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작가와 함께한 느린동네 행궁동 이야기
서른 후반쯤으로 보이는 방송작가 A는 행궁동을 걷던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기, 문화재로만 알려져 있는데 아니에요. 여기 수원 사람들한테는 서울의 한강 같은 곳이에요. 해가 질쯤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 맥주 한 캔을 하곤 했죠.” 그녀는 종종 나를 볼 때마다 자신의 동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는 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쯤은 행궁동으로 향한다고 말했다. 수원의 사람들은 보통 이곳에서 논다고. 나는 언제나 로컬들이 모이는 곳을 찾고는 했다. 그런 곳에는 언제나 사람 냄새가 났다.
장안문을 거쳐 가기 위해 버스에서 일찍 내렸다.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소녀들은 햇살을 맞으며 해사한 웃음을 띤 채 행궁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말이지만 제법 쌀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수많은 사람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연인과 가족, 친구들 다양한 무리의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웃음으로 만개했다. 시선은 모두 서로를 향하거나, 골목골목을 이루는 특색있는 가게들로 향해있었는데, 나 역시 오늘은 특별한 공간으로 방문해보기로 했다. 혼자여도 괜찮은 곳.
겉으로 보기에는 트렌디한 카페처럼 보이지만, 아날로그적인 낭만을 취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편지를 쓸 수 있다. 그리고 직접 실링 작업을 해서 편지를 보낼 수 있는데, 그 방식이 상당히 낭만적이다. 1년 치의 캘린더가 벽에 걸려 있고, 내가 원하는 날짜에 편지를 넣으면 해당일에 발송시켜준다. 편지를 쓰고, 양초를 녹이고, 우편함에 넣는 어찌 보면 ‘옛날에 즐겨 했던 어떤 것’을 상기시킨다.
커피를 한 잔 시키고 창가 자리에 앉아 편지지를 꺼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본다. 이메일이나 카톡을 주고받은 건 수 없이 많지만 언제 마지막으로 손 편지를 주고받았더라. 나는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발신인의 설정을 ‘나’로 둔 채, 글을 적어 내려갔다.
행궁동을 걷는 시내에게.
여전히 좋아하는 일을 하는 시내야.
오늘은 혼자서 낯선 거리를 탐험하고 있구나. 다정한 골목이 주는 생기를 온전히 느끼고 있을 거라고 장담해. 언제 어디서든 여행자로 살아가는 너기에, 1년 후에 받는 미래의 너도 그 마음을 잊지 말기를.
나의 생일에 편지를 걸어두고, 다시 거리를 나섰다. 장안문과 수원천, 화성문까지 차례로 걸으며 행복한 이들의 얼굴을 관찰한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의 나는 타인의 표정 속에서 이유모를 감정들을 발견하고는 하는데, 오늘 이 거리에서는 들뜬 마음들을 잔뜩 안았다. 거리를 걷다가 로컬들만 간다는 술집을 발견했다.
‘홀리 워터스’ 교회에서 훔쳐 온 듯한 의자와 메뉴판 덕에 웃음이 터졌다. 엘피판에서는 사장님이 고른 오래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가게는 작았지만 이미 혼술을 즐기는 사람들로 차 있었다. 누군가는 책 한 권과 위스키를, 누군가는 사장님과 대화하며 앉아있었다. 눈앞에 있는 분실물 센터에는 어린 시절 유행한 스티커 사진이 담겨있다. 어떤 사람이 추억을 흘리고 갔을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나의 추억을 되새겨 본다. 오래된 길을 걷고,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보내고, 옛 모습을 간직한 낡은 술집에서 혼자 술을 기울인다.
이곳에 살아본 적이 없음에도 왠지 유년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것처럼, 추억이 서려 있다. 아마 이곳에 머무른 누군가가 계속해서 오래된 것들을 지키고 있는 덕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계속해서 잔을 기울인다. 사장님은 혼자 온 이방인이 외롭지 않도록 계속해서 말을 붙이고 나의 마음에는 작은 골목 어느 벽에 걸려있던 어떤 문장이 스친다.
행궁동 골목길
옛 추억은 사탕처럼 알알이 그리움은 눈처럼 소복소복
여행작가 안시내
1993년생.
느린 삶을 살아가는 여행자.
여행과 사람 그리고 사랑에 관한 글을 씁니다.
‘악당은 아니지만 지구정복’ 외 5권의 책을 썼습니다.
시내 작가 다녀온 행궁동 흔적
#정지영 카페 (인스타그램 링크)
#홀리워터스 (네이버지도링크)
#널담은공간 (네이버지도링크)
'요즘 여행'을 소개하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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