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낯선 길 위해서 마주한 첫 주말

러닝, 여행, 그리고 그 사이에 스며든 작은 행복들

by 신정호


열쇠 하나에 갇힌 아침과 마이클의 도움

드디어 이곳에서 처음 맞는 주말이다. 여느 때처럼 아침 러닝을 준비했다. 러닝을 위해서는 챙길 것이 많다. 땀 배출이 잘되는 가벼운 러닝복, 기록을 측정할 러닝와치, 주머니 대신할 러닝벨트, 햇빛을 가릴 선글라스, 발을 가볍게 해줄 러닝화, 치파를 살 약간의 현금, 거리 알람과 음악을 들을 골전도 이어폰, 그리고 순간을 기록할 액션카메라까지. 특히 골전도 이어폰은 땀에도 잘 빠지지 않아 러닝할 때 유용한 장치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문을 나서려던 순간, ‘찰칵’ 소리가 들렸다. 아차, 열쇠는 안에 두고 문이 닫혀버렸다. 이곳 문은 잠그지 않아도 한 번 닫히면 열쇠 없이는 열 수 없는 구조다. 게다가 메인 게이트조차 열쇠 없이는 나갈 수 없다. 등 뒤로 스치는 서늘함. 이런 구조를 잘 알면서도 무심코 저지른 실수였다.

우선 호스트에게 비상 열쇠가 있는지 물으며 SOS 메시지를 보냈다. 답이 오기 전, 1층에서 청소 중이던 마이클에게 다가갔다. 번역기 화면을 내밀며 말했다.
“Cerré la puerta con la llave dentro. Ayúdame, por favor.”
(열쇠를 안에 두고 문을 잠갔어요. 도와주세요.)

마이클은 공구를 들고 와서 “열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잘될 거야.”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핸드폰 불빛으로 그가 작업하는 손끝을 비추며 간절히 열리길 바랐다. 잠금장치가 조금씩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침내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도감과 함께 마이클에게 깊은 고마움이 차올랐다. 연신 “Gracias”를 외쳤다. 그가 아니었다면, 호스트의 답을 기다리며 소중한 주말 아침을 허비했을 것이다.

마이클은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반갑게 맞아주며 내 스페인어 연습에 언제나 기꺼이 상대해 주던 이웃이다. 그저 건물 관리인일 뿐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나의 첫 친구였다. 도움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온다. 관계는 그렇게 주고받으며 쌓이는 것이다. 언젠가 나도 그에게 무언가를 돌려줄 날이 오리라.


우리는 왜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까? 우리가 소중히 여긴 관계는 언젠가 서로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는 돌고 돌아, 가장 필요할 때 우리 곁에 힘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호수 공원 – 목적지보다 소중한 과정

열쇠 문제로 출발이 늦긴 했지만, 어제 버스를 잘못 타서 닿지 못했던 ‘Lago de Regatas’ 호수 공원에 이번에는 달려서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약 3.5km 거리, 30분이면 충분할 거라 예상했다.

도심을 조금씩 벗어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달리기의 좋은 점은 단순하다. 목적지가 아닌, 그곳으로 향하는 길 위의 풍경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 “달리기는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시(詩)다”라는 말처럼, 어디에서든, 언제든 달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자유였다.

토요일 아침의 거리는 평일과 달랐다. 급하게 오가는 사람 대신, 여유가 공기에 스며있었다. 새벽빛에 반짝이는 보도블록, 문을 열 준비를 하며 커피 향을 내뿜는 작은 카페,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느긋한 발걸음. 목적지가 아닌 과정 속에 숨은 아름다움이었다.

30여 분을 달려 도착한 호수는 탁 트인 시야로 나를 반겼다. 구불구불 자연스레 이어진 호수의 곡선은 둥근 원보다 더 정겨웠다. ‘어제 못 온 게 오히려 다행이네. 오늘은 이 여유를 더 오래 즐길 수 있으니까.’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신선한 바람과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마음을 깨끗이 비워주었다.

호수 둘레를 달릴 때, 다른 러너들의 발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혼자 달리지만, 함께 달리는 듯한 기분. 주말이라 그런지 공원은 활기가 넘쳤다. 경찰과 행사 관계자들이 공원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에 이곳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가 궁금해졌다. 참가하지 않더라도, 함께 달리며 그 열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호수 공원의 평화로운 풍경을 마음에 담고, 숙소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구글맵에는 '곧 도착'이라던 버스는 오지 않았다. ‘뭐, 급할 것 없는 토요일이잖아. 그냥 걸어가자.’ 발걸음을 느리게 하자 그제야 공원의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무 위 새들의 지저귐, 잔디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따뜻하게 비치는 아침 햇살까지. 오늘의 토요일은 목적지에 닿는 것보다, 그 길을 느리는 것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Tigre – 작은 경험이 남김 긴 여운

이곳에 오며 세운 계획 중 하나는 주말마다 현지 사람들이 찾는 교외로 나가 그들의 일상을 느껴보는 것이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주말 휴식처, ‘Tigre’—스페인어로 ‘호랑이’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버스를 타고 기차로 갈아타야 도착할 수 있는, 도심과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진 곳.

