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일상 – 틀어진 길 위에 피어난 소소한 순간들
길이 틀어져도, 발견은 계속된다
오늘 아침, 부에노스아이레스 팔레르모 지역에 위치한 *'Lago de Regatas'*로 달리기를 가기로 했다. 이곳은 넓은 녹지와 고요한 호수가 어우러진 도시의 오아시스로, 현지인들과 관광객 모두에게 사랑받는 장소다. 호수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는 조깅, 산책, 자전거 타기에 안성맞춤이며, 주변의 푸른 잔디밭은 피크닉을 즐기기에 좋다. 또한, 호수에서는 보트 타기와 같은 수상 활동도 가능해 다양한 레크리에이션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구글 맵을 참고하며 버스에 올랐지만, 예상과 달리 점점 바다 쪽으로 향했다. ‘다시 원래 경로로 돌아오겠지’라며 기다렸지만, 버스는 이틀 전 방문했던 공항 옆 바닷길을 지나쳤다. 계속 원했던 경로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결국 중간에 달리기를 할 만한 장소가 보이기에 무작정 내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바다를 등지고 큰 상징물이 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기념비(Monumento a Cristóbal Colón)’였다. 이 기념비는 아르헨티나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921년에 세워졌으며, 원래는 카사 로사다 앞에 있었으나, 2013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콜럼버스는 단순한 탐험가 이상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유럽과의 역사적 연결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아픈 기억과 원주민 탄압의 상징으로도 여겨진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일부 도시에서 콜럼버스 기념비를 철거하거나 다른 인물의 동상으로 교체하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콜럼버스 기념비를 이곳에서도 마주하다니, 참으로 신기했다. 하나는 '정복자의 상징', 다른 하나는 '침략자의 흔적'. 같은 인물을 두고 이토록 상반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눈앞에는 황토빛 바닷물이 거세게 출렁이고, 파도 너머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보였다. 검은빛 물고기를 잡아 기념사진을 찍던 사람들은 이내 물고기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냈다. 단순한 사냥이 아닌, 순간을 기록하며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때, “Hola!”라는 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녀가 해맑게 웃으며 다가왔다. “Hola!” 나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Cómo te llamas?” — “Silvia.” 9살이라는 소녀는, 내가 “Yo hablo un poco de español”이라고 하자 천천히 말하며 나를 배려해 주었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마음이 오가는 데 언어는 장벽이 되지 않았다.
함께 찍은 사진 속에는 이방인과 현지인이 함께 만든 따뜻한 순간이 담겨 있었다. 돌아서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생은 예상한 대로만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틀어진 길 위에서도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만날 수 있다.’
하루를 담은 슈퍼마켓 – DIA에서의 작은 배움
숙소로 돌아오는 길, 생활에 필요한 식재료 몇 가지를 더 사기 위해 'DIA' 슈퍼마켓에 들렀다. 'DIA', 스페인어로 '하루'를 의미하는 이 이름을 떠올리며 들어선 슈퍼의 첫인상은 색감 가득한 과일 코너였다. 경사진 진열대 위에 형형색색의 과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거리의 과일 가게에서도 이런 진열 방식을 자주 보았기에, 이곳만의 작은 미학이 느껴졌다.
가격표는 또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신선 식품은 예상보다 저렴했지만, 대부분의 생필품은 한국보다 비쌌다. 최근 아르헨티나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중산층과 서민들이 생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2024년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118%에 달했으며, 이는 전년도의 211.4%에서 감소한 수치이다. 이러한 높은 물가 속에서 현지인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단순한 장보기도, 이곳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작은 창이 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쇼핑 중 대화보다는 각자 장보기에 몰두했다. 계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개 QR코드나 계좌이체로 결제하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현금을 꺼냈다. 러닝벨트 안쪽에 치파를 구입하기 위한 약간의 현금을 늘 넣어 다녔기에 집에 들르지 않고 슈퍼마켓에 바로 올 수 있었다. 사람들이 카드 복제 위험을 조심하라는 말을 많이 했던 것이 떠올랐다. 계산원은 말없이 금액이 표시된 화면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에 맞춰 돈을 건넸다. "Hola, gracias." 짧은 인사만으로도 충분했다. 언어가 달라도 필요한 건 서로 이해하려는 마음뿐이었다.
