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난 뒤에도 이러한 공간의 냄새는 잔상과 같이 기억되고 각인된다.
_코르뷔지에 넌 오늘도 행복하니, 에이리가족, 네임리스건축 저, 안그라픽스
#런던_로얄 앨버트 홀
가이드북을 뒤적거리다 보니 BBC Proms가 눈에 들어왔다. 복장이 엄격하지 않아 여행자로서 부담이 적을 듯하였다. 예매사이트에서 여행 일자에 관람할 수 있는 공연을 확인하였다. 예매가 치열하다고 들은 터라 늦지 않았을까 하였는데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게다가 1인당 18파운드라는 매력적인 가격으로 예매를 하였다.
한 달 전 즈음하여 주최 측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프로그램에는 변동이 없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지휘자가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에서 야닉 네제 세겡(Yannick Nézet-Séguin)으로 바뀌었다는 내용이었다. 지휘자를 보고 선택을 한 게 아니었던 터라 공연이 취소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였다.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오르는 무대인 만큼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공연은 완벽했다. 곡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내 귀를 홀렸다. 온전히 곡을 느끼고 집중할 수 있었다. 한껏 고양된 나는 다른 관객들은 어떠한지 궁금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연 내내 서서 관람하는 스탠드석이 단연 눈에 띄었다. 고개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관객도 있었다. 여행자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야속하게도 일상의 피로에 지고 말았을 터다. 여행자로서 평일 저녁 공연을 오롯이 누릴 수 있음에 감사했다.
본 공연이 끝나고 나서야 오래도록 Proms가 사랑받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훌륭한 지휘자와 연주자 그리고 프로그램에 이은 Proms의 진수는 무대가 끝난 후에 펼쳐졌다. 공연이 끝나고 박수 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각자의 리듬이 아닌 모두가 하나의 리듬에 맞추어 박수를 쳤다. 눈 앞에 펼쳐진 생경한 풍경에 잠시 얼을 빼앗겼다가 나도 얼른 동참하였다. 그 순간 공연장은 축제의 장으로 변모했다. 수많은 관객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뜨겁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재잘거리는 소리가 섞인 기분 좋은 소음 사이로 비눗방울이 두둥실 떠올랐다. 할아버지 한 분이 비눗방울을 불면서 계단을 내려가고 계셨다. 예상치 못한 매개물은 일상의 공간을 영화처럼 멋진 한 장면으로 연출하였다. 자그마한 소년이 아버지와 손을 잡고 비눗방울을 불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할아버지는 그때의 소중한 기억을 추억하면서 지금도 매년 둘만의 의식을 행하고 있는 건 아닐까. Proms는 개인의 삶과도 함께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물 같았던 찰나의 순간들은 그새 내 마음 한켠에 스며들었던 모양이다. 물리적 거리로 매 년 만날 수 없으니 잔잔히 아려오는 기분 좋은 통증이 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만날 날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