간의 방식으로 고인이 다른 세상에서 잘 지낸다고 믿는 종교인에 비해서, 세속적이고 현세추구적인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납득해야 하는 사실이 더 무겁기 때문입니다. 고인과 내가 죽음이라는 경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함께 한다고 믿고 싶은데, 머리로는 '영원히' 고인을 만날 수도 소통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썼습니다. 사라져가는 문화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가정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제사는 유교 문화권에서 원래 조상과 고인을 기리기 위해 지내는 추모 행위입니다. 만약 조상과 고인을 위해 제사를 지낼 계획이 있거나 이미 그래왔다면, 그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이 고인을 건강하게 기리는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사에 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면 고리타분하고 철지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나면 생각이 바뀔 거라고 믿습니다. 이 글은 사람들을 옥죄고 고생시키며 온갖 근거 없는 미신들로 점철된 제사를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고인을 기리는 추모'로서의 본래적 의미의 제사를 알리는 글로서 기획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동양철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인을 떠나보내지 못해 마음 고생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실용적인 위안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학술적인 오류를 감수하고 친절한 설명을 위한 왜곡도 다소 과감하게 사용했습니다. 또 글의 흐름을 끊는 레퍼런스도 거의 달아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글은 제 브런치의 다른 글들과 성격이 다소 다릅니다. 그 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공자가 제사를 강조한 이유


공자가 활동하던 춘추전국시대에는 사회 혼란이 극심해 자식이 부모를 죽여 재산을 빼앗거나, 부모가 자식을 노예로 팔아먹는 일이 횡행했습니다. 이런 엉망진창인 모습을 지켜본 공자는 '사회가 멀쩡히 돌아가려면 직전에 잘 나갔던 주나라 시절의 도덕질서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자의 예(禮)는 그런 차원에서 언급되었습니다.


공자 이전까지만 해도 이 예(禮)는 단순히 주나라 귀족이나 왕실에서 지켜지던 '형식적인 상도덕 혹은 매너'를 지칭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공자가 주나라 시절의 예법과 사회질서를 강조하면서 예(禮)는 처음으로 윤리적인 의미가 있는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禮)가 강조되다 보니 초기 유교는 대단히 현실주의적이고 합리적이었습니다.


공자가 귀신과 죽음을 묻는 제자의 질문에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답하며 명확한 언급을 피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공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망자일지라도 웃어른에 대한 예(禮)를 지키는 문화를 만들고 퍼뜨려 사회의 도덕질서가 바로서는 것이지 귀신의 유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조상신의 존재를 주장하며 복잡한 제사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것 같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던 사람이라면 놀랄 수도 있는 부분이겠습니다.


하지만 공자가 귀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공자는 예(禮)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논어』에서 "祭如在, 祭神如神在"라고 하여,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이) 계신 것처럼, 귀신에게 제사 지낼 때도 (귀신이) 계신 것처럼 하라"고 한 바 있습니다. 이는 공자가 예(禮)의 일환으로 제사를 강조하면서도,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신령이 강림하여 우리 곁에 함께한다'는 당대 사람들의 인식과 믿음을 인정하고 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공자의 태도 아래 귀신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제사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하려는 유학자들의 노력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공자 사후에 편찬된 『예기』〈제의(祭義)〉편에는 "衆生必死, 死必歸土, 此之謂鬼... 其氣發揚于上, 爲昭明・焄蒿・悽愴"라고 하여, "모든 생명체는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니 이를 귀(鬼)라 한다. 뼈와 살은 땅속에서 썩어 흙이 되지만, 그 기(氣)는 위로 솟아올라 빛을 발하기도 하고 연기처럼 피어오르기도 하며 애달픈 기운을 내기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기술은 유학적 차원에서 귀신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내놓으려는 시도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설명하기 위해 말은 이렇게 했는데, 기(氣)라든가 귀(鬼) 같은 말은 사실 현대인에겐 익숙하지 않고 뜬구름 잡는 미신 같은 소리처럼 들릴 수 있겠습니다. 이는 동양철학을 처음 접할 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편견입니다. 그러니 기(氣)나 리(理), 귀(鬼)나 신(神)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피할 수 없겠습니다.




동양철학이 설득력 있는 이유


1. 기(氣)적 세계관


기(氣)라는 말은 사실 생각해보면 일상에서 자주 쓰입니다. "기가 막힌다!", "기세가 좋다", "기운이 없다" 같은 문형에서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거나 만져지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것'으로서의 기(氣)에 대한 아이디어가 현대에도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런 직관적인 느낌들은 꼭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할 만한 게 아니기도 합니다.


