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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 Apr 07. 2019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019. 4. 6.

신형철은 감히 말하건대 지금 한국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문학평론가다. <몰락의 에티카>와 <느낌의 공동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이어 이번에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평론집을 들고 왔다. 세월호와 개인적인 일(아내의 수술)을 겪으며 슬픔에 천착하게 된 평론가의 사려깊고 아름다운 문장들을, 우리는 필사하고 낭독했다. 그러면서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이 10년 뒤 우리를 더 아름답게 하길 바랐다.

자신들이 읽을 문장을 손글씨로 베껴적은 노트를 모아보았다

174p _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백낙청의 평론집에서 시작해 김연수의 앤솔러지를 거쳐 대학생 독자들과의 만남에서 했던 얘기를 통해 인간은 달라지기 힘들지만, 문학이 어쩌면 나를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줄지도 모른다고 희미한 낙관을 비춘 에세이. 이 꼭지를 낭독한 영1은 "내가 섬북동을 하는 이유, 읽고 쓰는 이유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이 들어 있어" 이 꼭지를 골랐다.  광은 대학생들을 만났을 때 작가가 멘토로서 위선적인 이야기를 하는대신 "앞으로 꽤 많은 것들이 여러분 뜻대로 안 될 겁니다."하며 솔직하게 말해줘서 좋았고, 정은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는 부분에 밑줄을 쳤다. 옥은 "과연 문학이 10년 뒤의 나를 더 좋아지게 할까요?"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58p _ 허무, 허무, 그리고 허무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이라는 단편의 맨 마지막 기도문을 '허무에 계신 우리의 허무님..'으로 번역한 비평. 은1은 "허무에 계신 우리의 허무님"을 소리내어 읽고 싶어서 이 글을 골랐다. 우리 모임에서는 예전에 헤밍웨이 단편집을 읽은 적이 있고, 그 단편집 안에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이 들어 있었다. 그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이 글을 읽으니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다고들 했다. 이 비평집에는 그런 글들이 아주 많다.


290p _ 고독과 행복에 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토니 다키타니'와 심보선의 시 '매혹'을 통해 연인이 있었다가 없어진 후의 고독을 이야기하며, 행복이란 불행하지 않을 때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밝힌 글. 고독한 우가 이 꼭지를 다 읽고 나자 여기저기에서 "아.."하는 탄식이 들렸다. 그만큼 좋은 글이었다.

옥은 이 책의 글이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별로라 톤이 왔다갔다 한다는 느낌이 들지만, 고독이나 슬픔에 관한 글들은 너무나 좋았다며 이 꼭지도 좋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영화 '토니 다키타니'의 포스터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텅빈 공간이 고독으로 꽉 찼다는 신형철의 표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마시고 텅빈 잔의 모음과 책의 더미들

115p _ 삶이 진실에 베일 때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에 수록된 '포기'와 '어젯밤' 평론.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글을 낭독한 포는 116p 중간까지 읽다가 너무나 궁금해 책을 덮고 도서관에 가서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을 빌려 두 단편을 다 읽은 후, 나머지 후반부를 읽었다. 선을 긋는다는 것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이 좋아서 이 글을 골랐으며, 세월호의 부모들이나 고 김용균 씨의 엄마가 그 사건 이후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며 읽었다고 한다.

은1은 모든 글들의 마지막 문장이 좋지만, 특히 이 꼭지는 첫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너무 좋다고 했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가 첫문장이고, '나도 당신도 그런 시간 속에 정지 화면처럼 서 있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가 끝문장이다. 이 책은 좋은 마지막 문장 사례집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는 견해를 밝혔고, 다들 동의했다. 우는 이 글의 전반부가 자신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대변해준다고 했다.  


7p _ 두번째 산문집을 엮으며 

옥은 머릿말 중 책표지 그림에 대한 글, 즉 지난 책에선 배를 같이 타고 있었는데, 이번 책에선 슬픔에 빠진 이의 뒷모습 그림이라는 설명을 읽었다. 옥이 볼 때 이 책은 앞부분이 압도적으로 좋았고, 머릿말이 책의 전부를 요약한 글이라고 했다. 은1은 앞이 좋아야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편집자들이 그렇게 편집했을 거라고 했다. 멤버들이 이 책을 읽고 보게 된 영화와 책 이야기를 했는데, 우는 이 책에 소개된 영화 <혜화, 동>과 <어떤 시선>을 봤고, 정은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었다. 은2는 드라마는 잘 기억하는데 책을 잘 기억하지는 못한다. 이 책을 보니 그 이유가 여러번 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이제부턴 책을 기억해보고 싶다고 했다.

 

354p _ 황현산의 부정문 

돌아가신 황현산 평론가의 <밤이 선생이다>에 자주 쓰인 '~인 것은 아니다', '~라고 하기는 어렵다', 일명 '황현산 부정문'을 통해 본 황현산의 의식과 인품에 관한 글. 이 꼭지를 읽은 영2는 황현산 정도의 나이가 되면 대체로 꼰대가 많은데, 그 나이에도 꼰대가 되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유연함인 것 같다고 했다. 모임에는 <밤이 선생이다>를 읽은 세 사람이 있었는데, 둘은 바로 그 문체(약간은 비겁해보이는) 때문에 황현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 다시 한번 황현산을 읽어보고 싶어졌다고 했다. 


