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처리되어도 알아볼 사람은 알아본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주변에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연예계에 들어와서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고 무당을 찾아다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치인, 재벌집 못지않게 점쟁이들이 판을 치는 곳이 연예계이다. 영화 개봉 날짜를 놓고, 이번에는 대박칠 것인지를 놓고, 캐스팅을 놓고 수많은 관계자들이 점을 본다. 제작자도, 감독도, 배우도, 매니저도, 작가도 점을 본다. 워낙 불안한 일을 하는 곳이라 그런 것 같다.
연예인들이 점쟁이와 친하다보니 연예 기자들도 그렇다.
우리 회사에 단체로 들어온 선배 기자들에게도 단골 점쟁이가 있었다.
00도령(청담이었나 강남이었나? 하여튼 서울 강남 쪽 지명의 도령)이었다.
전 회사 대표와 사이가 안 좋았던 편집부 기자들은 일괄 사표를 쓰기 전, 00도령을 찾아가 사표를 써도 좋을지 물어봤다고 한다. 00도령이 거기를 나와도 분명 더 좋은 길이 열린다고 해서 일괄사표를 썼는데, 우리 회사에 전격 채용됐으니 그에 대한 신뢰도는 더 올라갔다.
00도령은 박수무당이었는데, 얼굴이 반반하고 나이가 어려서(20대) 요즘의 셀럽 같은 대우를 받았다. 당시에 신세대 무당이라며 유명세를 타, 잡지와 TV에 인터뷰도 종종 했다.
그도 젊은 청년이라 또래 여자들과 노는 걸 좋아해 선배기자들과 가끔 만나 술도 마시고 친분을 다졌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 그런 자리에 따라간 적은 없다.)
선배 기자들 중 한 선배가 있었다.
자기 취재원인 DJ DOC와 사이가 안좋아 나에게 넘겨준 선배였다. 성격이 강한 편이라 편집장과 트러블이 있었고, 수석기자와도 사이가 안 좋았다. 계속 갈등을 빚다가 그녀는 결국 회사를 관뒀다.
잡지 기자였으니 막연히 다른 잡지사에 들어갔겠거니 했다.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퇴근해서 TV를 틀었다가 그 선배를 봤다.
선배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 채로 인터뷰하는 화면이었다.
알고 보니 00도령이 여자 관계가 복잡했다. 그냥 연애관계만 난잡했다면 사생활이니까 그런 시사고발 프로그램에 나올리 없는데, 연애를 미끼로 여자들을 등쳐먹는 짓을 반복했다. 월급도 안주고 일을 시킨다거나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고 돈을 빌려 안갚거나, 양다리는 기본 서너다리씩 걸치는 등 죄질이 나빴다.
그래서 ‘00도령의 사기사건’에 대해 시사고발프로그램이 취재를 해서 내보냈고, 거기 선배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 채 나온 것이다.
평소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즐겨 보지도 않는 내가 하필 퇴근해서 채널을 돌리다가 딱 그 선배 인터뷰 장면을 봤다.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 되어있는데도, 음성과 말투를 들으니 빼박 그 선배였다. 00도령이 사랑한다면서 결혼 하자고 해서 동거생활을 시작했고, 직원으로 부리면서도 월급 한 푼 주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쇼크 먹었다.
당연히 어디 다른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을 줄 알았던 선배가 00도령의 애인 노릇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편집장에게 대들고, 대차게 자기 주장을 하던 선배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저런 말도 안되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순정을 바쳤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다.
아...정말 사람이란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구나, 더구나 연애 문제는 일 문제와는 180도 다를 수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
다음 날, 회사에 간 나는 어제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00선배를 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배들은 바로 연락망을 돌려 그 선배가 00도령 밑에서 일했던 게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됐고, 재방송을 통해 그 프로그램을 봤다.
그 일을 겪으면서 알게 되었다. TV에서 아무리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음성변조를 해도 그 사람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아본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