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6.
신형철은 감히 말하건대 지금 한국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문학평론가다. <몰락의 에티카>와 <느낌의 공동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이어 이번에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평론집을 들고 왔다. 세월호와 개인적인 일(아내의 수술)을 겪으며 슬픔에 천착하게 된 평론가의 사려깊고 아름다운 문장들을, 우리는 필사하고 낭독했다. 그러면서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이 10년 뒤 우리를 더 아름답게 하길 바랐다.
백낙청의 평론집에서 시작해 김연수의 앤솔러지를 거쳐 대학생 독자들과의 만남에서 했던 얘기를 통해 인간은 달라지기 힘들지만, 문학이 어쩌면 나를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줄지도 모른다고 희미한 낙관을 비춘 에세이. 이 꼭지를 낭독한 영1은 "내가 섬북동을 하는 이유, 읽고 쓰는 이유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이 들어 있어" 이 꼭지를 골랐다. 광은 대학생들을 만났을 때 작가가 멘토로서 위선적인 이야기를 하는대신 "앞으로 꽤 많은 것들이 여러분 뜻대로 안 될 겁니다."하며 솔직하게 말해줘서 좋았고, 정은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는 부분에 밑줄을 쳤다. 옥은 "과연 문학이 10년 뒤의 나를 더 좋아지게 할까요?"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이라는 단편의 맨 마지막 기도문을 '허무에 계신 우리의 허무님..'으로 번역한 비평. 은1은 "허무에 계신 우리의 허무님"을 소리내어 읽고 싶어서 이 글을 골랐다. 우리 모임에서는 예전에 헤밍웨이 단편집을 읽은 적이 있고, 그 단편집 안에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이 들어 있었다. 그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이 글을 읽으니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다고들 했다. 이 비평집에는 그런 글들이 아주 많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토니 다키타니'와 심보선의 시 '매혹'을 통해 연인이 있었다가 없어진 후의 고독을 이야기하며, 행복이란 불행하지 않을 때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밝힌 글. 고독한 우가 이 꼭지를 다 읽고 나자 여기저기에서 "아.."하는 탄식이 들렸다. 그만큼 좋은 글이었다.
옥은 이 책의 글이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별로라 톤이 왔다갔다 한다는 느낌이 들지만, 고독이나 슬픔에 관한 글들은 너무나 좋았다며 이 꼭지도 좋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영화 '토니 다키타니'의 포스터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텅빈 공간이 고독으로 꽉 찼다는 신형철의 표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에 수록된 '포기'와 '어젯밤' 평론.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글을 낭독한 포는 116p 중간까지 읽다가 너무나 궁금해 책을 덮고 도서관에 가서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을 빌려 두 단편을 다 읽은 후, 나머지 후반부를 읽었다. 선을 긋는다는 것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이 좋아서 이 글을 골랐으며, 세월호의 부모들이나 고 김용균 씨의 엄마가 그 사건 이후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며 읽었다고 한다.
은1은 모든 글들의 마지막 문장이 좋지만, 특히 이 꼭지는 첫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너무 좋다고 했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가 첫문장이고, '나도 당신도 그런 시간 속에 정지 화면처럼 서 있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가 끝문장이다. 이 책은 좋은 마지막 문장 사례집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는 견해를 밝혔고, 다들 동의했다. 우는 이 글의 전반부가 자신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대변해준다고 했다.
옥은 머릿말 중 책표지 그림에 대한 글, 즉 지난 책에선 배를 같이 타고 있었는데, 이번 책에선 슬픔에 빠진 이의 뒷모습 그림이라는 설명을 읽었다. 옥이 볼 때 이 책은 앞부분이 압도적으로 좋았고, 머릿말이 책의 전부를 요약한 글이라고 했다. 은1은 앞이 좋아야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편집자들이 그렇게 편집했을 거라고 했다. 멤버들이 이 책을 읽고 보게 된 영화와 책 이야기를 했는데, 우는 이 책에 소개된 영화 <혜화, 동>과 <어떤 시선>을 봤고, 정은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었다. 은2는 드라마는 잘 기억하는데 책을 잘 기억하지는 못한다. 이 책을 보니 그 이유가 여러번 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이제부턴 책을 기억해보고 싶다고 했다.