94p _ 폭력에 대한 감수성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아이유의 '제제' 논란을 통해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알려주는 글. 특히 수시면접 온 여학생이 "그 이중성 자체가 학대받은 아이의 특징이에요." 하는 부분에서 다들 뒷통수를 맞은 듯 했고, 울컥했다. 이 꼭지를 읽은 현과 정은 아이유의 '제제' 논란 때 신형철처럼 나이브하게 이해하던 쪽이라 이 글이 더 와닿았고, 은1은 그 논란 이후 아이유를 싫어하게 되었다고 했다. 영1은 아이유에게 이 글을 보내주고 싶다고 했고, 영2는 그렇지만 제제사태 당시 아이유에게 악플을 달았던 이들 역시도 폭력적이었다고 했다. 정은 학대받은 아이의 이중성에 관해서 영화 <도희야>를 추천했다. 불판 위에 구워지는 고기를 보면서도 힘겨운 한강 작가님과 달리 우리는 고기를 보면 먹고 싶어질 것 같다고 포는 말했다.


369p _ 인간의 디폴트에 대하여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가 케니언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했던 이야기로, 인간은 태어날 때 초기설정(디폴트 셋팅)을 가지고 있는데, 이 초기설정의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글이다. 이 글을 낭독한 은1은 남에게 별 관심이 없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 이 글을 보고 반성을 했다. 은2는 맞장구치며 슬픔 조차도 다른 사람의 슬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슬픔을 바라보는 나의 슬픔을 생각한다며 반성했다.

그 날 이화여대에 피었던 벚꽃

54p _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환상의 빛>에 대한 평론. 가장 행복한 때에 선로에 뛰어들어 죽은 남편의 뒷모습을 잊지 못하는 아내의 이야기. 해석되지 않은 뒷모습을 품고 있는 소설이야말로 순수소설이라는 글을 읽은 경은 자신이 생각하는 문학의 정의가 이 글에 나와 있다고 했다. 한 사람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을 보여주는, 작은 진실을 건드리는 것이 문학인데, 그런 의미에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그에 부합하는 소설이라고 했다. 영2는 내가 알던 사람이 어떤 곳에서 이제까지 내게 보여주던 것과 다른 표정을 보여줄 때가 있는데, 그런 때가 문학의 순간이 아닌가 한다고 했다.


218p _ 보수의 반대말은 민주  

보수의 반대말은 진보가 아니라 민주라고 외치는 꼭지. 그랬을 때에야 보수=반민주라는 실체를 알게 된다. 광이 이 꼭지를 선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럴 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광은 목청을 돋궈서 글을 읽었다. 옥은 이 책의 시사비평은 별로였지만 이 글은 좋았다고 했다.


205p _ 시기상조의 나라 

성소수자 군인 문제를 거론하며 어슐러 르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인용한 글. 정이 이 글을 택한 이유는 다른 글들도 잘 썼지만, 특히 이 꼭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짜여져 있어 밑줄긋기를 따로 떼어낼 수가 없어 전체를 베낄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했던 정재승의 <열두발자국>에도 '신중하게 검토해'보는 것의 폐해를 이야기했는데, 자연과학 쪽에서도 그럴 정도로 우리나라의 시기상조 리스트는 끝도 없다.


이렇게 참석자들이 각각 골라온 글을 한 꼭지씩 낭독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2시간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이 책과 신형철의 평론에 대해 한 마디씩 했다. / 올해의 책을 벌써 읽어버렸다 / 정확하게 쓰는데 차갑지 않아 좋았다 / 지식 과시가 없고 비겁하지 않아 좋다. 평론가에 대한 편견을 깨준 평론가. /  곱씹을 문장들이 곳곳에 있는 책 / 아껴서 보고 싶은 책 / 이제껏 평론은 시간 없을 때 요약하고 보고서를 쓰기 위해 읽는 책이었는데 평론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 책에 대한 한마디 

- 이 책에 대한 멤버들의 한 마디.

지금 슬프지 않다면 남의 슬픔을 감싸줄 여유를 가지자. - 재포

따뜻한 시선과 적확한 언어의 '굉장한' 만남!! - 경영

완전히 푹 빠지지는 못했지만 어떤 글들은 써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경

몰라서 회피한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 함께 나누고 싶어진 슬픔. - 매옥

지금까지 이런 평론은 없었다 - 다우

한 단어 한 단어 공든 그 문장들은 집요하지만 지루하지 않아서 나는 멈칫멈칫하며 또 읽고 또 읽고. - 승은

아껴가며 읽고 싶은 슬픔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 - 미현

슬픔을 공부하자! 누군가를 단정짓지 않기 위해... - 재광 

때때로 좋은 글은 힘이 세다! - 유정

이 책을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 책이 되었습니다. - 주은


2019년 4월 6일(토)

책 _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발제자 _ 이유정

참석자 _ 1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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