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작가와 함께한 느린동네 행궁동 두 번째 이야기
행궁동을 처음 오는 것은 아니었다. 문화재에 관한 업무로 나는 이곳에 들른 적이 있는데, 아름다운 수원화성보다도 내 마음을 동요시킨 것은 동네의 묘한 분위기였다. 사실 문화재 근처에 있는 동네들은 보통 적막한 곳에 있고는 했는데 행궁동은 조금 달랐다. 시끌벅적했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를 걷고 있었고, 곳곳에 공방과 미술관이 있었다. 다정했다. 다시 한번 와보겠다고 마음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지금의 행궁동으로 만들어준 ‘예술’을 거리에서 찾기 위해 다시 행궁동을 찾았다.
예술을 전공한 내게 행궁동에서 가고 싶은 곳은 너무 열 군데가 넘었지만 나는 추리고 추려, 딱 네 곳을 선정했다. 대안공간 눈, 벽화 거리, 경수갤러리, 수원시립미술관. 네 곳이라면 오늘 하루를 풍만하게 보낼 수 있을듯했다. 따사로운 일요일 오후, 나는 대안 공간 눈으로 향했다. 공간으로 향하는 길에는 외로운 여행자를 반기는 듯 수많은 벽화와 조형물이 수놓여 있다. ‘예술공간 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미 ‘대안공간 눈’에서 ‘예술공간 봄’이라는 명칭으로 바뀐 지는 오래였다. 명칭은 바뀌었지만, 오래 전부터 유지된 모습 그대로였다. 행궁동 예술인들의 놀이터. 나는 그곳이 궁금했다.
공간을 꾸리는 이로부터 나는 간략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997년 수원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수원 화성은 아름답게 복원되었지만, 마을은 급격하게 쇠락해 갔다. 2003년, 김정집 관장은 이 집을 대안공간으로 조성했다. 당시 수원시 인구는 100만이 넘었음에도 개인 화랑이 없었다. 초라한 골목길에서 시작된 공간의 관람객은 초창기에는 100명도 안 되었지만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그리고 이곳에 오래전부터 터를 잡아 온 마을 사람들과 함께 뚜렷한 색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행궁동의 예술은 이곳에서부터 지펴졌다. 나는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겨진 마당을 마주하고 앉아 옛 모습을 스케치한 엽서에 색을 입혔다. 한올 한올 이곳에 색을 입혀간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행궁동 예술의 걸음을 첫발을 내디뎠다.
다시 거리를 나오니, 커다란 벽화들이 반겼다. 커다란 물고기가 오래된 여인숙 앞을 헤엄쳤다. 사실 우리나라에 수없이 있는 벽화 마을에 대한 큰 기대가 별로 없다. 나 역시 미술학도로서, 이런 벽화 마을을 꾸리는 것은 대부분 나 같은 미대생들이 여름을 맞아 아르바이트를하거나 봉사활동을 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행궁동의 벽은 달랐다. 세계 유수의 작가들을 이곳으로 불러, 마을 주민들과 함께 그림을 그려나갔다. 타국에서 온 젊은 예술가들은 이곳의 어르신들을 아빠처럼 여기며, 그렇게 골목의 색을 탄생시켰다.
한참 예술에 빠져 거리를 걷다 보니 배가 고파왔다. 파스타 마저도 예술이라 부르짖는 경수갤러리로 향했다. 사실 음식점을 갤러리 화 시킨 것 자체가 상당히 나이브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게의 철제문을 열고부터 기대감이 한껏 드높아졌다. 헤밍웨이와 피카소의 ‘살롱’을 모티브한 경수갤러리. ‘봉골레 파스타’와 이름부터 예술적인 차 ‘춤을 추는 법을 알려주세요’를 시킨 후 나는 전시장을 둘러본다. 직관적인 작품들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젊고 실험적인 작가들이다. 작품실 정면에 적힌 관장의 말에서 나는 무릎을 탁하고 쳤다. ‘추상과 개념을 바라볼 때 정답은 없습니다. 작가는 자신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퀴즈를 내는 게 아닙니다. 천천히 즐겨보세요. 어려울 건 없습니다.’
