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구름 한 점 없이 맑음

2025년 4월 30일 밀라노(2025년 2월 중)

by 경희

밀라노 대성당 주변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으나, 이상하게도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없었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다니고 싶어서 온라인으로 미리 티켓을 구매하지 않았다. 티켓을 구매하려는 줄이 제법 길다. 오후 1시 15분에 최후의 만찬을 보러 가야 하는데 이러다 줄만 서다가 가게 될지도 모른다. 온라인으로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큐알 코드가 중간중간에 있었지만 다들 우직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나 홀로 큐알 코드를 찍으며 분주하다. 사이트에는 오늘 예매할 수 있는 수량이 없다고 뜨는데 사람들은 왜 줄을 서 있는 것일까. 현장 예매가 가능한 수량이 따로 있는 것일까. 어느덧 매표소에 다다르니 갑작스러운 행사로 오전 입장이 불가하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오늘 오전에 예약을 하였더라도 못 봤다는 거다 허허허. 플래티넘 마스터카드가 있으면 패스트트랙을 이용할 수 있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가지고 있는 카드를 확인해 보니 한 개가 있다. 번호표를 뽑고 한참을 기다려도 내 차례는 오지 않는다. 저기에 키오스크가 있는데 줄이 짧다. 역시나 오늘 예매할 수 있는 수량이 없어서 결국 내일 오전으로 티켓을 예매하였다. 이게 뭐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는 너무 붐벼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웠다. 황소자리를 찾다가 인파에 치여 기진맥진하였다. 포기하고 가려는 찰나 수상한 사람들을 포착하였다.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후다닥 다가갔다. 보아하니 순서는 없고 눈치를 잘 보다가 얼른 들어가야 한다. 그래도 누구 하나 화를 내기보다는 이 눈치 싸움을 즐기는 분위기이다.

그나저나 이러다 랜드마크만 찍다가 하루를 보내게 되는 건 아닐지 울적해진다.


트램을 타고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으로 갔다. 대성당으로부터 멀어지니 거리가 한산하다. 생각보다 일찍 온 탓에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다. 근처 카페에 갈까 하다가 날씨가 좋으니 벤치에 앉아 기다리기로 하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날은 밀라노에 머무는 동안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유일한 날이었다. 해를 등지고 따뜻한 햇살을 받으니 기분 좋은 노곤함이 밀려온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표가 없어서 주위만 둘러보고 가는 사람들. 해가 따사롭게 비치는 광장은 소란스럽지 않은 작은 움직임으로 평온하다. 쉼표 하나에 이제야 밀라노가 보이기 시작한다.


스포르체스코 성에 가는 길에 유서 깊은 카페에 들렀다. 직원들은 손님을 응대하느라 바쁘고 주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테이블이 있는 실내는 만석이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내부는 격식이 있어 보였으나 밖이 보이지 않아 답답해 보였다. 커피 한 잔에 달콤한 디저트를 곁들인 티타임을 꿈꾸며 찾아왔으나 안 될 성싶다. 미련 없이 얼른 나왔다.


트램을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라 걸어가기로 하였다. 대로변에 카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통유리로 된 세련된 외관과 활기찬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그러나 여기서도 난관에 봉착하였다. 손님이 직원들과 화기애애하게 몇 마디 나누며 커피며 빵을 받아 드는데 나는 애처롭게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다. 모르겠고 일단 줄을 섰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어떻게 주문을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직원은 딱딱한 어조와 표정으로 여기서 계산을 한 후에 영수증을 제출하면 주문한 음료와 빵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직원의 태도는 불쾌하였으나 그보다는 이제 주문을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쇼케이스에 있는 피자와 케이크를 모두 먹어보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뿐이다. 어렵사리 피자 한 개와 케이크 한 개를 골랐다. 꼴랑 주문 하나 해낸 거지만 엄청 뿌듯하고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이를 눈치채신 걸까. 줄을 서 계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접시에 담긴 내 케이크를 가리키며 맛있겠다고 말을 건네셨다.


성 안으로 들어가니 벤치마다 사람들이 앉아 햇볕을 쬐고 있다. 2월이지만 완연한 봄날이다. 분위기에 취해 나도 벤치에 앉아 여유를 부려본다. 하나 더 보려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보다 가만히 쉬면서 보고 느낀 것들이 그 도시로 기억되는 법이다.


성 내부가 궁금해서 박물관에 가 보았다. 가구에 관심이 많은 터라 가구 전시실이 가장 흥미로웠다. 궁전에 어울리는 화려한 가구는 눈이 즐겁고, 단순하고 세련된 가구는 지금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아직 보고 싶은 게 많은데 점점 눈이 감기고 힘이 든다. 이건 다른 관람객들도 마찬가지인 건지 마지막 층에 도착하니 창가에 놓인 벤치는 모두 만석이다. 이제 그만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밖으로 나와 조금 걸으니 똑같은 현수막들이 길을 따라 쪼르르 붙어있다. 분명 여행 책자에서 봤던 작품이다. 지나가는 한국 관광객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임을 알게 되었다. 코 앞에 두고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웬걸 기념품을 팔고 있다. 여기가 아닌가 하고 나가려다가 유리문이 보여 다가가니 직원 분이 표를 보여달라고 한다. 혹시나 하고 박물관 티켓을 보여드리니 통과다.


고요하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작품만이 조명을 받고 있어서 시선을 끌어당긴다. 의자에 앉아 보고 싶은 만큼 보고 또 보고, 가까이 다가가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다. 작품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공간에 있었다면 잠시 보고 지나쳤을 터인데 여백을 준 덕분이다.


운이 좋게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에는 쉼표를 던져보자. 마음을 열고 내밀한 한 켠을 내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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