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잘 쓰지 않는 우리 말로, 지금은 잘 모르는 옛 음식들을 이야기하는 책. 이 책을 내고 김서령 작가는 돌아가셨다. 안동 김씨 가문의 전해내려오는 음식과 엄마의 손맛이 어우러진 '조선 엄마의 레시피'를 읽으며 때로는 추억에 잠기고, 때로는 양반 가문의 꼿꼿함에 치를 떨기도 했던 시간이었다. 책을 읽고 우리는 배추적을 먹었다.
지난 모임의 낭독이 좋았던지, 발제자가 이번에도 낭독을 시켰다. 다들 자신에게 감회가 깊었던 구절들을 낭독하며 자연스럽게 먹는 이야기를 나눴다.
수수는 수수 몫이, 나는 내 몫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위안한다. 그래도 지금 나는 저 수수밭의 수수가 뭔지 부럽고 몹시 켕긴다. 저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며 늙어갈 수 있을까. 저렇게 방심하듯 자유롭게 온 몸을 바람에게 내맡길 수 있을까. 그러는 중 머리 꼭대기에서 절로 익은 알곡으로 출렁, 고개 숙일 수 있을까.
교보문고의 백만년된 나무 탁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는 은은, 급기야 책을 다 읽고 친구와 연락해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가고 싶었으나 사정상 김천(김밥천국)에 가서 5그릇을 해치웠다고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리틀 포레스트>에 나왔던 김태리의 음성지원을 느끼며 읽었다고. 은에게 어른의 모습이란 싱크대에서 설거지하는 뒷모습이었고, 어린 시절에는 엄마 설거지를 곧 잘 도와드리기도 했다. 어린 시절 소금을 좋아해서, 장롱 속에 숨어서 천일염을 한 알씩 먹었다는 은의 추억에 다들 빵터졌다. 은의 소울푸드는 엄마가 만들어준 (하얀) 미꾸라지국이다. 미꾸라지 1Kg에 소금, 참기름, 물만 있으면 되는 레시피. 그러나 독거인들은 모두 미꾸라지 1Kg에 이미 넉다운되었다. 그걸 사와서 손질할 수가 없기에...
"웅후 에미, 자네는...죽디라도....그 손은....끊어놓고 가게."
뜻은 격한데 말은 느리고 고요하다. 곁에 앉았던 부내 할매가 그 말을 조금 수정한다.
"손을 못 끊그들랑 그려라도 놓고 가게."
호박뭉개미 한 그릇에 이토록 과도한 칭찬이 쏟아지자 윗목에선 엄마 뺨이 발갛게 상기된다.
"아이고 아지매들도... 어찌 그루꾸(그렇게)...."
바깥에 칼바람이 쌩쌩 불어 문풍지가 부르릉 울어도 방안은 포근하고 안온하다. 그때까지 입을 열지 않던 가일 할매가 빠질 수 없다는 듯 한마디를 보탠다. 가일 할매의 칭찬은 훨씬 실질적이다.
"아이고~ 내 제사상에는...웅후 에미 호박뭉개미만 있어도 될따..."
할머니들의 찰진 사투리를 흉내내어 읽은 영은 부모님이 경상도 쪽이라 사투리를 알고 있어 책을 읽는 재미가 더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시멘트 위에 파란색 타일이 붙은 부엌이 창고처럼 쓰이고 있었는데, 엄마가 심부름 시킬 때면 "파란 부엌 가서 가져와라" 했던 기억이 있다. 떡국 위에 김, 지단 등을 얹어 먹는 줄로만 알았는데, 시댁 갔더니 꾸미를 따로 많이 만들어서 각자 식성에 맞춰 넣어 먹게 한 것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게다가 엄마는 쑥국에 된장을 풀지 않았다. 된장보다 훨씬 순한 날콩가루를 다박다박 묻혔다. 콩가루를 하얗게 입은 쑥국은 봄이 왔다는 신호다. 새로운 일 년을 살아낼 대지와 태양과 바람의 에너지, 그게 쑥이란 형태를 빌려 우리 밥상 위로 성큼 올라왔고 우리 식구들은 그 쑥국을 한 그릇 퍼먹고 순하게 잠들었다.
