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지만 완벽했던 월요일
일주일 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첫 월요일을 맞았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버스를 타는 것도, 길을 걸어가는 것도, 가벼운 인사를 건네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한 주가 지나는 동안 새로운 공간이 일상의 배경이 되었고, 또 다른 한 주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순간이 천천히 흘러갔지만, 이제부터는 아마도 시간이 훨씬 빨리 지나갈 것이다. 익숙해지면 시간의 감각은 점점 둔해진다.
‘Buenos Dias!’ 한마디가 만드는 낯선 도시의 온기
오늘 아침도 변함없이 러닝화 끈을 조여 매고 숙소 문을 나섰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뛰어보기로 했다. 숙소 인근의 공원 둘레를 다섯 바퀴 돌아 10km를 뛰는 실전 러닝을 해보기로 했다. 워밍업은 충분히 됐으니, 이제는 제대로 기록을 재보는 날이다.
아침 7시, 월요일의 공기는 신선했다. 출근길에 나선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도심을 가로질러 공원으로 향했다. 매일 지나치는 길이지만, 다시 보면 보이는 것들이 달라진다. 지난주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노점상들의 손길, 버스 정류장에서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인사를 주고받는 이웃들. 이젠 눈에 익은 풍경 속에서도 새로운 것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여느 날처럼 치파와 차를 파는 할머니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공원 입구에서 몸을 가볍게 풀고, 러닝 워치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같은 길을 반복해서 달리다 보니, 풍경이 더욱 자세하게 보였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벤치, 손님이 거의 없는 가판대에서 하품을 하며 앉아 있는 상인,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 사이로 한가롭게 개를 산책시키는 노인. 매일 같은 곳에서 장사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확연히 갈린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공원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반대 방향으로 뛰시는 한 어르신과 마주쳤다. 속도는 느리지만 꾸준히 뛰신다. 두 바퀴째에 마주쳐서는 내가 먼저 “Buenos días!”를 외쳤다. 어르신도 웃으며 엄지 척을 해주셨다. 또 한 바퀴를 돌고 또 한 바퀴를 돌면서도,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의 인사는 짧은 순간이지만, 서로의 노력을 응원하는 따뜻한 교감이 되어 반복되었다.
실제 거리가 예상보다 짧아서 목표했던 10km를 채우진 못했지만, 5바퀴를 돌며 만족스러운 러닝을 마쳤다. 속도를 무리하게 올리진 않았지만, 충분히 땀이 났고 가뿐한 숨이 차올랐다. 자연스럽게 걸음을 늦추며 어르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Buenos días!” 그러자 그도 환하게 웃으며 응답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소통이 되는 순간이었다. 함께 사진을 찍고, 짧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러닝을 마무리했다. 이곳에 와서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는 속도가 빨라진 나를 발견한다. 좋은 공기 탓일까? 아니면 소고기를 많이 먹어서 넘치는 에너지 때문일까?
숙소로 향하는 길, 공원 입구에서 치파를 파는 할머니께 다가갔다. 아침마다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하는 분이다. 러닝 벨트 안쪽에 준비해둔 현금을 꺼내 빵을 건네받으며 “Buenos días!” 하고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뭔가 말을 하셨지만, 빠른 스페인어를 알아듣긴 어려웠다. 그래도 표정을 보니 “운동했으니 맛있게 먹어” 정도의 따뜻한 인사일 것 같았다. 순간, 이곳에서의 일상이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이 한마디면 친구가 될 수 있다. “Buenos días!”
루틴이 만들어진 순간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스페인어 수업을 준비했다. 어느새 월·수·금 오전은 스페인어 공부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언어는 하루아침에 늘지 않는다. 특히나 어휘력이 부족하면 더더욱 그렇다. 오늘도 단어를 몰라서 계속 선생님에게 묻고 또 물었다. 처음 영어를 배울 때처럼, 기본적인 단어를 익히지 않으면 문장 구조를 알아도 대화가 어렵다. 단어장을 만들어 하루에 10개씩 외워볼까 싶다.
오늘은 선생님이 『El Principito(어린 왕자)』 스페인어 원서를 가져왔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한 문장씩 해석하는 게 비교적 수월했다. 보아뱀 이야기가 스페인어로도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문장의 구조는 대략적으로 이해가 가는데, 여전히 모르는 단어가 많아 뜻을 유추하며 읽어야 했다. 한국어로 한 번 읽고 스페인어로 보면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원서를 직접 해석하며 읽어보는 과정 자체가 꽤 흥미로웠다.
수업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서점 카페로 향했다. 1층을 지키는 직원에게 “Buenos días!” 하고 인사했다. 어제도, 그제도 같은 인사를 나눴지만, 오늘은 조금 더 자신 있게 말했다. 같은 길을 걸어 같은 공간에 도착하는 일상이 반복되면서, 이곳에서의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발길이 향한다. 같은 자리, 같은 풍경, 같은 책 냄새. 반복되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노트북을 켜기 전, 먼저 짧게 일본어와 스페인어 공부를 했다. 일하기 전에 언어 공부를 먼저 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효과적인 루틴이다.
오늘은 금요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프로젝트의 중간보고를 준비해야 했다.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가고 싶은 곳이 많아도, 일할 때는 일해야 한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업무에 집중했다. 이곳에서 일을 하면 다른 카페보다 집중이 더 잘된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 누구도 눈치 주지 않는 공간.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잘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찾은 작은 행복. 나만의 아지트가 생겼다.
소고기로 완성되는 하루의 끝
퇴근길처럼 익숙한 발걸음으로 슈퍼에 들렀다. 오늘은 갈비살을 사보기로 했다. 아르헨티나는 원래 농축산업으로 부를 이루었던 나라다. 현재 경제 상황이 악화되며 물가가 폭등했지만, 그나마 여전히 저렴한 것이 바로 소고기다. 아르헨티나는 지금도 세계적인 축산업 국가로 손꼽힌다. 특히 넓은 초원에서 방목한 소들이 풀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소고기는 맛과 품질로 유명하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덕분에, 매일 다른 부위의 소고기를 먹어보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곳 소고기는 지방이 적어 생각보다 질긴 편이다. 그래도 씹을수록 고소한 풍미가 좋다. 다음번에는 부드러운 안심을 도전해봐야겠다. 그리고 이곳에서 먹는 소고기는, 매일 달리는 러너에게 훌륭한 단백질원이 되어 주고 있다. 공원이 많고, 공기가 좋고, 소고기가 저렴한 이곳이야말로 러너들에게는 천국 같은 환경이 아닐까?
고기를 굽고, 시원한 맥주를 한 캔 꺼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 브랜드인 Quilmes. 특히 IPA가 맛있었다. 한국의 대형 맥주 브랜드들이 대부분 라거 위주라서,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즐길 수 있다는 게 참 좋다. 여기 있는 동안 가능한 많은 종류를 마셔봐야겠다.
오늘은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간 하루였다. 하지만 날마다 특별할 필요는 없다. 반복되는 일상이 점점 익숙해지고, 나만의 리듬을 찾아가고 있다. 이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충분히 특별한 순간이다.
아차! 까먹을 뻔했다. 3월 초, 이과수 폭포를 1박 2일로 방문하기 위한 비행기 표를 끊었다. 야호!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여정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