무사히 계산 후 구입한 물건들을 들어 보이며 상품 구입에 성공함을 스스로 자축했다. 나름 임시 거주자로서의 작은 성취였다.
나만의 자리, 나만의 대화 – 서점 카페에서 보낸 세 번째 시간
오후에는 일상의 일부가 된 서점 카페 'Libros del Pasaje'로 향했다. 이름을 직역하면 '통로의 책들'이라는 의미로, 이 서점은 팔레르모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전 세계에서 서점이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로, 다양한 독립 서점들이 도시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팔레르모 지역은 세련되고 모던한 서점들이 밀집한 곳으로 유명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과의 미팅 결과를 정리하고 교육 제안서를 다듬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이제는 익숙한 길을 따라 세 번째 방문한 서점에서, 어제와 같은 자리가 비어 있어 반가웠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풍경과 커피 향을 느끼는 반복된 익숙함은 안정감을 주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주문받는 직원에게 스페인어로 인사를 건넸다. "Me llamo Jeongho, soy de Corea, mucho gusto." 직원도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Me gustaría té caliente." 배운 대로 따뜻한 차를 주문하며, 이 도시에서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노트북을 켜고 스페인어와 일본어 공부를 먼저 했다. 아르헨티나의 한 서점에서 일본어를 공부하는 한국인이라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풍경이다. 업무를 보기 전에 어학 공부를 먼저 함으로써, 중요한 일이 뒤로 밀리지 않도록 우선순위를 정했다.
어학 공부를 마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 보낼 메일을 작성했다. 미팅 결과를 요약하고 구체적인 진행 방식과 필요 사항을 명확히 정리하여, 상대방이 쉽게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교수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첨부하며, 화면 너머로도 '우리는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할 수 있다'는 마음이 전해지길 바랐다.
3시간 정도 집중적으로 업무를 마친 후, 해지기 전에 서점을 나와 동네 거리를 둘러보았다. 나만의 아지트에서 일을 보고 나서는 내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워졌다. 역시 사람이든 장소든 물건이든 자주 봐야 정이 든다.
된장국 한 그릇에 담긴 위로 – 그리고 내일을 향한 설렘
숙소로 돌아와 아침에 슈퍼에서 사온 재료로 된장국을 끓여 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검색해보고 대충 조리할 순서를 살펴보았다. 직접 가져온 집 된장에 감자, 양파, 미역, 육수, 약간의 액젓까지. 처음 해보는 조합이었지만,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자와 양파를 썰며, 된장을 풀며 국물의 맛을 보며, 손끝에 작은 기대가 묻어났다. 평소에는 잘 먹지 않던 된장국이었다.
‘새로운 맛도 좋지만, 마음을 지키는 건 익숙함에서 온다.’ 국을 끓이며 감자와 양파를 자르는 손끝에 작은 뿌듯함도 함께 담겼다. ‘나, 요리에도 소질이 있네.’ 익숙한 재료들이 모여 내 손끝에서 완성된 국 한 그릇. 그 자체로 작은 성취였다. 국을 한 술 뜨는 순간, 따뜻한 짭짤함이 속을 달래주며 마음까지 편안해졌다. 이국에서 느낀 익숙함의 힘이었다.
저녁을 마치고 하루를 돌아봤다. 공항 옆 바닷가에서 실비아와 나눈 짧지만 따뜻한 대화. 슈퍼마켓에서 마주한 인플레이션의 무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카페에서 스페인어로 건넨 첫 인사와, 함께 나눈 미소. 그리고, 마음을 위로한 된장국 한 그릇까지. 그렇게 나름 부지런했던 하루가 지나갔다.
주말에는 이곳 사람들처럼 소풍을 가보기로 했다. 검색 끝에 고른 곳은 ‘Tigre’ — 스페인어로 ‘호랑이’라는 뜻. 강과 운하가 어우러진 델타 지역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주말이면 기차를 타고 찾아가는 인기 있는 휴식처라고 했다. 이름처럼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긴장되는 곳.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에게 주말이 ‘쉼’이라면, 나에게는 이 도시의 주말을 ‘살아볼’ 기회일 것이다.
창밖에는 밤공기가 살짝 스몄고, 마음속에는 내일을 향한 작은 설렘이 자리를 잡았다.
‘월화수목금. 잘 해냈다. 내일은 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