의사가 아무리 병이 없다고 돌려보내도, 뭔가 허하고 기력이 없어 피곤한 날이 분명 있습니다. 또 분명히 눈에 보이거나 만져지는 차이는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팀 선수들은 다들 풀이 죽은 것처럼 느껴지고 적팀 선수들은 기세등등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변화가 있을 때 그것을 '느끼고' 그것을 지금도 활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도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을 과학에서 쓰이는 용어나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느끼고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해야 할까요? 아니, 그전에 애초에 우리가 '느낌'으로만 아는 이 미묘한 감각을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담아낼 수 있기나 할까요?


김연아 피겨 선수가 수많은 노력 끝에 '트리플 악셀' 기술을 터득했다고 합시다. 김연아 선수가 탁월한 말솜씨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걸 후배 선수에게 언어만으로 설명하고 가르칠 수 있을까요? 아마 못 할 겁니다. 그건 직접 겪고 체험하면서 배우는 부분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느낀다는 기(氣)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겪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고 애당초 말로 전달을 못하는 '체험'이자 '느낌'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언어 활동으로 만들어진 학문인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좋습니다. 이 기(氣)라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사고실험을 하나 해봅시다. 우리가 현대 과학에 대한 지식이 모두 삭제된 채로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그 무인도에 떨어진 사람들은 "기운이 없다" 같은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까요? "스트레스 호로몬인 코르티솔이 과다 분비됐다" 이렇게 말할까요? 아닐 겁니다. 다소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언젠가부터는 "기(氣)가 허한가 보다"와 같은 식으로 말하게 될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근대 과학이 알려지기 이전, 동양이 딱 그랬습니다. 동양에서는 그 기(氣)를 바탕으로 세계관을 만들었고 사고했습니다. 그럼 그것이 "비과학적인가?"라고 묻는다면, 현대적 의미의 과학은 아니니 비과학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것이 "사이비인가?"라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입니다. 즉 기(氣)는 비과학이지만 사이비가 아닙니다. 느낌과 체험의 영역이고 직감으로 알아채는 것이기에 과학 이전에 언어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인간이라면 느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또 사이비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귀(鬼)나 신(神)


고대 동양인들은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것이 기(氣)라고 봤습니다. 현대어에 굳이 비유하자면 기(氣)를 에너지나 파동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에너지의 역학이 바로 리(理)입니다. 우리가 일상어에서 "돌아가는 상황이 이치에 맞다"고 표현할 때 그 '이치'가 바로 리(이, 理)와 같은 취지의 말입니다. 이 기(氣)가 흐트러짐 없이 절묘하게 리(理)의 방식에 알맞춰 일치되면 그곳에 바로 도(道)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길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건 곧 "우주 만물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질서 또는 원리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것과 똑같은 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귀(鬼)와 신(神)은 바로 이 기(氣)가 발현하는 양상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신이라고 하면 God이 먼저 생각나지만, 사실 정신(精神)이라는 단어도 한자를 보면 신(神)이 들어갑니다. 우주 만물이 기(氣)로 이뤄져있고, 이 만물에 인간의 멘탈도 당연히 포함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점을 알게 된다면 동양철학에서 신(神)이란 자연의 작용으로 맑고 청명한 기(淸氣)가 정밀하고 오묘하게 응결되어 있는 것을 지칭할 뿐이라는 사실이 더 잘 와닿을 것입니다. 귀(鬼)도 비교적 탁하고 혼탁한 기(濁氣)의 응결을 말할 뿐입니다. 그러니 귀신(鬼神)이라는 단어를 보고 단지 처녀귀신이 사람들 놀래키는 것만 생각나는 현대인의 귀신(鬼神)에 대한 이해도는 얼마나 얄팍한 것이겠습니까?


지금까지 논의로 기(氣), 귀(鬼), 신(神) 등에 대한 오해가 대체로 풀렸다면 이제 제사와 관련된 성리학의 귀신론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리학에서 보는 제사에 고인이 모셔지는 원리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朱熹)는 사람이 죽으면 기(氣)가 흩어지지만 고인과 한 핏줄로서 같은 기(同氣)를 지닌 자손들이 한데 모여 마음 속에 지극한 정성(誠)을 다하면 고인의 기(氣)와 후손이 잠시나마 감응(感應)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리하여 고인의 귀신은 일상에선 없는 듯하지만(若無), 후손의 정성에 따라 언제든 응하는(若有) 음양二氣의 신묘한 작용이며, 제사란 그 정성을 바쳐 고인을 "오시게 하는" 예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모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낼 필요는 없습니다. 성리학에서도 제사는 4대조(高祖, 曾祖, 祖父, 父)까지로 한정짓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정서적 한계 때문입니다. 제사에서 잠시나마 고인을 모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고인과 피를 나눈 혈족들이 고인을 마음 속 깊이 추모하고 떠올리며 마치 '지금 함께 있는 것처럼' 제사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5대조 이상이 되면 인간의 자연 수명을 고려할 때 서로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제사를 지낸다고 해도 '정성을 다해 기를 모으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음 속에 고인을 진지하게 기리고 추모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4대조 위로는 제사를 지낼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주희는 『주자가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祭之所及者,不過四代,情之所至也。四代之外,情不能至,則雖欲祭之,將安所施乎?
제사를 지내는 대상은 4대를 넘지 않으니, 이는 인간의 정이 미칠 수 있는 한계이다. 4대가 지나면 정이 미치지 못하므로 비록 제사를 지내려 해도 어디에 효를 베풀 수 있겠는가?