이 책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던 옥은 양반가의 꼿꼿함과 보수적인 태도가 남아있어 못마땅했다고. 그러나 부모님이 채집생활을 하셔서 다슬기를 직접 잡아다가 국을 끓이고, 그걸 가족들이 잘 먹으니까 자녀들이 시집, 장가 간 뒤에도 자꾸 보내시는데 상해서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장에서 산 닭을 사다 끓여서 요리를 하셨는데 닭에 양념하는 걸 옷을 입힌다고 하셨다. 옛닭은 옷을 잘 입었는데, 요즘 닭은 아무리 유기농이라고 해도 옷을 잘 입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다들 놀라워 했다.
수박의 검정 라인은 실제로 검정이 아니라 가장 두터운 초록이다. 숲의 밀도가 가장 두터워졌을 때, 이파리가 수천 겹 겹쳐졌을 때의 무성함의 컬러가 바로 수박색이다. 어째서 수박은 밭에서 자라는 주제에 깊은 숲빛을 제 몸에 구현해낼 수 있었을까.
직접 음식해주는 엄마와 평생 같이 살고 있는 현에게 이 책이 특별한 책은 아니었다. 이 책에 나오는 엄마 이야기를 현의 엄마도 밥을 먹을 때마다, 음식을 할 때마다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걸로 <오늘도 집밥>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 책 읽기 전에 읽은 권여선의 음식에세이 <오늘 뭐 먹지>와 비교하자면 권여선의 책은 담백하고 재밌었는데, 이 책은 미사여구가 많고 힘든 점이 있었다. 수박의 색 부분을 선택한 것처럼 현의 집에서만 먹는 음식으로 수박껍질 무침이 있다.
그러려면 그 교육 장소는 부엌 이상 가는 곳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고추를 손바닥으로 비벼보고 냄새 맡고 마늘을 까고 찧고 오이를 분지르고 가지와 파를 결대로 찢고 늙은 호박 껍질을 닳은 숟가락으로 벗기고 양파와 토마토의 단면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며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맵고 짜고 달고 쓰고 신맛을 혀끝에 올려놓고 전율할 때 인간은 우주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기심과 탐욕과 분노와 공포 같은 걸로 흐려진 인간성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선하고 고운 그 무엇, 썩은 감조 속에서 길어 올리는 매끄러운 녹말 같은 그 무엇, 어쩌면 인이거나 사랑이거나 자비라고 불러도 좋을 그 무엇, 바로 그것을 대면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 너그러운 장소가 저 산꼭대기 선방이나 성균관의 명륜당이 아니라 부엌이라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김서령 작가와 10년 정도 차이가 나는 정은 자기 세대부터 이 맛의 단절이 왔던 것 같아 미안하다고 느꼈다. 여자들이 더 잘 할 수 있는 부분인데 못했다고. 어린 시절 동생이 방에서 부뚜막으로 뛰어내리는 장난을 치다 화상을 입었던 기억과 설 지나고 폭설이 내려 휴교령으로 학교 갔다 돌아온 동생들과 빌려놓은 전기후라이팬에 피자를 만들어 먹은 기억을 나누었다. 국민학교 소풍 때마다 엄마가 김밥에 오보로(분홍색 명태 보푸라기)를 넣어줘서 인기가 많았다.
발제자 영은 음식 뿐만 아니라 단어의 보존 차원에서 이 책이 무척 의미있다고 봤다. 솥뚜껑을 걸어놓은 부뚜막이 아직도 기억에 선연한 영은 할머니가 술 담그고 난 뒤의 술지게미를 먹여서 어린 시절 술에 취한 기억이 있다. 자두주가 어찌나 맛있는지 퍼먹다 기절했다고. 자기 집에서만 먹은 걸로는 뜨물국이 있는데, 그냥 쌀가루에 물을 타서 끓인 건데 그걸 먹으면 속이 편하고 감기가 낫는다고. 요즘도 고향 내려갔다 오면 엄마가 쌀가루를 빻아 넣어주시곤 한단다.
포는 외가에 아궁이와 큰 솥에 있었고, 아궁이에 불 땔 때 고구마를 구워먹은 기억이 있다. 책에서는 보단지 타령을 채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신도 함께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자기 집에서만 먹던 걸로는 김치와 밥을 넣어 끓이는 밥국을 소개했다. 아버지가 멸치 육수를 내서 끓이는 라면도 맛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로 '밥블레스유'의 푸드테라피 코너를 따라 익명의 상담자들에게 음식으로 처방전을 내는 시간을 가졌다.