돌아가신 황현산 평론가의 <밤이 선생이다>에 자주 쓰인 '~인 것은 아니다', '~라고 하기는 어렵다', 일명 '황현산 부정문'을 통해 본 황현산의 의식과 인품에 관한 글. 이 꼭지를 읽은 영2는 황현산 정도의 나이가 되면 대체로 꼰대가 많은데, 그 나이에도 꼰대가 되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유연함인 것 같다고 했다. 모임에는 <밤이 선생이다>를 읽은 세 사람이 있었는데, 둘은 바로 그 문체(약간은 비겁해보이는) 때문에 황현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 다시 한번 황현산을 읽어보고 싶어졌다고 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아이유의 '제제' 논란을 통해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알려주는 글. 특히 수시면접 온 여학생이 "그 이중성 자체가 학대받은 아이의 특징이에요." 하는 부분에서 다들 뒷통수를 맞은 듯 했고, 울컥했다. 이 꼭지를 읽은 현과 정은 아이유의 '제제' 논란 때 신형철처럼 나이브하게 이해하던 쪽이라 이 글이 더 와닿았고, 은1은 그 논란 이후 아이유를 싫어하게 되었다고 했다. 영1은 아이유에게 이 글을 보내주고 싶다고 했고, 영2는 그렇지만 제제사태 당시 아이유에게 악플을 달았던 이들 역시도 폭력적이었다고 했다. 정은 학대받은 아이의 이중성에 관해서 영화 <도희야>를 추천했다. 불판 위에 구워지는 고기를 보면서도 힘겨운 한강 작가님과 달리 우리는 고기를 보면 먹고 싶어질 것 같다고 포는 말했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가 케니언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했던 이야기로, 인간은 태어날 때 초기설정(디폴트 셋팅)을 가지고 있는데, 이 초기설정의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글이다. 이 글을 낭독한 은1은 남에게 별 관심이 없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 이 글을 보고 반성을 했다. 은2는 맞장구치며 슬픔 조차도 다른 사람의 슬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슬픔을 바라보는 나의 슬픔을 생각한다며 반성했다.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환상의 빛>에 대한 평론. 가장 행복한 때에 선로에 뛰어들어 죽은 남편의 뒷모습을 잊지 못하는 아내의 이야기. 해석되지 않은 뒷모습을 품고 있는 소설이야말로 순수소설이라는 글을 읽은 경은 자신이 생각하는 문학의 정의가 이 글에 나와 있다고 했다. 한 사람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을 보여주는, 작은 진실을 건드리는 것이 문학인데, 그런 의미에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그에 부합하는 소설이라고 했다. 영2는 내가 알던 사람이 어떤 곳에서 이제까지 내게 보여주던 것과 다른 표정을 보여줄 때가 있는데, 그런 때가 문학의 순간이 아닌가 한다고 했다.
보수의 반대말은 진보가 아니라 민주라고 외치는 꼭지. 그랬을 때에야 보수=반민주라는 실체를 알게 된다. 광이 이 꼭지를 선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럴 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광은 목청을 돋궈서 글을 읽었다. 옥은 이 책의 시사비평은 별로였지만 이 글은 좋았다고 했다.
성소수자 군인 문제를 거론하며 어슐러 르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인용한 글. 정이 이 글을 택한 이유는 다른 글들도 잘 썼지만, 특히 이 꼭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짜여져 있어 밑줄긋기를 따로 떼어낼 수가 없어 전체를 베낄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했던 정재승의 <열두발자국>에도 '신중하게 검토해'보는 것의 폐해를 이야기했는데, 자연과학 쪽에서도 그럴 정도로 우리나라의 시기상조 리스트는 끝도 없다.
이렇게 참석자들이 각각 골라온 글을 한 꼭지씩 낭독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2시간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이 책과 신형철의 평론에 대해 한 마디씩 했다. / 올해의 책을 벌써 읽어버렸다 / 정확하게 쓰는데 차갑지 않아 좋았다 / 지식 과시가 없고 비겁하지 않아 좋다. 평론가에 대한 편견을 깨준 평론가. / 곱씹을 문장들이 곳곳에 있는 책 / 아껴서 보고 싶은 책 / 이제껏 평론은 시간 없을 때 요약하고 보고서를 쓰기 위해 읽는 책이었는데 평론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 이 책에 대한 멤버들의 한 마디.
지금 슬프지 않다면 남의 슬픔을 감싸줄 여유를 가지자. - 재포
따뜻한 시선과 적확한 언어의 '굉장한' 만남!! - 경영
완전히 푹 빠지지는 못했지만 어떤 글들은 써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경
몰라서 회피한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 함께 나누고 싶어진 슬픔. - 매옥
지금까지 이런 평론은 없었다 - 다우
한 단어 한 단어 공든 그 문장들은 집요하지만 지루하지 않아서 나는 멈칫멈칫하며 또 읽고 또 읽고. - 승은
아껴가며 읽고 싶은 슬픔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 - 미현
슬픔을 공부하자! 누군가를 단정짓지 않기 위해... - 재광
때때로 좋은 글은 힘이 세다! - 유정
이 책을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 책이 되었습니다. - 주은
2019년 4월 6일(토)
책 _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발제자 _ 이유정
참석자 _ 1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