음악과 예술, 미식과 사람. 모든 것이 행궁동이란 거리 한복판에 있는 이곳에서 더 이상 예술은 어려울 필요가 없었다. 가장 쉽고 다정한 것. 우리의 무료한 일상을 차분히 달래주는 것. 내가 바라는 예술의 지향점과 비슷했다.
한참을 바라보다 자리에 앉으니 이미 파스타는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만큼 밀도 있게 관찰할 수 있는 작품이 많았다. 도슨트 없이도 친절한 설명이 붙여진 덕에 한참이나 머문 덕분이기도 했다. 경수 갤러리의 쉐프는 혼자 온 내게 서비스 빵을 내주며 인사한다.
“혼자 오셨나 봐요. 음식도 먹고, 예술도 천천히 즐기다 가세요.”
예술 여행의 마지막으로, 시립 미술관을 들렀다. 조각가 에르빈 부름의 전시가 성황이었다. 입장료는 단돈 4,000원이지만 수원 시민이면 대폭 할인, 예술인 패스를 소지하고 있으면 무료,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은 무료다. 나는 몇 권의 얄궂은 책을 냈다는 이유로 무료로 미술관을 즐길 수 있었다. 서울의 상설 전시들에 쏟아부은 전시비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전시장 내에 가득 찬 사람들, 그리고 즐길 거리를 한데 모아놓은 이곳 덕에 생기가 넘친다. 예전의 시립미술관이라고 하면 조금 딱딱한 인상이 강했는데, 아무래도 수원 시립 미술관의 전시 기획자들의 연령대가 나랑 맞나 보다. 현대미술을 이토록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니. 취향이 닮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전날부터 인스타그램을 뒤져본다. 갖가지 이유로 무료 이벤트를 한다. 즉석 사진 촬영 이벤트, 에코백 증정 이벤트 밸런타인데이에는 사탕을 준다. 나는 이토록 대중성 넘치는 예술에 또 한 번 감사하며 전시장을 둘러본다.
조각가 에르빈 부름은 원래 회화를 하고 싶었지만, 점수가 조금 모자라 ‘조각’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각을 전공한 나는 괜히 뻘쭘해졌다. ‘사실 나도 그런데, 저 작가처럼 솔직하진 못했지.’ 국문학과로 복수 전공하는 꼼수를 쓰며 하고 싶은 갖가지 일을 다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처럼 잘 써먹은 편에 속할 수 있겠다. 그런 그와의 말과는 다르게, 전시장에서의 그는 질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쉽고 재밌게 조각을 풀어갔다. 작품 속에 관객을 쉬이 끌어들였다. 그가 만든 냉장고를 표방한 작품은 어린애들이 머리를 넣어보느라 성화였다. 덕분에 나 역시 작품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데이트하는 커플에게 사진을 찍어 줄 수 있냐는 부탁과 함께 작품 속에 내 머리를 쓱 집어넣었다. 바라보는 전시장의 벽에는 그의 말이 걸려있다.
‘결국 예술은 무엇이건 간에 삶에 대한 어려움을 다루기 마련이다.’
예술은 어렵지 않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예술가가 살아 숨 쉰다. 동네 주민 모두가 예술가가 되어 만든 거리. 다정하고 쉬운 예술로 가득 찬 유일무이한 행궁동의 골목길. 곳곳이 예술로 점철된 이곳에서의 걸음이 참으로 가볍다. 누구나가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골목, 행궁동의 여행을 마친다.
여행작가 안시내
1993년생.
느린 삶을 살아가는 여행자.
여행과 사람 그리고 사랑에 관한 글을 씁니다.
‘악당은 아니지만 지구정복’ 외 5권의 책을 썼습니다.
@sinaeannn
시내 작가 다녀온 행궁동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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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행'을 소개하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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