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14일 취리히(2025년 2월 중)
독일 기차가 지연으로 악명이 높다고 하지만 그간 별일이 없었는데 마지막날에 큰 것이 오고야 말았다. 전날 저녁에 내가 탈 첫 노선이 운행하지 않는다는 알림이 떴다. 두 번을 환승해야 하는 터라 가뜩이나 신경이 많이 쓰이는 여정인데 심란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스위스로 넘어가는 것이니 마음을 다 잡고 관련 규정을 찾아보았다. 열차가 취소되면 열차 종류와 시간은 상관없이 이용할 수 있다고 하니 안심이다.
무사히 취리히역에 도착하였다. 짐을 원하는 역으로 보내고 보관할 수 있는 유료 서비스가 있어서 엄마 캐리어는 마지막 숙소가 있는 비스프역으로 보낼 거다. 취리히역이 워낙 넓어 짐을 부치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미리 알아본 대로 잘 따라가다가 문득 너무 쉽게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의구심이 들었다. 결국 바로 코 앞에 두고 방향을 트는 바람에 엄한 곳으로 갔다. 한 바퀴 빙 돌아 도착하니 우리 앞에 두 팀 정도가 기다리고 있다. 저분들은 한 방에 찾아오셨으려나. 여하튼 엄마의 두 손이 가벼워지니 내 마음도 홀가분하다.
트램을 타고 세 정거장만 가면 숙소다. 구시가지에는 강을 따라 걷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화창한 날도 한 몫한다. 나도 어서 달려가고 싶다.
숙소 문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한 청년이 들어가려다 말고 도움을 주려고 하였다. 키박스는 다른 장소에 있을 건데 위치는 모르겠다고 한다. 나 같은 사람들을 종종 보아 무뎌질 만도 한데 호의를 베푸는 마음이 참 멋져 보인다. 문을 열려고 열쇠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씨름하고 있자 뒤이어 온 두 여자 아이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어디에서 왔냐고 묻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부산에 사는 한국 친구가 있다며 반가워하였다. 취리히에서 이리도 살가운 이웃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숙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이틀 지내기에 적당해 보인다. 큰 창 너머로 보이는 빨간 열매가 달린 나무 두 그루가 집 분위기에 생기를 더하여 마음에 쏙 든다. 환기를 하려고 창문을 여니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창문 밖 이웃도 새로 온 객이 마음에 드는가 보다. 나도 만나서 반가워.
3시간이 넘도록 이동을 한 터라 몸이 피곤하지만 그렇다고 이 좋은 날에 숙소에만 있기에는 아깝다. 가볍게 구시가지 산책에 나섰다. 린데호프 공원에서 누군가는 벤치에 앉아 또 다른 누군가는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전경을 보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여유를 즐기고 있다. 공원이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여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은 위에서부터 3분의 1 정도가 보인다. 1층이 아님에도 정원을 공짜로 가지는 셈이니 재미있다. 저 건물에서 공원을 보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공원에서 내려오니 골목길을 따라 상점이 많아서 마치 보물 찾기를 하는 것 같다. 쇼윈도에 전시된 옷들이 마음에 들어서 가게로 들어갔다. 점원이 손님 사이를 지나가며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건넨다. 안쪽에는 한 손님이 계산을 하고 있고, 다른 손님들은 구경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가게 면적이 좁아서 이 모든 게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게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다.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니 완벽한 타인은 아니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호기심과 즐거움이 새어 나와 나도 물든다.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세일하는 상품들을 모아두었다. 아주머니 한 분이 고른 옷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비추어 보시기에 잘 어울린다고 말씀드렸다.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던 따님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소매 끝에서부터 시작해서 등판을 거쳐 반대쪽 소매 끝까지 깃이 있는 카우보이 스타일 셔츠가 눈에 쏙 들어왔다. 겨울 옷이 부피가 크다 보니 캐리어에 공간이 넉넉하지 않다. 그래그래 마음에 드는 옷을 보고 즐거웠으니 그걸로 됐다.
걷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나타나면 사진을 찍었다. 포토존이 따라 있나 내 얼굴을 활짝 피게 하는 여기가 명당이지 무얼. 그 에너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되는가 보다. 나를 보고 미소 짓던 사람들도 뒤이어 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날이 저물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쿱에 들러 장을 봤다. 요거트, 샐러드 채소와 과일 등 여행 중에 주로 먹는 것들을 사고 나니 수제 소시지가 보였다. 오동통한 하얀 덩어리 사이로 초록색 허브 같은 것이 보였다. 이건 분명 맛있다는 신호다. 어떻게 구워야 할지를 몰라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덜컥 장바구니에 넣었다. 프라이팬에 굽다가 이대로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쓱쓱쓱 칼집을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그럴싸한 모양새가 나온다. 맛은 말해 뭐 해, 소시지 하나 얼마한다고 그리 망설였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