『주자가례집설(朱子家禮集說)』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氣之感應,至於四代則漸微矣。
기(氣)의 감응은 4대에 이르면 점점 미약해진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조선 시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제사를 지내려고 했는지 와닿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제사 절차가 복잡해지고 제사상 제물이 늘어나는 폐단이 있기도 했지만, 제사는 기본적으로 '후손들이 모여 고인을 깊이 추모하며 고인의 기를 소환(?)하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그런 소환술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고인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지닌 사람들의 마음과 진심이지 호화로운 제사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문헌에는 물 한 잔만 떠다놔도 정성(誠)만 있으면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게 추석연휴에 해외여행을 가도 고인과 함께 떠날 수 있다는 취지로 읽혀서는 곤란하겠습니다. 고인을 모시는데는 그래도 일정한 요건과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글을 관심있게 읽었다면, 이제는 동양에서 수천 년간 효험이 있더라고 알려진 제사의 현대적인 번안을 소개하겠습니다. 고인을 기리고 모시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제사의 실천 : 고인과 함께하기


1. 재계(齋戒): 정성스런 준비로 마음 정화하기


제사를 지내는 동안 고인을 떠올리고 기리는데 온 정신을 쏟아야 하기에 제사를 지내기 며칠 전부터 잡념을 떨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목욕을 하거나 제사 3일 전부터 술과 고기를 끊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마음입니다. 실제 옛 기록에는 재계 기간 동안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던 모습, 좋아하시던 음식과 취미까지 깊이 생각하라고 권했습니다. 이렇게 고인을 생각하며 마음을 맑히는 시간을 보내면, 재계를 시작한 지 사흘쯤 지나 마음 눈앞에 고인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준비 과정을 거쳐 제사 당일, 제사를 지낼 방에 들어서면 "그분의 혼령이 반드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제사를 마치고 방을 나설 때는 "마치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것처럼" 숙연한 마음이 든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실제 옛사람들은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부모의 혼령이 눈앞에 나타난다"고까지 표현했습니다. 결국 제사의 핵심은 정성과 사랑입니다. 이러한 정성이 극에 달하면, 굳이 기적 같은 현상이 없더라도 우리는 마음으로 고인과 통하게 됩니다. 感慕如在(감모여재), 즉 "그리움이 지극하여 살아 계신 것처럼 느껴진다"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재계의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2. 영신례(迎神禮) : 고인의 혼을 정중히 모시는 절차


2.1. 강신(降神) 또는 영신(迎神) : 제사를 시작할 때, 먼저 고인의 혼을 모시는 의식을 행합니다. 현대 가정에서는 사진이나 위패(遺牌, 지방)를 모시고, 대문을 살짝 열어둡니다. 그리고 향을 세 번 피우는 동작(분향)을 하는 동시에 제사상을 마주한 자손이 큰절을 올리고, 정중히 축문(祝文)을 읽어 고인을 초청합니다. 축문은 “몇 년 몇 월 몇 일에 손주 누구누구와 자손들이 모여, 당신을 위해 정성껏 예를 올립니다. 부디 강림하시어 흠향해 주시옵소서.”와 같이 고인께 드리는 편지 형태의 글입니다.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자손의 정성 어린 목소리입니다. 자손의 정성이 깃든 부름에 따라, 고인의 혼이 자손들 곁으로 내려온다고 믿는 단계입니다.


2.2. 진설(陳設)과 전폐(奠幣) : 제사상에 제물을 갖추는 일입니다. 제사 음식은 평소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 위주로 준비합니다. 고인을 위한 잔치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간소화되었지만 지방(紙榜)을 써서 고인의 성함과 직위를 적어 모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방이나 위패는 말하자면 고인의 영혼이 임시로 머무르는 자리로, 제사상 위 중앙에 모셔집니다.