기차역에 도착해 처음 타보는 아르헨티나 기차(tren). 마음속에 묘한 설렘이 일었다. 기차 안은 버스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좌석 사이로 상인들이 활기찬 목소리로 물건을 팔았다. 서울 지하철에서 본 친숙한 모습이지만, 이곳에는 또 다른 장면이 있었다.

통로 한쪽에서 시작된 작은 공연. 기타 소리에 맞춰 노래가 흐르자 승객들은 손뼉을 치며 박수를 보냈다. 관객과 연주자가 따로가 아닌, 하나의 공동체처럼 어우러졌다. 나는 주머니에서 1,000페소 지폐를 꺼내 연주자에게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이 작은 순간이 서로의 하루를 조금 더 따뜻하게 해주길.’

Tigre에 내리자, 탁 트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층 건물 하나 없이 열린 하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숨통이 여기서 트이는구나.’ 사람들을 따라 걸으니, 강변을 따라 아기자기한 플리마켓이 나타났다. 손으로 엮은 목걸이, 엽서마다 묻어 있는 손때, 커피 볶는 구수한 냄새. 크진 않지만, 이 작은 것들이 모여 주말을 완성하고 있었다.

플리마켓을 지나자 보트 선착장이 보였다. 매표소마다 가격이 조금씩 달랐다. 눈치껏 고른 6,000페소짜리 티켓으로 보트에 올랐다. 결과는 대만족. 보트는 강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며 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강변의 별장마다 저마다의 주말 풍경이 펼쳐졌다. 어느 곳에서는 가족들이 수영을 즐기고, 어느 테라스에서는 친구들이 웃으며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여유가 눈부셨다. 하지만 문득 생각했다. ‘저렇게 한가롭게 사는 모습도 부럽지만, 이렇게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나 자신도 충분히 행복하다.’

나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자주 한다. 종종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 찾을 수 있나요?’이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가능한 다양한 경험에 나를 노출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오늘, 이곳 Tigre에서 나도 또 하나의 경험에 나를 노출시켰다. 이 경험이 내 삶에 당장 큰 변화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오늘 스쳐 지나간 작은 감동들이 내 안에 쌓여,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작은 씨앗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오이소박이 – 그리움으로 빚은 익숙함

나름 긴 여행에 살짝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오이를 사기 위해 슈퍼에 들렀다. 평소 김치를 자주 찾는 편은 아니지만, 낯선 곳에 오면 이상하게 그 맛이 자꾸 생각난다. 마침 여행 가방에 챙겨온 액젓이 떠올랐다. ‘오이소박이, 한번 만들어볼까?’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검색하며 재료를 준비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고민이 밀려왔다. ‘아르헨티나 오이는 한국 오이랑 다를 텐데, 소금 절임이 잘 될까?’ 소금량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며 정량을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사실 이 오이가 한국산이냐 아르헨티나산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에겐 처음이니까. 하나하나 레시피를 따라가며, 마치 작은 실험을 하는 기분으로 손을 움직였다.


얼추 비슷한 모양이 완성되자 플라스틱 통에 담아 상온에 두고 숙성을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 참지 못하고 살짝 뚜껑을 열었다. 한 조각을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 소리와 함께 퍼지는 새콤한 김치 맛. 순간, ‘이거야!’ 하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처음 만든 오이소박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김치를 이렇게까지 그리워할 줄이야.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으면서.’ 그제야 깨달았다. 사람은 가까이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르다가, 멀어지면 그 가치를 비로소 느낀다는 것을. ‘역시 없어 봐야 소중함을 안다.’ 그 한 접시에 담긴 것은 단순한 김치가 아니었다. 그리움과 익숙함이 주는 위로였다. 뚜껑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다음에는 부추를 구할 수 있으면 넣어봐야지. 더 욕심이 나네.’ 주방에 은은히 남은 김치 향이 내일을 준비하는 듯했다.




소풍 같은 하루의 끝자락

Tigre의 보트투어를 마친 후, 벤치에 앉아 사과 한 알을 꺼냈다. 시원한 과즙이 입안에 퍼지는 동안, 몸과 마음이 한껏 이완됐다. '이렇게 앉아 한가롭게 사과를 베어 물 수 있는 것. 이게 바로 내가 바랐던 하루가 아닐까.'

강물 위에서 본 평화로운 풍경들이 눈을 감아도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 이곳에서의 나의 첫 번째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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