"당췌 이해불가 90년대생 후배들"
아니, 제가 꼰대가 된 겁니까? 요새 어린 애들이 하나같이 그런 겁니까? 내가 사주는 밥이며 커피며 홀랑홀랑 잘도 얻어 먹으면서 지들은 커피 한 잔 살 줄을 아나, 뭐 먹을 게 있어도 권할 줄을 아나. 지들끼리 쑥덕거리기는 얼마나 쑥덕거리는지 빈정이 상해서 원. 이꼴저꼴 보기 싫어서 요즘은 속 편하게 혼밥을 자주 합니다. 주머니와 마음의 여유만 두둑하면 먹을 건 끝도 없네요. 혼밥이 편하긴 하지만 날마다 메뉴를 고르기도 힘드네요. 얄미운 후배들 생각 싹 잊게 해줄 좋은 혼밥 메뉴 없을까요? (참고로 여기는 가로수길 근처입니다)
후배들과 커피 마실 때 카운터 앞에서 모양새도 안빠지면서 각자 커피는 각자 계산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 만들 방법도 알려주세요.
: 이에 대해선 이미 혼밥생활자인 남편의 경우를 알려주며 '좀 걸어가야 하는 곳이 있는 단골집'을 만들라는 조언이 있었다. 회사 사람들과 적당히 떨어지면서도 주인장이 아는 단골이면 혼자 먹기 부담스럽지 않다고. 또 혼자 먹을수록 고급스럽게 1인용 야키니쿠나 샐러드, 1인용 보쌈을 추천하기도 했다.
추가 질문에 대해서는 "내꺼 먼저 주문할게."가 마법의 용어로 채택되었다. 90년생인 한 멤버는 요즘 90년대생들은 더치페이에 대해 거부감이 없으므로 자기 것만 계산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마음 놓으라고도 했다.
"사장놈, 아니 사장님 입 좀 꿰매 주세요"
아니, 시도 때도 없이 "여자가, 여자가 말이야" 먹던 밥으로 사장놈, 아니 사장님 입 좀 틀어막고 싶어요. 울컥해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 굴뚝 같은데 일개 직원이 별 수 있나요. 근데 웃기는 건 사장도 자기가 그런다는 걸 알아서 "내가 말이 지나치면 좀 알려줘."라고 하면서도 계속 그런다는 거! 사장님 입닫고 먹을 수 있는 침묵의 점심 메뉴 없을까요?
성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해대는 사장님의 말버릇 좀 고칠 좋은 방법도 추가로 받습니다.
: 이에 대해선 이구동성으로 '빨리 나와서 빨리 먹고 일어날 수 있는 메뉴'를 추천했다. 말을 덜하게는 못할테니 밥 시간이라도 짧으면 좀 낫지 않겠냐는 거. 아니면 육개장처럼 매운 음식을 먹으면 말수가 좀 줄어들지 않겠냐는 대안도 나왔다.
추가 고민에 대해선 "여자가"할 때마다 1만원씩 받으라는 안이 나왔다. 좋은 안이라고 다들 박수쳤다.
"아휴~ 내가 대체 왜 이럴까앙"
올해 들어 뭐에 홀린 듯 마구 일을 벌리고 있어 4월 내내 앓고 있습니다. 회사 일에 애도 챙기고 살림도 해야 하는데 벌려놓은 사업에 운동까지. 거기다 없던 여행 욕심까지 흘러넘치고...막상 벌려놓고 보니 제가 왜 그랬을까 싶네요. ㅠ.ㅠ 뭐 하나 대충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타임테이블 만들어서 촘촘하게 계획하다 보니 머리도 몸도 병들고 있습니다. 흑흑. 그래도 시작한 일이니 잘 해내고 싶긴 합니다. 몸과 마음 둘 다 일으킬 수 있는 음식 좀 없을까요? 추가로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힘든데, 스스로를 덜 혹사하는 방법 없을까요?
: 많은 사람들이 몇가지 일을 그만두라고 조언했다. 과격한 이는 이 모든 걸 다 하고 대신 사표를 내라고 했다. 회사 일을 안하면 좀 덜 바쁠테니까.
그만두지 못한다면 은의 엄마가 끓여주신 미꾸라지국과 조개순두부탕을 추천한다. 예술의전당 앞 백년옥에서 파는 두부전골 강추!
2019년 4월 20일 오전 11시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김서령 | 푸른역사)
참석자 7명
이렇게 음식 얘기를 두 시간 하고 났더니 얼른 밥 먹으러 가야겠다 싶어졌다.
이번 책과 잘 어울리는 합정 한옥집에서 점심도 먹고, 배추적도 한 테이블에 하나씩 시켜 먹었다. 따끈따끈하고 포근한 게 영혼을 감싸주는 힐링되는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