2.3. 초헌(初獻) : 초헌관(제사를 주관하는 이)이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의식입니다. 정해진 술잔에 술을 따라 올리는 헌작(獻酌)을 세 번 반복합니다. 전통적으로 홀수 3은 양(陽)이라 하여 길한 수로, 세 번 술잔을 따르는 것은 지극한 정성의 표현입니다. 이어서 다른 참여자(아헌관, 종헌관)가 차례로 술잔을 올리는 아헌(亞獻), 종헌(終獻)을 진행합니다. 이때 모사 그릇이라고 작은 그릇에 조금씩 술을 따로 덜어 놓는데, 이는 땅에 따르는 예주(酹酒)의 변형으로, 지신(地神)과 주변의 다른 신들에게도 예를 갖추는 의미가 있습니다. 술잔을 올릴 때마다 모두 두 번 절을 하는 재배례로 예를 표합니다.


3. 교감과 흠향(歆饗) : 고인이 음식과 마음을 받으심


이제 고인이 강림하여 자리를 함께 하고 계신다고 상정합니다. 제사를 지내는 가족들은 모두 고인이 앉아 계신 듯 행동하고 예를 올려야 합니다.


3.1. 진찬(進饌) : 모든 음식을 고인께 드리는 절차입니다. 이미 상에 음식이 진설되어 있지만, 형식적으로 메(밥그릇)과 갱(국그릇)의 뚜껑을 열어 올리는 동작을 합니다. 이때 숟가락과 젓가락을 각각 밥그릇과 반찬에 꽂거나 올려 둡니다. 이러한 동작은 "자, 드십시오"하고 식사를 권하는 의미입니다. 이 동안은 비록 우리의 육안으로는 혼령을 볼 수 없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인께서 음식의 향과 정성을 흠향(歆饗)하고 계심을 믿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조상이 오시면 자손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한다고도 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의식 중 묵념으로 대신하지만, 이 시간은 곧 고인과 마음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음식을 올리는 과정에서 고인에 대한 추억과 감사의 마음을 새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3.2. 축문 봉독과 잔행(酌行) : 이때 다시 한번 정식으로 축문을 봉독하기도 합니다. 이후 아헌관과 종헌관이 차례로 다시 술을 올립니다. 이는 두 번째, 세 번째 잔을 올려 마무리하는 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초헌관이 첨작(添酌) 절차를 수행하는데, 이는 첫 잔을 올렸던 초헌관이 다시 한 번 술잔을 채우는 것입니다.


4. 송신례(送神禮)와 음복(飮福) : 고인을 배웅하고 은덕을 함께 나누기


이제 제사의 마무리 단계인 송신(送神), 즉 고인의 혼을 다시 떠나보내드리는 의식입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보내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중히 작별 인사를 드리는 절차가 이어집니다.


4.1. 사신(辭神) : 마지막으로 모두 한 번씩 절하며 고인께 작별을 고합니다. 전통 예법에는 합문(闔門)과 계문(啓門) 의식이 있어 문을 닫았다 다시 여는 형식을 취하지만 현대 가정에서는 방의 문을 한번 여닫는 시늉을 하거나 생략하기도 합니다. 이어 밥그릇에 꽂아 두었던 숟가락과 제물 위에 놓았던 젓가락을 거두어 시접(匙楪)에 가지런히 놓고, 열어두었던 밥그릇의 뚜껑을 다시 덮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가족이 함께 큰절로 배웅을 드립니다.


4.2. 분축(焚祝) : 앞서 읽었던 축문을 불살라 태우는 의식입니다. 축문을 향로의 불에 태워 재로 만들고, 그 재를 향로의 재 속에 묻습니다. 이렇게 하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재는 땅에 돌아가는데 이는 곧 고인의 혼(魂)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고, 넋의 또 다른 부분인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되어 따라서 분축은 제사 동안에는 고인의 혼을 잠시 모셔와 교감했고, 이제는 다시 본래 위치로 환원시켜드리는 과정이 됩니다. 이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고인의 혼을 예우하여 모시고, 즐겁게 해 드리고, 돌아가시도록 배웅하는 전 과정이 제례 의식입니다.


4.3. 음복(飮福) : 모든 예식이 끝나면, 제사상에 올렸던 음식을 가족이 나누어 먹는 것을 음복이라고 합니다. 고인이 드시고 남긴 복된 음식(餘膳)을 자손이 먹는다 하여, 복을 함께 나눈다는 뜻입니다. 가족들은 제사상이 치워지면 둘러앉아 준비한 음식을 같이 먹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인에 대한 담소를 나누기도 합니다. 이로써 다 함께 고인을 추억하고 기리게 되며, 이것이 바로 제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교감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제목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